그가 오기 전에 날이 저물었네

권운지

가구

  빈 방에서 가구들 소곤거린다 
  고향을 물으며 통성명 한다 
  희미한 추억의 나이테 살피며 
  잊었던 내력을 들추어낸다 
  멧새들이 깃들었던 
  ‘둥지의 시간’이라 불러주세요 
  천의 잎을 파닥이며 우주와 교접하던
  ‘꽃의 시간’이라 불러주세요 
  열두 세상을 꿈꾸던 
  ‘노을의 시간’이라 불러주세요 
  야적장과 톱날을 거쳐 온 세월 
  까마득히 잊어버린 그 이름

폭설

  한 때 기쁨이었던, 나의 살갗을 뚫고 나간 저 희고 차가운 아이들은 여태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걸까. 까마득한 검은 시간 위에서 두려움도 없이 뛰어 내리네. 무릎이 저리지도 않는지 사뿐사뿐 내려앉아 마른 나무의 혼을 깨우네.

  한때 고통이었던, 네게로 흘려보낸 강물은 어느 바다에 섞여 반짝이다가 이제 돌아오는 걸까. 구름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투명한 결정으로 살아나는 말의 조각들 통증처럼 쌓이네, 부어오르네.

  야밤중에 나도 모르게 흰 산맥 너머 세상 밖으로 보내지다. 수신기는 고장이다. 저 눈부신 폐허, 도로망을 복구하려고 삽질이다. 종일 갈비뼈가 결린다.

푸른 별

  앞마당 배부른 독들이 밑바닥을 하늘로 두고 기약도 없이 벌을 서고 있다. 그 곁에 어처구니가 빠져나간 맷돌이 낮은 흙담의 풍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어머니가 윤기 나도록 닦아 금줄을 쳐놓은 장독간은 간장 향기를 피워 올려 배고픈 맨드라미를 키웠다. 잔칫날이 다가오면 빈 독들은 방안으로 옮겨져 그윽한 술독이 되었다, 깊은 밤에 독들은 온기가 돌고 꿈꾸듯 고요히 끓었다. 지붕위 에 푸른 별이 숯불처럼 피어나고 골방의 묵은 어둠이 발 효될 즘엔, 식구들의 잠 속도 맑은 술처럼 향기로왔다. 낯 익은 얼굴들 떠나 깊어지는 마을,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저 외계의 비행접시를 타고 날아간다. 멀고 먼 푸른 별을 향해

오래된 빛

  명아주 풀의 부끄러운 무릎을 
  가리기 위해 
  할머니 종일 실을 쓰신다 
  하얀 누에고치에서 
  무한의 명주실을 뽑아올리신다  
  할머니 은빛 머리카락이 
  함께 풀려나와 
  고운 실타래가 된다 
  어둠을 둘러지은 
  빛나는 시간의 집 속에 
  할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나비가 되지 못한 
  돌들의 깊은 잠을 지켜보고 있다

고장난 시계

  고장난 시계를 고치려고 시계점에 들렸더니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 곳에 다 있었다. 그 집의 뻐꾸기시계가 뻐꾹 뻐꾹 크게 울었다. 어슴푸레 뻐꾸기 소리를 따라가다가 나는그만 길을 잃고 만다. 뻐꾸기 소리는 고장난 시계 속 의 길, 그 길은 小路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 길로 들어섰 다. 긴긴회랑 끝에서 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산밭으로 가 는 길에는 우유빛 안개가 끼어 있고 아직은 찔레순이 여 리다. 찔레순을 잡는 아이의 손등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 다. 주인은 웃으며 야쿠르트를 권한다. 야쿠르트 빨대 속 으로 찔레꽃 향기가 빨려 나왔다. 주인은 가느다란 핀셋 으로 낡은 내 시계 속에서 찔레꽃 한 잎을 들어냈다. 내가 만난 아이의 몸에는 찔레꽃이 피고 있었다. 꽃피는 시간 속으로, 시간을 맞추어 드릴까요? 건전지를 교환한 내 시 계를 주인이 건네준다. 뻐꾸기 소리 밖으로 문을 열고 나 오지만 나는 다시 길을 잃는다

갈라파고스

  적도 아래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거센 해류와 수많은 암초로 
  바다 한가운데 저마다 고립되어 
  섬마다 방울새나 거북이가 진귀한 진화론을 쓰고 있는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나직이 되뇌어 보라 
  멀지 않은 곳에 갈라파고스가 있다. 
  춘란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무실 
  책상 아래 무수히 뒤엉킨 전선들 
  수백만 볼트에도 감전되지 않는 
  잠을 잊은 야행성으로 
  생존을 위한 이 혹독한 진화 
  우리는 이 섬의 고유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2호선

  아침마다 검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끝 모를 이 터 널은 궁리가 무성하다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밤을 새운 궁리도 있다 불가피한 선택이다 2호선은 해독이 어려운 문장들이 가지런히 담겨진다 나는 선 채로 조밀한 행간을 읽는다 저 문장들 무수한 대륙의 입구인 것을 알겠다 2호 선은 한사람의 생을 관통한다 거대한 기억을 관통한다 짐 승의 내장 속 같은 협궤를 지날 때 모두가 눈을 감고 말이 없지만 환승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갈아탈 때는 <환승입니다> 라고 알려준다 어떤 날은 <환생입니 다>로 들릴 때도 있다 끝까지 개연성의 손잡이를 놓지 않 는다 2호선은 오늘도 동어반복이다 추억이 아니라 기억의 힘으로 간다 곳곳에 부착된 기호를 읽으며 터널 속을 나 와 안개의 해안에 오른다.

流轉하는 아버지

  긴긴 협곡을 거쳐야 그곳에 닿는다. 폐광의 고요 속에 아버지의 수많은 전생을 만난다. 아버지는 옛집 앞 환한 벚꽃 나무 아래서 나를 향해 웃고 계신다. 검푸른 석탄을 가득 실은 가시랑차가 갱도를 나와 아버지와 내 앞을 지 나가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해 여름 땅이 울리고 강물이 붉도록 아버지는 앓았다. 신열을 참으며 긴긴 행 렬을 따라가며 돌아보고 돌아보던 아버지를 놓쳤으리라.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간다. 아버지도 수없 이 이 길을 찾아왔을 터지만 다리 위에서 어깨를 스쳐도 번번이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증언하던 사람들도 모 두 떠났으므로 이제 가시랑차와 아버지를 저 아득한 지층 속에 묻노니 끝나지 않는 생의 어느 봄날 검푸른 탄이 된 아버지 가시랑차 타고 오시면 못 다한 이야기 밤새 나누리라.

향기

  오랜 기억의 방마다 불을 밝혀 향기를 만드는 나무, 꽃 핀 나무 아래 지나갈 때 온 몸이 감전된다. 저 향기 나무 를 흔들고 간 바람이나 우레다. 격렬함이나 애잔함이다.

  향기는 가벼워 순식간에 생애를 점령한다. 최초의 밤이 갇힐 수 있다. 향기는 옛 상처를 건드린다. 향기는 고함소 리, 어지럽고 참회하게 한다.

  세상 밖 노을 속, 몸 안에 수 만개의 등을 켜고 서있을 당신, 무거운 몸 다 태우고 봄 하늘 가득 날아오른 당신, 향기 속을 빠져나오기에 한 세기가 걸린다.

빗속의 은신처

  가벼운 약속처럼 오다가. 오래된 결심처럼 변했다. 그 렇지 않고서야 망설임도 없이 저렇게 확실한 획을 내리 긋겠는가. 시야가 사라지고, 바람은 청각과 후각이 예민 하다.

  시간을 되돌리는 주술의 음악이 종일 몸속의 강물을 풀 어낸다. 와 와 소리치며 달려오는 저 비는 어떤 몸을 거쳐 간 강물이다. 자갈 바닥이 드러났던 강에 소리 없이 물이 불어난다.
  
  뼛속 깊이 차오르는 비는 시제를 모른다. 한 강물이 또 한 강물과 이어지는 저녁엔 맑은 음악이 될 때까지 깊이 깊이 젖는다. 보랏빛 구름의 전생을 따라가면 궁륭 속에 몸을 숨긴 슬픔, 눅눅한 바람은 최초의 우레와 보랏빛의 향기를 기억한다. 절명의 꽃들 살아난다. 흠뻑 젖은 한사 람이 들어온다. 빗속에 오래된 은신처가 있다.

봄에 쓰는 시

  제재소 앞을 지나올 때 죽은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에 몸서리친다. 죽은 나무의 혈액이 아침에 넘기는 책장에 묻어있다. 나는 본다 은폐된 봄의 이미지, 맹렬하게 돌아 가는 전기톱과 완강하게 통나무를 밀어 넣는 사내들의 말 없는 노동, 줄지어 기다리는 야적장의 나무들을. 절단된 꿈의 비명이 톱밥처럼 흩어지는 봄날, 억압된 충동들이 켜켜이 잘리어져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소하게 변형되고 있는 것을. 사내들의 손에 들리어져 나와 가지 런히 묶여지는 저 희고 향기로운 판자들은 무엇일까. 라 디오에서는 종일 뇌사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한 죽음 이 오랜 세기 동안에도 종료될 수 없음을 본다. 이 봄날

모하비

  그 남자 슬리퍼를 끌고 나간다. 그는 분리수거장 옆 시멘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울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곳으로 나간다. 종일 사막을 통째로 빨아들여 온몸이 절여졌다.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어둠 속에 구부정한 그 남자 일어나 일터에서 돌아오는아내를 맞는다. 검은 비닐봉지를 받아든다.

  깊은 밤 슬리퍼 소리가 사막 위에 긴 자국을 남긴다. 그의 손이 어둠을 더듬을 때 나는 모하비 사막을 지나가고있었으리라.

  잠 없는 사람들의 구부린 등에서는 소금꽃이 피어나고,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염분이 묻어있다. 건기의 사막은 초목들을 일정 간격으로 흩어놓았다. 손을 내밀어도 닿지 않는다. 이곳이 한 때 바다였던 것을, 강이었던 것을, 초원이었던 것을 누가 믿겠는가.

비어 있는 중심

  우수가 오기 전에 포도나무의 묵은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묵은 껍질이 감싸고 있는 벌레를 잡아내야한다. 나는 이빨이 단단하고 입언저리가 붉은, 살 속 깊이 박혀있던 그 벌레를 본적이 있다. 벌레는 언제나 중심을 겨냥한다. 껍질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내고 중심 속으로 들어가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갉아먹는다. 중심의 불꽃을 갉아 먹은 힘센 그 벌레는 수족을 마비시키고 실어증을 유발한다. 맥박이 느리고 식욕이 없는 것도, 제철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해마다 내가 봄앓이를 하는 것도 순전히 그 벌레 때문이다. 잘 벗겨지지 않는 거무죽죽한 마른 껍질을 찢어낸다. 섬유질처럼 질긴 날들이 먼지 파편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왔다. 저 어두운 협궤, 벌레가 파먹고 지나간 줄기는 터널처럼 속이 비어 있고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졌다. 벌레는 벌써 간 곳 없고 캄캄한 터널 속에 벌레의 검은 배설물 같은 시간들만 쌓여있다.

동 백

  어린 투신投身을 놓고 말이 많았다
  저 붉은 결단은 분명
  고막이 찢어지는 절규일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곳곳에 불가청음역이 존재한다
  인정해야 한다
  소리에도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허공에도 장벽이 있다는 것을
  붉은 소리를 들어올리는
  두 손의 후회가 오래 아리다

낙화를 따라가다

  한 남자가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 속으로 벚꽃 눈부신 봄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그 남자의 지난했을 생애가 간단명료하게 자막으로 처리되었다. 낙화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벼랑까지 떠밀려와 꽃잎처럼 몸을 날린 그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 그 화면의 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남자가 남겼을 유서 속으로, 환하게 꽃 핀 길은 분명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해독이 어려운 은유처럼 햇살 속에는 비밀스런 향기가 섞여있다. 어떤 향기는 잠결에 들은 고함 소리 같다.

  검은 껍질을 뚫고 나와 꽃들은 일제히 절벽에 매달려있다. 미풍에도 꽃의 중심은 뜨겁고 소란하다. 여린 꽃잎에서 절벽을 들어올리는 힘을 본다. 절벽 하나가 하르르 무너진다.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아찔한 어지러움에 나의 몸이 강물에 기울어졌다.

서쪽 숲의 어머니

  어머니 찾는다고 누가 서쪽 숲에 현수막을 쳐놓았다. 솔가지 사이 어머니 얼굴이 펄럭이고 있다. 어머니는 가까운 마트 앞에서 실종되었다. 자그마한 키에 분홍 셔츠, 회색 비닐 신을 신고 있다. 어머니는 치매를 앓았다. 걸을 땐 한 손을 자주 허리에 얹는 습관이 있었다. 연전에 잃은 내 어머니와 같았다. 혼자 빈집에 버려졌던 어머니, 어떤 소리에 이끌려 기억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운 골목 안을 찾아 갔던 것이 낯선 밖이었을 것이다. 숲길 가던 사람들은 제 어머니 생각하듯 현수막 앞에서 오래 발길을 멈춘다. 그 때 현수막 속 어머니가 손을 내밀어 솔가지를 뚝 뚝 꺾더니 길 위에 뿌린다. 어둠 내리는 숲에서 길 잃지 말라는 듯, 어머니는 오래도록 솔가지를 꺾으며 왔던 것이다. 이 숲의 굴헝 속에 분명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을 것이다. 가시덤불 속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실 천의 어머니

고비

  임종을 기다리는 어머니 방 창 너머 봄 화창하다. 땅 속에 뿌리 내린 것들 모두 꽃을 피우려 안간힘이다. 상한 뿌리에서 길어 올리는 꽃향기 길목마다 가득하다. 저 꽃 피우기까지 캄캄한 몸속에서 얼마나 많은 불꽃이 일어났을까. 나는 종일 젖은 어머니를 닦아내며 그 불꽃 따라간다. 식은 땀 흘리며 긴 긴 연두의 터널을 지나 저 눈물겨운 고비의 길.

황홀한 잠

  산북에 가면 한 남자가 썩고 있지
  그 남자의 푸른 정이 썩고 있지
  그 남자의 지난 세월, 추억이나 눈물까지도
  썩어서 두엄이 되었지
  오래된 작살이나 살촉 같은
  그 남자의 고통까지도
  썩어서 노래가 되었지
  그 곳의 아침은 옷자락 파고드는 안개로 가득하고
  골짜기 가득 맑은 노래가 흘러가네
  그 남자의 노래가
  현이나 보아래를 못 미쳐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긴 강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그 남자는 한 낮에도 코를 골며 자고있네
  평화처럼 달콤한 잠에 빠져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네
  과수원의 낙과처럼, 돌담아래 꼭지 빠진 애호박처럼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와
  혼곤히 썩고있네
  온 몸에 곰팡이가 피어
  해체되는 황홀감에 빠져있네
  산북에 가면 이미 그 남자를 만날 수 없지만
  그 남자의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네
  흔들어 주시게, 세차게 더욱 세차게

섬의 적멸

  부음을 받고서야 그가 오래전 섬으로 갔던 것이 생각났다. 평생을 달려간 길의 끝이 섬이었다. 링거병을 달고 있던 섬의 손목이 푸르다. 섬은 휠체어를 타고 긴긴 회랑을 오갔을 것이다. 마취와 통증 사이 짙푸른 심해를 조금씩 혼자 저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아흔아홉 번의 후회를 붉은 노을에 풀어 놓기도 했을 것이다. 아침엔 젖은 깃발을 올려보기도 했을 것이다. 흰장갑이 섬을 들어올렸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섬과 고별식이다. 애끓는 오열이 벼랑 아래 끓어올랐다. 오랜 통증이 기화되는 시간, 육중한 문이 열리고, 또 한 차례 남은 울음을 추려냈다. 이렇게 환하게 적멸에 들다니, 통증이 분리되고 먼지처럼 가벼워진 섬, 경전인양 자기 항아리에 담겨 건네진다.

머나먼 스와니 강물

  오늘은 후회 없이 닭가슴살 요리를 먹으리라.
  냉동실에서 냉동된 가슴을 꺼낸다.
  종일 들고 다니던 가죽가방의 지퍼를 닫고 나와
  해동을 기다리며 스타킹을 벗는다.
  살 속 깊이 박힌 얼음조각이나
  먹먹한 독방의 중독된 불빛을
  팔딱이며 지나간 한낮의 불안을 맑은 물에 헹군다.
  속살의 기억이 다치지 않게
  얇게 저민다.
  약한 불에 굽는다.
  황금의 알을 훔쳐가던 손에
  조각조각 해체되어 붉은 상표로 포장된
  내력도 모르는 팍팍한 가슴살을
  그대로 우걱우걱 먹지 못한다.
  자극적인 드레싱은 피하리라.
  홰를 치며 날아오르던 첫새벽이나
  이슬 꿰던 텃밭의 푸성귀
  머나먼 그곳 스와니 강물을 허밍으로 곁들여 먹는다.
  스와니 강물 다음 가락을 기억하지 못한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기억하지 못한다.
  멀고먼 옛 고향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력도 모르는 가슴살을 먹으며
  나는 나를 부정한다.
  죄다 지워졌던 것이다.
  어떤 손이 그 속에 낯선 나를 입력해 두었던 것이다.

가방

  오래된 갈색 가죽 가방 
  손때 묻어 이제는 육신의 한 부분이 된 
  끌어안으면 부드러운 살갗의 촉감 
  서로 익숙해진 체취 
  많은 것을 구겨 넣고 많은 것을 토해내 
  헐거워질 대로 헐거워진 
  세워놓아도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낡은 가죽 가방의 펄펄 끓던 전생에 대하여 
  가방이 되기 위해 거세되었을 
  그것의 말랑 말랑한 꿈에 대하여 
  한번 쯤 생각해 보셨는지 
  무모한 손에 대하여 
  황금으로 변해버린 사랑에 대하여 
  한번 쯤

사막의 사랑

  모하비사막을 지나갈 때 우리들의 사랑이 얼마나 추상적이었나를 깨달으리라. 몬순풍이 불어오는 멕시코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선인장들을 간간히 보리라. 울지 말아라. 가시투성이 그대가 홀로 남아 사막의 주인이 된다면 기쁘지 않겠느냐. 저 농염의 햇살이 작은 풀잎의 그늘까지 파고들어 오금을 떼지 못하는 뿌리 곁에 누우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이느냐. 우리의 속삭임이 얼마나 분명하게 들리느냐. 그 어떤 뜨거움으로 불러도 껴안지 못하고 그리움 사무친 가시를 매단 채 우리의 사랑은 지금 사막의 중심을 걸어가고 있다.

잉어찜

  옛 강에 와서 잉어찜을 먹는다
  오색 고명으로 단장되어 나온
  비릿내를 제거해 한결 담백해진
  죽은 아버지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쇠젓가락으로 한 점씩
  그것이 죽은 잉어라는 것도 잊은 채
  억센 가슴뼈가 드러날 때까지
  막소주를 곁들여
  무지개를 쫓아온 불혹의 거친 손들이
  옛 강의 살찐 잉어를 뜯어먹었다
  숨겨둔 치욕도 담담하게
  희디흰 가슴 속살 헤쳐가면
  오색 꿈의 잔해만 접시 위에 앙상하다

악기

  칠성시장에 가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 손수레에 너덜너덜 남루한 생애를 싣고 조명이 없는 무대 위로 그가 등장하면 술렁이던 시장이 조용해지지. 절단된 다리를 끌며 손바닥으로 기어와 때묻은 헝겊으로 에워싼 선이 짧은 마이크를 들고 그가 노래를 부르네. 그의 노래는 힘줄이 불거진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지만 일순간 시장바닥을 감전시키는 전류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다고들 하네. 상처의 몸이 뽑아내는 선율, 저 낡은 악기 몇 개의 현을 가졌을까.

너트를 주운 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아스팔트 위에 반짝이는 너트 하나를 주워들었다. 누가 흘리고 간 것일까 이 은밀한 전갈을, 어디엔가 끼워 넣으면 피가 통할 것 같은 광택이 좋은 아직은 쓸만한 너트였다. 이 긴요한 너트를 버리고 헐거워진 관절을 끌며 주말 오후는 어디로 가고있는가. 그의 병실을 찾아가는 나의 전도는 밝아왔다. 그의 암세포가 말기로 치닫는다 하지만, 아직은 쓸만한 너트를 갖고 있지 않는가. 광택이 좋은 너트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전율했다. 반전의 짜릿한 예감, 번복의 강한 유혹이 매달린다.

겨울산행

  겨울산에 갔었다.
  얼어붙은 골짜기
  몇 마리의 새들이 떨어져 있었다.
  죽은 새들의 비명 위로
  설일雪日은 쌓이고
  깊은 계곡과 등성이마다
  알몸의 나무들은 무릎을 꿇었다.
  앉아서 세우는 몇날 밤
  우리들의 구원은 멀고
  끝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
  새들의 깊은 잠을 묻을 때
  그 눈 속의 풍경을 지워 버리고
  파닥이던 날개의 꿈도 지워 버리고
  먼지처럼 가벼운
  원형의 새들을 묻을 때
  결빙의 바닷속은 고요하고
  허공을 자르는 칼들을 거두어
  벗은 나무들은 순종하며
  어디론지 줄지어 떠나고 있었다

압화

  오래된 책갈피 펼치다 너를 만난다
  한 때 이슬 맺히고 번개가 지나가던 몸
  비로소 주술이 풀린 듯 고요하구나
  내 마음 갈피에도 자국이 깊다

  어느 이름 모를 지상의 우체국에서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 속 눈물 방울

  더 이상 갈 곳 없던 육체의 마지막 그곳
  그 벼랑 위의 꽃

쥐똥나무 분재

  1
  쥐똥나무야, 자느냐,
  자느냐, 자느냐, 쥐똥나무야.
  지금 창밖은 어둡고 내 마음 속에
  종일 울고 섰던 아이도 돌아가고 없다.
  굳게 닫힌 창문의 커튼이
  외계의 불빛들을 차단해 버리고
  섣달의 긴긴 밤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나는 한결 조급해진 마음으로
  네 곁에 다가가
  함묵의 이 겨울을 흔들어본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이 밤, 내가 너를 깨우지 않으면
  누구를 깨우랴.
  절망의 손끝에 와 닿는 차가움
  주검처럼 앙상한 가지를 가로저으며
  쥐똥나무야, 너는 끝내
  모른다고 하는구나.
  2
  한낮에 내가 걸어온 길
  길가에 도열했던 암울한 간판들
  우리들의 튼튼한 삽질위에 난무하는 현수막들이
  하나씩 둘씩 어둠 속으로 지워지고,
  나의 갖가지 외출복들이
  어둠 속에 완전히 지워져 버린 뒤에야
  쥐똥나무야, 너는 비로소
  쥐똥나무로 돌아와
  내 곁에 눕는다.
  고즈넉이 누워 있는 너를
  나는 차마 깨울 수가 없구나.
  쥐똥나무야, 쥐똥나무야, 듣느냐.
  너의 부활을 위하여 밤새
  보일러실의 모우터는 힘차게 돌아가고
  거실의 창들은 저렇게
  이를 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겨울이 겨울다울수록
  더욱 무성해지는 너의 꿈을
  쥐똥나무야, 내 잊지 않으마.

  내 몸이 민들레 꽃씨처럼 가벼워 하늘을 날아오른 적이 있었다.
  해묵은 은행나무나 반짝이는 강물, 옥녀봉이나 먹바위 마을의 남루한 지붕들 위로 아이들은 날아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까지라도 날아갈 수 있었다.
  모든 길이 잘 보였다.
  날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길 위에 있었다.
  땅 위의 아버지들은 나뭇지게에 참꽃다발을 묶어 산을 내려오고 어머니들은 저녁연기를 피워 올려 높은 곳의 아이들을 안아 내렸다.
  그 봄에 누군들 꿈꾸지 않았으랴

사신私信

  내실의 쥐똥나무가 수상하다. 명확한 확증의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오늘 비로소 우수를 보내고, 절제된 가지의 긴긴 침묵위로 더디게 다가오는 적소謫所의 봄. 겹겹으로 에워싼 감시망을 뚫고, 무엇이 화분의 쥐똥나무를 설레게 하였는지 오늘밤 내가 지켜보고자 한다. 밤이 깊을수록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고, 홀로 버티는 파수꾼의 밤은 곤혹스럽다. 못 미더워 완강한 철제대문의 문고리를, 거실의 이중창들을, 방으로 통하는 출구의 자물쇠를, 열두 번씩이나 부정해 보는 오늘밤도 첫닭의 울음소리는 목전에 당도하고, 이 완벽한 차단의 담벼락을 뚫고 들어와 두드러진 잎눈마다 봉인의 밀서를 걸어두고, 무엇이 이방을 다녀간 것인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억

  호두를 깨뜨릴 때 내가 당면하는 저항, 그것은 호두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호두는 제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견고한 호두의 껍질을 깨뜨리고 싶다. 언제나 싸움이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은, 호두알의 이쪽에서 느끼는 두려움, 그러나 나는 깨뜨리고 싶다 껍질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은 나를 날카롭게 한다. 기억재생법으로 그는 나를 치료했다. 치료받는 사람은 모두를 말해야 한다. 단단한 봉합 속에 짓이겨진 시간, 응고된 기억의 핏덩이를 걷어내고 마침내 우리는 호두의 슬픈 세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오기 전에

  그가 오기 전에 날이 저물었네. 
  그가 오기 전에 이름 모를 한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어금니가 돋아나고, 유치가 흔들리고 
  아이는 초경을 치르고, 불혹을 넘기고 
  그가 오기 전에 서까래는 좀이 슬고 
  한 부족이 멸하고 
  한 세기 낡은 빛살이 떠나려하네 
  오지 않는 그를 위해 제물을 차리고 
  그의 혼백을 묻는다. 
  내가 받은 유산은 끝 모를 기다림 
  내가 받은 유산은 건너가지 못하는 국경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갇혔다.

중력의 발견

  나의 학습은 늘 피상에 머물러
  깊은 각성에 이르지 못해
  삭정이에 매달려 영원을 꿈꾸었네
  이순耳順을 지나서야 중력을 발견했네
  눈부신 한낮의 사과밭이 아니라
  황혼이 내리는 쓸쓸한 공원에서
  앞서가는 그 남자의 굽은 등에서
  존재의 가벼운 낙하를 보았네
  이 쓸쓸한 전광석화
  나의 발견이 조금 더 빨랐더라면
  나는 많은 것을 잃었으리라
  그러나 후회의 기도는 짧았으리라
  공중에 걸어둔 시간을 거두어
  나는 지금 낙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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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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