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
유정이
온유한 독서
밤새워 읽은 책은 이본異本이었어요 밑줄 그어 두었던 문장은 모래화석이 되었죠 눈으로 읽은 글자는 귀로 모여 버스 터미널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바퀴를 굴리며 떠나갔어요 질문 없는 나라에 도착한 선박이 밤새워 읽은 것은 두꺼운 안개였습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우리는 어두운 색깔, 내가 읽은 페이지는 찢어진, 아니죠. 찢긴 너무 더러운 바닥이었어요
혁명은 아직 당신을 합니까
눈을 감고 고요의 발목을 만져보세요 당신이 몇 개의 마디로 되었는지 세어보세요 걸어온 발자국과 지나온 행성의 수는 잊어야 합니다 장미의 꽃잎은 가시보다 더 뾰족해요 잠깐 문을 열어두고 없는 새벽을 가지세요 부스럭거리는 문장에 물음표를 달고 잘못된 구문을 골라둡니다 한 개의 비문이 한 개 이상의 치명에 들게 합니다 치명은 칼날이 아니라 배려의 표정에서 꺼내지기도 해요 긴 혀의 일부를 떼어놓고 싶다면 일요일로 가세요 아직도 시야에 눈발이 덮입니까 눈발은 시야를 구출할 수 없는 수신호, 우리는 미처 꺼내지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 혁명을 합니까 나는 당신을 혁명하지 않습니다 혁명은 여전히 쓰지 못한 당신입니다
부엌의 완성
창문을 벗어나는 고양이 울음소리 부엌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해 창문을 열고 흡, 빨대를 꽂아 놓으면 나를 빨아 당기는 골목의 저녁은 깊어 가는데 위층에서는 의자 끄는 소리 세 번 네 번 윤회를 거듭해서 겨우 긴 다리를 갖게 되었어 벽에 붙은 달력이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물이 닿지 않는 손가락 걸음을 멈춘 신발들은 가지런히 놓여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해요 한 움큼씩 머리칼이 빠지고 수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데 거울은 내게 무관심해요 나는 고양이의 매끈한 꼬리를 밟고 지나가는 적막의 긴 다리에 탕탕 못 치는 중 세 번 네 번 삼만 육천번 윤회를 거듭해서 한 채 부엌이 완성되었어
부분적으로 흐림
담 옆 수선화가 부분적으로 흐리다 꽃을 바라보는 나도 부분적으로 흐린 사람 부분적으로 흐린 이별도 끝이 나고 일찍 철든 봉숭아도 조금은 흐려졌겠다 오늘은 커튼자락으로 흐린 하늘을 가리고 먼 곳에서 돌아온 너를 떠나도 좋겠다 잘라놓은 손톱조각 같은 구름 아래 나는 부분적으로 흐린 사람 부분의 부분으로 이룩된 사람 아무것도 될 수 없다면 수선화가 되어야겠다 전부를 다 건너도 도달할 수 없는 이 갸륵한 조각을 맞추고 나면 잎 진 봉숭아가 되어야겠다 부분적으로 흐린 여름 한낮을 뒤집어쓰고 민달팽이 한 마리 길게 하품하며 간다 민달팽이 한 마리 긴 하품이 되어야겠다
아침은 어디서 오는가―편두통
찌르레기 운다 부리를 콕콕 쪼며 발을 쿵쿵 구르며, 때로 뒤로 몸을 뒤집어 사지를 흔들기도 하리라 너는 누구냐고, 아침은 어디서 오느냐고, 검은 얼룩이 묻은 새벽의 얼굴, 문을 열고 나가면 허물어지는 눈동자여, 다 나오라고 그래! 출구 없는 통증에 갇혔다고, 반성 없는 밤이 계속된다고, 나는 밤과 밤 사이에 끼인 검은 유리창, 그렇게 생은 가리라고, 찌르레기 운다 발을 쿵쿵 구르며, 때로 뒤로 몸을 뒤집어 사지를 흔들며, 찍어댄다 날카로운 부리를 콕콕, 울음을 머금고 내리는 비, 새벽 세 시가 다 찢어질 것 같다
미행
누군가 뒤를 밟아오는 뒷덜미 서늘하다 검은 밤길을 스윽슥 밀고 오는 발자국 하나가 늦은 귀가를 따라붙는다 깊어진 어둠이 움푹 패였다 새벽 쪽으로 기운 둔탁한 불빛 정수리를 내려치기 전 몇 개 기민한 생각으로 흩어 져야 한다 긴 꼬리를 끌고 가는 새벽의 입자가 축축해진다 어서 이 고요를 자르고 달아나야 한다 귀를 세우고 바짝 다가서는 그림자에 숨을 흡, 멈추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머리칼을 낚아채고 달아나는 바람! 어디에도 없는 것에,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바람도 소리도 나 혼자 지어내고 벌벌 떠는 일, 내 꼬리 내가 밟는 일!
국경 너머의 잠
티벳 북부 상그릴라는 어디를 딛어도 변방이다 수요일을 종일 걸어 수요일에 도착하는 설산 아래, 기원을 알 수 없는 기침처럼 눈발 뿔뿔이 날린다 정상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 있다 무한정 짐을 지겠다는 포터는 제 몸을 가장 무거워하는 사람, 마른 줄기 같은 다리를 씻어 바위 위에 널어 두고 피로한 걸음을 말린다 바로 앞줄에서 낮이 끊기면 캄캄한 어둠을 이어 붙이고 걸어야 한다 한 발씩 걸으면 한 발씩 어두워지는 길, 앞서간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혀를 대보면 사지로 뻗어오는 시큼한 별빛들 이국의 밤을 맛있게 구워 놓 는다 더는 갈 수 없을 때 거기가 정상이다 이불도 없이 누워 낱개 분양받은 한 평 하늘에 플러그드. 서울에서 잠들면 북안까지가 국경이고 네 옆에 누우면 너 이전이 국경이다 오늘 밤은 너 이후에서 잠든다
잠 너머의 국경
네 시가 지나면 마른 빨래들이 돌아왔다 바람의 기별을 하나씩 개켜 두는 동안 구부정한 저녁이 처마 밑으로 마른 흙 툭툭 털며 들어선다 밤은 낮게 내려깔리고 나는 값을 지불하듯 하나씩 세어보던 초록 잎사귀를 검은 하늘에 떨어뜨린다 마술처럼 어둠의 장막을 지나면 세 부분으로 나눠진 내가 꺼내질지도 모른다 다른 나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마를 긁적이면 생각에 잠겨 있던 독수리가 튀어나왔다 골목에 세워두었던 그림자는 푸드득 날아가고 없다 검은 유리창에 찍힌 새의 발자국 온전히 사막을 짚었던 기억은 없는데 목에 걸린 이름 모래처럼 서걱거린다 헛바퀴 돌던 마음은 낙타가 피우는 먼지에 가 쌓이고 나는 바닥을 모포처럼 뒤집어쓴다 당신이 그리웠으나 몸에 돋는 나이테 떼어 머리맡에 누이고 길게 발가락을 늘여본다 엄지발가락 끝으로 잔뿌리들 우지직거리며 태어나는 소리 모래바람 부는 국경 너머로 내일은 우편배달부 같은 바람이 손을 잡아끌 것이다
유리창 밖의 일
뚝뚝 끊기는 빗방울의 정수리에 앉아 있어요 젖은 혀끝으로 모이는 이름들 한낮, 어둡다는 것, 손목을 긋고도 울음은 계속 돋아나요 몇 생을 거듭해 발밑으로 깔리는 그늘을 얻어요 어스름이 데려오는 안식, 푸른 커튼 쳐진 유리창에는 날아오르다 멈춘 비의 발자국이 찍혀요 깃든다는 것은 다른 한 개의 세상이 소거되었다는 말 우리는 줄곧 세로로 서서 혀끝에 고이는 성근 침묵을 굴려볼 뿐이죠 달려와 부딪히던 어떤 이름을 하나씩 불러 세워보는 것은 유리창 밖의 일 소리를 지운 비가 발치 아래로 내려와 쌓이고 나는 조용히 우는 표정을 지워요
밤의 거실
종일 찾을 수 없던 얼굴이 까만 창에 프린트된다 네팔 국경에서 떨어뜨린 얼굴을 밤의 거실에서 줍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득 갸륵해져서 호젓해져서 보이나요. 내가 낮에 사라진 유령처럼 가벼워져 밤과 밤 사이에 끼인 성냥을 그어보는 1호 태풍 네파탁이 북상 중이었는데 북상하던 생각이 한꺼번에 쏟아졌는데 나는 파랑의 반대말 파랑은 주의보에 앞선 말 아이 때는 거울이 지금은 유리가 낮이면 사라졌다가 밤이면 나타나는 어둠이 좋아 까만 창에 프린트되어 담기는 그림자가 좋아 아부다비에서 떨어뜨리고 밤의 거실에서 주워보는 종일 찾을 수 없던 얼굴, 손발 없는 이름이 좋아
수레가 우는 밤
신발을 오래 신다가 당신을 놓친다 골목의 층층 계단마다 한 개씩 떨어진 그림자 수레를 기다리는 사이 발이 발을 어긋나 아무리 구부려도 수레를 신을 수 없어 수레는 내게 너무 큰 신발 당신은 내게 너무 네모난 신발 잠시 멈추어 있던 바퀴는 층층 계단에서 덜커덕거리는 저녁을 세워두고 간다 걸음이 느린 사람들은 수레를 타지 않아 당신은 너무 깊은 신발, 한 번 빠지면 나무처럼 키가 세워진다 하네 이마에 빨갛게 발열하는 꽃을 피우는 당신 울고 계십니까 울음 흩뿌리는 당신을 버리고 바닥을 타고 갈 시간, 깜깜한 밤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깥을 향하는 당신, 수레가 우는 것 본 적이 있나요
귓병
내밀한 것에 귀를 들이댄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듣지 못하는 고독을 구형받았다 패랭이꽃밥이 봄날 내내 쏟아져 내렸다 울지도 못하고 나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눈동자만 너무 오래 베어 먹고 있다
울음의 미사
산양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밤새 우리는 늑대의 울음을 울었다 듣기에 거룩하였다 당신과 나는 각자 설움의 무게를 들어 경배하였다 부드러운 혀 밑으로 붉은 살점을 떼어 올려주니 함께 거룩하였다 제 속에서 꺼낸 소리 를 바쳤다 교향악이 울려 퍼지고 캄캄한 밤은 온전히 제자리에 멈추었다 검은 어둠은 더욱 빛나고 부드러운 당신의 이마는 물결처럼 반짝였다 세 번의 새벽이 오기 전 산양의 피는 온전히 마르고 당신의 긴 울음도 세 번이나 부정되었다 최초의 우람한 소리는 궤도를 타고 최후의 신음으로 내달았다 가끔 머리를 맞대었으나 하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사랑했지만 그것이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머리를 풀어 남은 울음을 울었고 당신은 손목을 풀고 다시 두 번의 새벽으로 갔다
새벽의 일
세 시는 더디고 네 시는 벌써 도착했다 너는 멀리서 돌아와 책장처럼 덮여 잠을 잔다 긴 손톱을 매단 손가락은 어두운 골목을 타이핑하고 기차가 레일을 벗어난 도시는 밤새 불타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미친바람은 사방에서 부는데 세상의 모든 시야 바퀴야 유리창아 다시 활활 타 버려라 그렇게 얌전히 있다가는 이름도 주소도 지워지고 말거야 발가벗어라 골목아 새빨간 혀를 아래위로 핥으며 파고들어도 귀가 없어요 몸이 없어요 골목에 갇힌 나는 창문을 두드리면 지붕 언저리에서 노크소리가 들린다 너는 쉬이 열리지 않고 양철 지붕은 고양이가 들려주는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곧 어둠이 가고 새벽이 완성될 것이다 네 시가 가면 다시 네 시가 오고 세 시는 언제 올까 올려다보는 골목 위로 태양이 두 개 그리고 분홍 달에 매달린 손톱은 여섯개 이마에 돋은 별은 하얗게 식어간다
커피 볶는 시간
대개는 정교하다 모두의 옆모습 비트가 센 오션드라이브Ocean Drive*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와 수월하게 건널 수 없는 것들은 때로 매혹적이야 앞이 있으니 뒤가 있고 그러니 흔들어볼래? 비벼도 좋아 벗어도 좋다는 말이지 소리를 지르며! 진짜처럼 울어볼래? 진짜라고 말해볼래? 낮과 밤처럼 그렇게 두 쪽으로 나뉘는 걸 택하지 그래 그걸 흠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래 그렇게 말해도 좋아 나와 나는 잘 벗겨지지 않아 설마 탈피가 쉽다고 말하는 거니? 맛과 향 어느 쪽으로든 끝까지 가야 한다면 뜨거운 쪽으로 가자 부서지는 곳으로 가자 잘 익은 비트 정점 다음에서 질러대는 소리 충분히 시끄럽구나 너는 그래그래 그렇게 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잘 구워졌다면 이제 뒤집어 볼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야 잘 빻아진 나를 헤집어 볼 시간이라는 뜻이지 이제 말해봐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니? ✽베이비론babylon의 노래 제목
고독은 골목과 같아서
검은 커튼을 사방으로 쳐놓고 당신은 너무 깜깜하지 멀거니 서 있던 가등街燈이 뭐라 뭐라 주억거렸다는 것을 알아 그 가녀린 불빛으로 어떻게 당신을 속속들이 누빌 수 있겠어 한결같이 당신에게는 골목이 많고 우리는 한결같이 어두웠어 계속해서 막아서는 양파껍질처럼 당신은 벗겨도 벗겨도 골목이라는 것 벗어날 수 없는 골목이라는 것 내 생을 골목의 한 때라고 말하지 않겠어 골목은 골목이어서 거기 있었고 당신이 골목이어서 나는 걸어 들어갔던 것 골목이어서 어둡고, 무겁고, 고요한 것 당신이 골목이므로 더 이상 당신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
순해지는 감정
시인 이홍섭은 터미널을 입구로 보았을까 출구로 보았을까 소음으로 들끓는 시커먼 그러다가 순간 아무도 없이 조용한 터미널은 내게 아가리 큰 입구였다 그들은 물었다 당신의 행방은 어떻게 묘연합니까 스카이라인 안쪽으로 검은 행방이 언뜻 보였으나 키를 줄이고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결국 나였어 행방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터미널은 오지 않는 버스만 있는 곳 밤새 싼 가방을 아침에 푸는 시치푸스로 반생을 살았다 말해야 한다 아가리 시커먼 시간이 터미널에 산다 살지 않는다
경비원 아버지
스무 살 아버지는 아직도 순찰 중이다 지직, 얼굴을 긋는 흑백티브이만이 부실한 그의 생업을 증거해준다 아버지의 골목은 검은 도화지처럼 어둡다 손전등으로 캄캄한 일과를 비출 수 없어 자꾸 미끄러진다 뒷문이 뚫리 는 줄도 모르고 앞문 향해 수없이 경례를 붙인다 순찰에서 돌아오지 않은 스무 살 아버지 아직 바깥에 있고 아무도 몰래 쑥쑥 자란 마흔의 나는 걸쇠 걸린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 거기 말없이 우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 지가 담겨 있다 톱밥 난로 위 김치찌개 졸아붙은 냄비 울음의 유전자를 끓이던 아버지들 우글거린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아버지가 먹어치우듯 나는 그를 조금 더 파먹어야한다 아버지만큼 아련한 밥은 없다 어두운 가계에 도달해야 비 로소 단단한 슬픔이 도굴된다 온몸 어둠이던 내게 그는 느닷없이 손전등을 비춰대곤 했다 소스라쳐 뛰쳐나간 나는 아버지보다 늙어 돌아왔다 그의 경례는 여전히 앞문을 향해 있다 추위가 덕지덕지 이겨 붙은 유리창을 걸 어 잠그고 돌아 나온다 아버지는 아직 바깥에 있다
호외號外
빨리 무언가 되고 싶었어 골방에서 혼자 태를 끊었다는 것은 불가촉천민이라는 뜻 태생부터 고독이 질서정연했다는 말 얼굴 없는 카드세션 우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나요? 누군가 호외를 외쳐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쌩쌩 달아나고 나는 뒤에서 후루룩 뿌려져요 한 번도 정면을 마주한 적 없는 나를 어떻게 알아보나요 누군가 내 목을 움켜쥐며 너는 호외야, 외쳐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우뚱 고개를 기울인 허공이 숨을 멈추며 팽팽해져요 나는 밖이야, 세로줄을 그으며 우수수 떨어지는 검은 활자들 캄캄한 바닥을 한 걸음씩 기어가고 있어요 보세요, 여기 어두운 저녁을 풀칠하는 부록, 별책 너울거리는 번외의 춤판! 누군가 너는 혼외야,를 외쳐요 달아나요
골목의 이유
그는 진정 후회하는 감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처음부터 절단된 골목을 집어 올렸던 거지? 기호에 따라 나눌 때 우리가 가진 건 고독의 일부 설움의 외부라고 해도 좋다 머리칼이 뜯겨져 나올 때마다 울음의 가치는 놀랄 만큼 증대된다 나는 왜 아직도 구태의연한 의자처럼 사랑을 말하는 거지 이렇게 계속 살아남아 파충류처럼 뒷다리 접는 자세를 연습한다면 어떤 경계도 펄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토가 새로울 것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생을 모두 건너야 가능한 일이다 아침은 날마다 새롭게 재편되었으나 저녁의 방향으로 어깨를 기울이는 골목은 등燈을 놓치고 빛을 놓친 빛을 놓치고 등을 놓친 가로등처럼 조용하다 나는 아직 골목에 있으며 우리가 굳이 소비한 감정은 치외법권의 일 , 여기를 벗어나려면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푸른 의자
뽀뿌린 치마는 아무렇게나 박힌 의자 못에 자주 찢겨나갔다 푸른 녹이 슨 의자를 깔고 앉아 종일 이루어지던 가내 수공업은 당겨쓰다,로 요약된다 눈이 짹, 찢어진 남자에게 엄마는 고개도 못 들고 다음 달 월급 좀 당겨주세요 했다 왜 올려주세요 하지 않고 당겨주세요 했을까? 당겨쓰다보면 늘어나지 않고 끊어졌다 키 작은 어린 손 닿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눈이 짹, 찢어진 남자 눈도 맞추지 못하고 다음 달 월급 좀 당겨주세요 그랬다 담장 너머 이팝꽃 서럽게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열하나 어린 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엄마의 빤스 고무줄 몇 번이나 당겨졌다 끊어져 뽀뿌린 치마 밑으로 흘러 내렸는지 이내 알지 못한다
언니의 사회학―무화과
밤마다 당신 꿈을 꾸어요 씨방을 건드리는 당신이 심어놓은 저녁이 깊숙이 박혀 자꾸 피어요! 피어나요! 나는 잘 피어나리라 힘겹게 밀어낸 이슬 이마를 닦아주며 혀 위에 올려주던 붉은해 당신의 깊은 신뢰에 몸이 달아 피지 못하는 꽃의 운명 알지 못해요 붉은 꽃술을 달고 새벽까지 걸어가요 추위가 닫아놓고 가버린 사라진 나는 돌멩이처럼 차가운 씨방을 더듬어보는 나는 언제쯤 피어날까요 언제쯤 태어나나요
재의 수요일
언니의 일부 검정 외투 비오는 날 언니는 사라지고 비처럼 사라지고 검은 밤은 미끄러운 얼굴로 돌아와 창문을 두드린다 잠깐 맺힌 물방울처럼 한 번 돌아오고 다시 오지 않은 언니 창문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거두어 간다 눈물은 세 방울의 묘약처럼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거야 비오는 날 오지 않은 언니 소거된 언니 물의 날 수요일이면 예배를 드려요 예배당은 회색빛 얼굴로 울어요 나는 바닥을 딛고 걷는 사람 한 번도 오지 않은 소식처럼 흔적 없이 오지 않았던 것처럼 자취 없이 언니가 사라지고 나는 한 발작도 그 물을 건너지 못해요 물의 층층 계단 발목이 쑤욱 빠져 너무 깊이 들어왔어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미끄러운 소리, 어두워지기 전의 하늘에 저렇게 많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니요! 수요일이면 물빛 검은 예배당에 가요
과월호를 읽다
도착해 보면 너무 늦었거나 나만 모르는 곳으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키 큰 정류장도 마지막 버스에 실려 가고 홀로 떠나간 버스 속에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발에 걸리는 무거운 그림자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가벼운 생각을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면 갑자기 들이닥치는 저녁의 얼굴 한꺼번에 몇 장씩 후루룩 뜯어지는 한 권의 당신 한 번 놓친 페이지는 영원히 놓친 페이지 말없이 떠난 버스는 영원히 계속 떠나는 버스다
물끄러미과科에 종속하여
어제 결혼한 남자는 삼십 년이나 늙어 있다 물끄러미는 미끄러운 물고기 같아서 삼백 년보다 더 깊은 시간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물끄러미과에 종속하여 어디로도 미끄러졌다 바다를 보는 법도 물끄러미 허공을 들여다보는 것도 물끄러미 물끄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물끄러미 우느라 물끄러미 지나가느라 피 흘리지 못하고 넘어지지 못하고 항명도 도주도 없이 물끄러미 미끄러운 물고기처럼 물끄러미 살았다 죽었다 옆자리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제 태어난 내가, 아들이, 아버지가 삼백 년이나 늙어 있다
루시앙은 내 이름
잠이 오지 않는 사이 머리칼이 길어져 고민이 헝클어지는 사이 아이들은 불만이 늘고 골목에서 울리는 적막은 그늘 쪽으로 꼬리를 늘인다 그 사이 나는 좁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당신을 향한, 세상을 향한 미움 따위 머리핀으로 꾹꾹 눌러 놓는다 내 이름은 루시앙 가릉거리는 고양이 이렇게 쉽게 저녁에 당도할 줄 몰랐어 눈을 감고 긴 꼬리를 핥는 동안 저수지에서 건진 얇은 노을이 엄지발을 간지른다 저지대에서 보낸 한 철 갸륵하다! 가고 오지 않는 사소한 골목들 먼저 자리를 펴고 누운 일찍 늙어버린 시의 머리칼 머리맡에 네 발로 이룩한 하루를 접어 두고 불면을 달래어 이불속으로 가는 사이 게으른 서어나무 너무 늙어 버린 당신이 허리를 뒤튼다 루시앙은 내 이름 가릉거리는 고양이 이렇게 쉽게 밤이 올 줄 몰랐다
국지성 소나기 온몸으로 맞는 법
혼자일 것 홑겹일 것 강박 따윈 두고 내리고 외곽이거나 나무다리와 굽은 길 흐린 배경 위에 서 있을 것 예고 없을것 가고 또 가는 사람을 예배할 것 하얗게 거짓말이 피어나는 붉은 입술에 자주 데었을 것 못다 한 말 많을 것 하지 못할 말 더 많을 것 너무 먼 곳을 응시하지 말 것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에도 없는 잘못에 무릎 꿇지 말 것 과오가 있다면 동의할 것 한 발 마중 나온 슬픔에 먼저 젖고 잊을 것 젖은 것도 잊은 것도 잊고 다시 처음부터 젖을 것 아무도 모르게 방류한 눈물 있다면 고개를 들 것 짧게 빗발치는 생각 따위 바닥에 부려놓을 것 젖은 머리 털 듯 남은 생각 흩뿌릴 것 이후로 점차 개일 것
아직,
이라는 그 말에 용기가 났다 용기는 운동장의 말 소각장 담벼락에 이미,를 세워두고 주먹 날리는 말 아직,이라는 당신의 말은 경기 다 끝나고도 전광판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말 초록에도 피가 돈다는 수혈의 말 아직,이라는 말은 정면의 말 몇 번의 질문이 더 남았다는 말 이미,의 형량을 감형한다는 말 다시는 거기로 가지 않아야 한다는 말 3할 4푼 5리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의 말 지금 달려도 된다는 말 눈을 감고 뛰라는 말 눈을 뜨면 거기 당신이 서 있으리라는 말
청계역
가투街鬪에 나가지 않은 날은 귀가 아팠다 귓속으로 돌멩이가 날아오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달려와 부딪쳤다 귀가 아파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져도 귀는 아플 것이다
잔혹에 바라다
체르니를 치던 손가락 하나씩 뭉개져 가는 동안 선실 바깥으로 수없이 까치발을 세우는 동안 운동장 끝까지 굴러 나오던 웃음소리가 무거운 덮개에 깔려 사그라지는 동안 팽목항 앞바다 동동거리던 잔걸음 용서하지 마세요. 볼륨을 높이던 울부짖음 듣지 못했습니다. 엔젤이너스 커피를 손에 쥐고 속보를 들었습니다. 우리 안에 천사가있다 믿었으니 벌하세요. 잠을 잤습니다. 밥을 먹었습니 다. 너는 없는데, 아이들은 자꾸 가라앉는데, 일어나 거울을 봤습니다. 기류를 알 수 없는 울음과, 아들아! 엄마가 미안해! 미안합니다. 뜨겁게 올라오는 목울대를 치세요. 시와 낙서와 돌멩이와 퇴진과 싸움과 캄캄하다는 것과 벽이라는 것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데 너무 많은 말을 낭비했습니다. 꽃다운 손목과 손톱, 발톱과 머리칼과 핏물 밴 민들레와, 얘들아! 교과서를 펴야지. 당신과 나 어디에 있는 문법을 뒤 적였습니까? 봄 가뭄이 극심하구나. 딸아! 가사실습실로 돌아와 줘! 실내화로 갈아 신던 복사빛 발목 어디에 두었니? 거꾸로 되감을 수 없는 성난 회오리와 펄럭이는 노란 리본, 그리운 복도 저만치 검붉은 피의 통로로 바뀌는 동안, 정강이가 다 닳도록 엎드려 울어도 부디 우리가 지은 죄 사하지 말아주세요 ✽마태오 27장 46절 예수 죽음의 시간 마지막 울부짖음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빗발, 파렴치
사선을 그으며 네가 내린다 고개를 기울이는 비 헛나간 발음처럼―그래, 너는 늘 헛나갔지 잘못 던져진 그릇처럼 귀청을 찢으며 내린다 직선을 비꼬며 난대성 저기압의 관계를 휘갈기며 가버린 시간을 꼿꼿이 버릴 줄 아는 너는 가열차다 흐릿하게 잘못 그려진 풍경을 벅벅 지울 줄 아는 비, 아파트 창문 바깥으로 한 척 배를 띄우고 긴 노를 하나 얹어 놓았다 오래된 생각이 슬슬 줄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는 이 나쁜 기후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빗발 들이치는 안쪽 꿋꿋하게 말라가던 일상이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다 비가 오는 날은 직선을 거역하며 비가 오는 날의 우주는 한 발 앞서 젖는 것이 타당하다 너를 흠뻑 뒤집어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창 없는 베란다 빗발은 도무지 파렴치하다 젖은 머리로 울고 서 있는 편백나무 아래 장화를 신은 어린 빗방울들이 첨벙거린다 길게 늘인 노를 타고 침범해 올라오는 수많은 네가 수없이 꼬리를 물고 나뒹군다
뜻깊은 인사
비는 생각에 잠긴 새처럼 발가락을 펴고 내린다 필요하지 않아 두 겹의 상상! 쉽게 불행과 친해지는 저녁에 대하여 미끄러지는 새, 구두, 흐르는 불빛 눈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믿을까 환하기만 한데 어둠을 숨기고 다리를 구부려 바닥으로 몰래 흐르는 너는 상심의 거처, 코스타리카 방울쥐의 생몰연대 허름해진 시간을 하나씩 흔드는 비와도 다르고 날아가는 새도 아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할 뿐 깃털을 털며 비는 비의 빛깔로 내려온다 불행이 온다면 안으로 들일 것이다 입김을 불면 너는 차오르겠지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나는 돌아선다 발가락을 펴고 조용히 보내보는 뜻 없는 인사 밖은 어두워지고 나도 어두워진다 거들먹거리던 그림자 둘
카프치노, 카프치노
당신은 처음부터 거품처럼 왔다 편향된 걸음으로 느리게 거품이 전부인 것처럼 왔다 30 데시벨을 넘기지 않은 실내악은 조건 없이 그렇게 무조건으로 왔다 당신은 왼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조용히 입술을 대는 취향을 가졌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따르기로 한다 주로 창 쪽에 앉으며 먼 곳을 응시하는 취향 오른 다리를 꼬는 취향과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취향 주로 오른 쪽의 취향을 가진 당신은 몇 개의 취향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는 당신의 모든 취향을 수합하기로 한다 서창으로 느리게 해가 지고 아래로 목을 감으며 떨어지는 실루엣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의 취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당신의 취향 우리는 오늘 취향의 나라에 왔다 당신이 키우는 취향의 전모 더는 부드러울 수 없는 취향 눈을 뜨고는 가질 수 없는 취향 그것은 사라지는 모든 속성을 가진 것이어서 만질 수 없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없는 것이어서 나는 당신의 모든 취향을 추종하기로 한다 취향을 따르는 취향 이것이 내가 가진 모든 취향의 당신이다
하릴없이 가을!
이렇게 하루가 가는 건 싫어 가야하는 분명한 것들이 가다니 고라니가 고라니를 떠나고 잠자리가 잠자리를 떠나고 하릴없이 동동 염소가 염소를 떠나는 그렇게 가을, 긴 그림자 질질 끌고 가다니 남아 있는 햇볕을 수레에 담아 마당 끝까지 가본다 수레보다 더 멀리 나와 발에 묻은 가을을 담아 보내면 부서지는 붉은 소리들 가야하는 분명한 것들이 가다니 소리의 비명 하릴없이 가을!
9시 45분
젖은 접시를 꽂아두기 좋은 시간 창문을 열다가 두 번 우연히 얼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새의 눈과 마주친다 그러면 알 수 없음의 9시 45분을 집시의 시간으로 바꾸어 보는 햇살이 환하게 일어나는 시간 9시 46분을 향해 양팔을 벌린 시간 뭔가 활짝 열렸다는 느낌은 들지만 대개 그때마다 닫히는 마음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 긴 나무 층계 끝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을때 창문의 시간이 복숭아처럼 붉어질 때 신발을 벗었는데 갑자기 발이 없어 놀라게 되는 나는 왜 아직도 9시 45분의 부엌에 서 있나요 없는 시간의 힘줄을 당기느라 들고 있던 당신을 왜 떨어뜨리나요 양팔을 벌리기에 너무 늦은 시간 무척 이른 시간 우리는 전생이잖아요 여기는 일요일이고요 가을이 되려면 얼마나 많이 뒤를 돌아봐야 하는지 눈을 감아야 해요 여기까지 따라온 9시 45분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오래된 신발을 찾아 더듬거리는 분홍 발목 일어서는 시간
은행나무 남자
한가람 영수학원 옆으로 파리바게트 그 앞에 머리를 긁는 사람 학원과 파리를 굵은 허리로 가리고 한가람 영수와 바게트 사이에 서서 머리를 긁는 것으로 프로그래밍된 지 한참이나 된 것같은 남자의 끈이 풀린 신발과 펄럭이는 외투는 꾸준히 긁적이는 오래된 손목을 숭고하게 받치고 있다 저렇게 머리를 긁으며 갸웃거리는 태도로 답을 뒤적이는 표정으로 한 생을 보낼 수도 있겠다 머리를 긁다가 문득 버스를 놓치고 구름을 놓치고 바다를 따고 들어가던 민박집과 호수를 경호하던 안개와 열매 실한 나무들이 발밑으로 떨어뜨리는 소문이나 주우며 갸웃거리며 그러면 놓친 것들은 때로 버린 것이 되기도 하는 유배가기 좋은 섬이 거기 있다 한가람 영수학원 옆으로 파리바게트 그 앞에 머리를 긁는 사람 한가람 영수와 바게트 사이 노랗게 센 남자의 머리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소리의 더께―영숙에게
우리는 청소시간처럼 떠들어 댔다 이마에 주름을 그려 넣은 아이들이 꺼내 오는 소음과 모래 먼지 날리는 운동장이 헐떡이며 와 멎는다 견고한 골대가 다시 서고 누군가 먼저 차올린 이야깃거리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 다닌다 양호실로 교무실로 이웃학교를 기웃거리는 이도 있다 빈 도시락 속 숟가락처럼 시끄러운 소리들 복도 끝까지 몰려갔다 오는 동안 길게 머리를 땋아 내렸던 네가 뒤를 돌아본다 3D 입체 TV처럼 올록볼록 꽃눈 올라오는 소리 시끄러워 나는 자라는 일을 멈춰 버렸다 낡은 걸상이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으니 네 상처도 더께가 앉았을 것이다 나는 일없이 자라는 머리를 잘라 아무 도 모르는 꽃밭에 심곤 했다 활짝 피어오르던 꿈은 오래 묵을수록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고 입체 TV는 더께가 앉은 소음을 눈앞에 휙 던져 놓는다 꽃밭에 심었던 머리가 피어날 리 없다 먼지 풀석이는 교실이 운동장을 한 바퀴 빙 도는 사이 우리 모두 거뜬히 늙는 중이다
잠정적 결론
드디어 엄마를 뚫고 나왔을 때 잘려진 뿌리 때문에 울었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생각하니 캄캄했던 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깥에 버려져 시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뿌리는 근절해야한다고 엄마는 믿었던 거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었구나 아가야 피가 나는 밑둥 때문에 나는 울었지만 잘린 뿌리가 아물지 않아 엄마도 아팠을 것이다 한 번씩 피어난 자리가 근질거렸을 때 근절된 뿌리 안쪽이 그리웠다 피다만 꽃잎을 달고 밑둥 잘린 것들은 떠다녔다 네 꼬리를 봐 피 흘리는 네 아래를 보라구 저마다 아물지 않은 울음을 웃음으로 감추고 그렇게 시든 얼굴을 하고 당신과 나 이렇게 피어 있는 거다
언니 A의 잠행
불빛 사라진 베란다를 빠져 나가요 길은 보이지 않아요 시계는 한 걸음씩 예정된 길을 가고 언니 A는 한 발씩 예정 없던 길을 가요 몇 개의 소리로 사각이는 밤의 틈입자 B는 허리춤에서 나온 사람, 사방무늬 벽지에서 꿈틀거리며 깨어났어요 그는 온 것이 아니고 꺼내온 것 언니 A는 눈꼬리를 올려요 발을 내려딛으며 어디든 좋아! 살금거리는 등 뒤로 불빛이 반짝 켜지는 줄도 모르고 단서가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문이나 열어두렴! 종적 없는 시간을 위하여 시든 야채 같은 얼굴로 사라진 잠을 들추어보는 피우다 만 담배 같은 얼굴로 남자 C가 살풋한 꿈의 손사래를 집어 올려요 서두가 맞지 않는 잠꼬대 부스럭거리던 머리채를 끌어당기면 헝클어진 긴 머리의 언니 A 핏발 붉게 선 선잠 너머로 암벽 타듯 느릿느릿 기어들어와요 까치발 세운 아침이 천년이나 늙은 언니를 젖가슴 다 늘어진 나를 부축해 들어서요
하릴없이 겨울!
하릴없이 한때 우리는 겨울이었어 분홍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도 겨울 꽃 핀 겨울 꽃잎 진 겨울에 황사 날리는 칼날같이 사나운 비가 지천에 날리는 날도 겨울 몸에 핀 열꽃을 하나씩 꺾어 옥상에 내어 말리던 홑겹의 겨울 소국이 필 때까지도 우리에겐 겨울이 길었지 이건 겨울도 아니야 지겨워 겨울! 지루하게 피어나는 겨울은 거울처럼 깨지기 좋은 계절 그릇보다 더 잘 깨지는 것은 관계라는 터부라네 바짝 날이 서서 위험한 구도로 쟁강쟁강 관계를 깨자 애인아 깨진 거울조각 얼음처럼 소리 날리는 겨울!
유리창
그는 내가 있는 세계를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보여주었다 주로 평면이었으며 검은 그림자를 부욱 찢어 칼금을 보여주기도 반짝이는 이마에서 꺼낸 생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루 두 페이지씩 읽으면 날이 저물었다 몽환적인 둥근 달을 좋아해 노란 색을 띤 그는 점점 마르고 차차 부푸는 속성을 지녔다 까만 씨처럼 몰락했을 때 내 온전한 배를 찢고 핏덩이를 쏟아내던 그것은 허구처럼 생생했으며 나는 주로 그 안에서 사육되었다 하지만 나를 먹여 키운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음을 안다 그의 차가운 심장을 문지를 때 나는 북아프리카 사막여우의 추위에 가 닿았다 별이 박힌 밤의 퀼트가 자주 내다 걸렸다 추위의 바깥 검은 장갑 낀 손이 클릭, 클릭할 때마다 생성되는 어둠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던 밤 나는 내가 다량의 위험한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깜깜한 먹지 같은 비린내를 풍기고 서 있다 손톱이 긴 아스팔트 위의 낙타처럼 그가 쳐놓은 장막을 찢으려 달려들고 총성처럼 고함을 치면 나는 곧 아홉과 열넷과 마흔 세 개로 분할된다 납작해진 아홉이 바퀴처럼 혀를 굴리며 말한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세계로 이동했어요 우리의 감각은 깨졌거든요 검은 색 물감을 눌러 짜놓은 허공은 총성 뒤에 따라오는 냄새로 붐비고 두 개 세 개 그리고 여섯 개의 내가 다시 열리고 닫힌다 한 번 깨진 창은 더 이상 깨지지 않는다
사과나무 풍경
사랑을 잃었어요 9월이 오기 전 그러니까 하늘이 높아지기 전 목감기처럼 아프다가 금세 추워졌어요 안녕이 있다면 조금씩 어딘가에 흘렸을 뿐이에요 골목에 떨어진 사금파리처럼 초록눈을 뜨고 9월을 지나가요 콘트라베이스를 치던 그의 긴 머리 손바닥을 치며 내게 붉어진 시간 이렇게 도망가다가는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 거에요 그림자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 담장에 남은 낙서처럼 남루해요 두 손에 들고 있던 엽서를 떨어뜨리며 나무는 아직 몇 개의 사과를 더 만들어요 누군가 긴 손가락을 들어 내 안의 구멍을 막으면 피리가 울어요 치마를 펄럭이며 창문을 타고 오는 붐비는 얼굴 하지만 사과나무는 안녕해요 슬픔이 있다면 조금씩 어딘가에 흘렸을 뿐이고요 나는 골목에 떨어진 얼굴처럼 오지 않는 9월을 지나가요
오래된 극장
다시 당신에게 가 봅니다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너무 깜깜한 당신 때문에 외로움을 물컹 만지고 말았어요 순해지는 감정이 순간 딱딱해지고 말았어요 허물어진 계단 앞에서 생각하니 내 생도 전반적으로 어두워요 고작 내가 가진 반경만 익숙해질 뿐 필름은 가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여주는데 나는 왜 비가 오지 않나요 고개를 드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앉아 있나요 당신이 잘 열리지 않으니 닫히지 않는 것 당연해요 어두운 실내에서는 왜 소리죽여 울어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구보다 출구가 더 많다면 빛이 더 잘 새어드는 것 , 한 번도 상영된 적 없으니 종영되지 않는 것 당연해요 사과 씨를 삼키면 사과가 열릴까 걱정하는 밤이 길어집니다 오래된 극장을 삼켰으니 오늘 밤 늙고 쓸쓸한 연애가 가득 매달릴 거예요
손가락 정원―편두통
머리 밑이 아파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요 송곳 같은 통증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 발을 거는 계속 고꾸라지는 이런, 미친! 닫힌 문을 두드리는 바람 이런, 죄의 뿌리 같기도 한 환한 것이 자꾸 손을 타고 올라와요 파란색 팔뚝을 베고 잠을 잔 일이 있어요 잠아, 나를 데리고 멀리 가 돌아오지 말아라 선잠 자는 아이가 자꾸 문을 나오고 닫힌 문을 두드리며 울음을 깨워요 손가락을 내주고 손을 걸고 빈손을 두드려 만든 손가락 정원에 풀이 무성해요 저녁 쪽으로 다리를 뻗는 침묵 이렇게 오래 서 있다가는 하얗게 바래고 말거에요 나무에 목을 매단 그림자의 시간이 깊어가요 너라는 정면은 못 본 것이 아니고 안 본 것 나라는 정면은 안 본 것이 아니고 못 본 것 머리에 박힌 못이 자꾸 손가락을 찍으며 올라와요
103 호텔 미러
비둘기 한 마리 호텔 창문 아래 앉았다 미러 호텔 거울 속의 한 마리 너와 거울 바깥의 한 마리 내가 수신호를 보내는 동안 두 세기가 그림자를 펴고 날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우리 두 마리의 저녁이 잠시 날개를 접어놓은 적 있다
샛길
귀에 박힌 검은 피어싱 신호를 잘못 읽은 전동차가 덜커덕거리는 소리로 엔진을 멈춘다 귀는 왜 달랑거리고 킥보드처럼 나는 왜 샛길로 미끄러지는 거니? 길에서 남자를 만나면 이제 집으로 가지 않을래 나와 관계된 외로움을 내가 왜 다 알아야 한다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멀리 있는 것은 나,라고 했다 꿈에서도 만난 적 없는 나,는 차마고도 울란바르트 호텔 미러를 찾아 헤매는 당신들의 통통한 시詩를 배고 싶어라 가도 가도 사방천지 길의 은유로 풍성해지는 혹은 분열되는 걸음에 대하여 샛길은 미끄러져야 제 맛,인 길 킥보드처럼 나는 맛있게 미끄러지는 중이다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지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에 당도하고 싶을 뿐이야 가도 가도 캄캄한 울음 속을 그 남자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결국 이 싸움의 패인은 울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는 증표는 아니야 어느 온순한 영화의 반전처럼 이 울음의 기차는 또다시 너라는 간이역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을 덮치게 될 것이므로
아직 오지 않은 밤
대설은 멀고 꽃은 피리라 나 없는 곳에서 여름이 멀었으므로 금요일이 아직 멀었으므로 금요일에 만든 약속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밤은 어제 지나간 밤 오늘 내게서 제일 멀리 있는 것은 나, 꽃물 든 분홍혓바닥 네가 얹어 놓은 향기로운 말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도 너는 내리지 않았다
그리운 자작나무
밤이 되면 미친 새들이 너를 물고 놓지 않았을 거야 적막의 밑바닥을 치는 바람 소리에 뿌리 하얗게 얼어버렸을지도 모르지 자작나무 숲으로 불어간 바람을 나는 안다 솜이불 한 채 장만해 시집가고 싶다 네 몸 끝으로 물기 마른 날들이 바람구멍 가득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잘 맞지 않는 서랍 속 깊이 넣어 둔 엽서 한 장 네게 보낸다 오랜 배회의 밤들을 나는 안다 소멸을 말하는 입 커다란 밤이 숲에 가득하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네 몸에서 잎맥만 남은 잎사귀 한 장 답장처럼 날아왔다 붉은 피를 찍어 이불 한 채 짓고 시베리아 평원 눈보라 속 어디쯤에 숨겨진 네 발자국 몇 개를 기억하는 밤이면 새들이 내 몸속을 날아다녔다 은빛 날개가 다 지워지도록 날아다녔다 네가 배회하던 숲의 발자국을 찍어 지워진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는 밤, 모든 밤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너에게 배운다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사실적인, 아주 사실적인 그리움이 저 멀리 산을 넘어간다 산은 저 몰래 그림자를 감추고 덩그런 집 한 채를 꼭 싸안고 있다 산이 외로우니 집 저도 외로울 터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당신도 아련히 아름다운가 가만히 만져보는 통증의 입자가 결 곱다 직립한 슬픔을 안다는 듯 꼿꼿이 선 그리움의 통증을 안다는 듯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풍경 속으로 슬픔의 입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핏물 배어난 어깨처럼 사실적인 너 무나 사실적인 통증이 새벽 두 시 오 분 바늘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사이 담장 아래 자전거 한 대가 묵묵히 시간을 굴린다 미처 오지 않은 시간의 발목이 거기 빠져있다
베란다
숨이 멈춘 베란다 너와 이별하고 바닥을 얻었다 나는 편협하고 납작하였다 낮게 흐르는 소음에도 귀를 베어 너는 화를 내지른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왜 태어난 것인지 우리가 사랑한 시간 며칠째 불타고 있는 숲 시간이 간혹 멈추었다 다시 흐른다 눈을 뜨면 다시 바닥이야 잠을 여러 번 뒤집어도 깨지 않는꿈 숲은 불타라 나는 깨지 마라 문을 밀고 나가면 다시 주름이 깊은 밤이다 유리는 왜 생성되었는지 너와 나는 왜 하나로 비추어지는지 베란다에는 주인 없는 빨래가 저 혼자 불타고 겨울 숨을 내쉬는 바닥이 길게 펼쳐져 있다 나는 깨져라! 너는 이별하고 바닥을 얻어라
그러므로
너무 많은 배고픔을 섭취하였으므로, 공복으로 들어찬 허기의 눈이 붉다 잉걸불 임계점을 지나면 어딘가에 날선 송곳니를 콱, 박아대고 늘어진 몸뚱어리 휘적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식사를 시작할 것이다 일차 공격 목표는 가장 가까이 있는, 그러므로 너 자신의 꽉 찬 허기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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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
유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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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독서
낭송시
15
혁명은 아직 당신을 합니까
17
부엌의 완성
19
부분적으로 흐림
21
아침은 어디서 오는가
22
미행
23
국경 너머의 잠
낭송시
24
잠 너머의 국경
25
유리창 밖의 일
27
밤의 거실
30
수레가 우는 밤
34
귓병
36
울음의 미사
39
새벽의 일
40
커피 볶는 시간
42
고독은 골목과 같아서
44
순해지는 감정
46
경비원 아버지
48
호외號外
49
골목의 이유
51
푸른 의자
53
언니의 사회학
54
재의 수요일
56
과월호를 읽다
58
물끄러미과科에 종속하여
60
루시앙은 내 이름
62
국지성 소나기 온몸으로 맞는 법
64
아직,
66
청계역
71
잔혹에 바라다
72
빗발, 파렴치
74
뜻깊은 인사
76
카프치노, 카프치노
78
하릴없이 가을!
80
9시 45분
82
은행나무 남자
84
소리의 더께
86
잠정적 결론
87
언니 A의 잠행
89
하릴없이 겨울!
91
유리창
낭송시
92
사과나무 풍경
95
오래된 극장
99
손가락 정원
101
103 호텔 미러
103
샛길
104
싸움의 기술
106
아직 오지 않은 밤
108
그리운 자작나무
110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111
베란다
112
그러므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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