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새벽 두 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강현국

한 자락 소낙비―세한도 1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으로부터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까지

  소낙비는 오래 참았던 눈물 같고 억지춘향의 한풀이같고 비 내리는 정거장엔 늘 온몸이 부실한 판잣집이 있고 비린내로부터 식욕을 잃고 비린내로부터 발끝까지 목마른 새벽이 범람하고 수평선은 아득하므로 체념은 치욕보다 팽팽하고 그러나 소낙비는 멎기 위해 쏟아지고 그러나 정거장엔 우산장수 곁에 신기료장수 부부가 있고 소낙비 한 자락 바늘귀에 뀌고 있고 낡은 구두 한짝 어제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오순도순 깁고 있고 비린내로부터 광활한 대지의 입덧은 시작되고

하얀 대낮―세한도 2

  모든 길이 새하얗다
  새하얀 길 따라 그리움이 새하얗고
  호프집 창 너머 예배당이 새하얗다

  칼도 도 없이
  바짝 마른 고요의 굴뚝으로부터
  풀, 풀, 풀, 흩어지는 오직 흰 구름

  빨간 구두를 신은 관념이 때때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문을 박차고 딸그닥 딸그닥 들어서는 수가 있다. 관념이 하얀 대낮에 생맥주 1000CC를 저 혼자 시켜놓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관념이 망치 들고 허공에 못질하는 소리, 관념이 제 이마로 寒山寺 쇠북을 들이받는 소리에 놀란 겨울 철새들이 우포늪을 우수수수 한꺼번에 들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 칼에 손다치고 경에 눈 찔려 모든 길이 새하얄 때, 오직이란 말이 흰 구름 타고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고 싶을 때가 그러하다.

누이와 기러기―세한도 3

  왼손이 오른손을 찾아와 꽃 피는 동안

  한 하늘 기러기 맨발자국이
  지붕까지 내려와서 기럭, 기럭, 하는 동안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가 꽃 지는 동안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베란다 흔들의자가
  해 뜨는 동쪽으로 기우뚱하는 동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를 어떻게 잡아먹지? 기러기란 기호 뒤의 죽은 누이를 어떻게 삶아먹지? 기러기란 기표의 외로운 초승달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가마솥에 삶아서 꼭꼭 씹어 먹지?

미주리 하늘 너머―세한도 4

倭館은
  대한민국 속의 일제시대 같다

  늦은 봄 어느 날이
  늦은 봄 어느 날의 招人鐘을 누르면

  대합실 앞에 문득 서 있는 그대
  일제시대 속의 대한민국 같다

  그대는 개차반 같은 세상 정장이 맞지 않아 늘 청바지에 티셔츠차림으로 보험도 들지 않는 낡은 봉고차에 beyond Missouri sky를 싣고 다닌다. 월 순수익 오천이 넘는 수상골프장 주인과 공치고 술 마시고 경치 좋은 산자락에 스포티지 대구27다4067을 버려두고 온 다음 날 해묵은 폐허도 오래된 권태도 아직은 내 것이라고 잘 있나 궁금해 하며 찾으러 가는 길에 보고 싶은 그대를 만나 맛있기로 인근에 소문난 왜관 역전 묻지 마 순대국밥 집에서 뻘뻘 땀 흘리며 그대하는 일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경제도 연애도 마침내 그대 인생마저도 공중에 매어달린 왜관철교처럼 대책 없이 녹슬어가고 있는 줄 내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나니 beyond Missouri Sky, beyond Missouri Sky

캄캄하게 꽃 진 자리―세한도 5

  아무도 없는 산마루는
  아무도 없어 기막힌 산마루였습니다

  캄캄하게 꽃이 진다 엽서를 쓰려다 말았습니다

  봉평에서 대화까지 소금을 뿌린 듯
  시냇물 끄트머리가 환한 달빛에 따끔거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없는 것의 무게로 숨 막히는 아파트로 선생은 총총 사라지셨다. 우리 시대의 큰 시인 大餘 김춘수 선생, 그는 내일 아침 일곱 시면 십 문 반 크기의 갈색 랜드로버를 신고 저 문을 나와 산보 길에 나설 것이었다. 이승의 둑길에서 저승의 천사를 만나고 돌아올 것이었다. “우두커니, 하루 종일, 혼자……이건 고문이야” 하시던 말씀이 목에 걸렸다. 눈물이 났다.

김광석을 듣다가―세한도 6

  태풍이 그의 일생을 신천 둔치에 버리고 떠났다
  1에서 9까지 입에서 항문까지 낙숫물 소리에 내 몸이 다 젖었다

  욕망의 꼴림도 그와 같아서 김광석을 듣다가 월요일은 월요일의 그리움으로라고 쓴다. 그리움이란 말의 아랫도리로부터 불끈 나무들의 그것들이 솟는다. 화요일은 화요일의 기다림이라고 쓴다. 기다림이란 말의 아랫도리로 부터 아랫도리로 졸졸졸 시냇물의 그것들이 흐른다. 때론 가슴도 저미겠지 외로움으로 일요일은 일요일의 외로움으로라고 썼다가 지운다. 꼴림의 욕망도 그와같아서 찔레꽃 하얀 흔적이 바람에 흔들리다 멎는다. 생명보험을 해약하기로 마음먹는다

레몬빛 허공―세한도 7

  마침내 허공은
  마침내 허공으로 가득하다

  나뭇잎 지고

  허공에 파묻혀 허공이신 내 아버지
  아직도 허공이네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우리 아버지배를 타고 한강수에 놀러 갔다 봄이 오면 오시겠지 봄이 와도 안 오신다 꽃이 피면 오시겠지 꽃이 펴도 안 오신다 여름 오면 오시겠지 여름 와도 안 오신다 가을 오면 오시겠지 가을 와도 안 오신다…내 손이 이렇게 쭈굴쭈굴 한 줄 몰랐구나, 마침내 백내장 수술을 마친 어머니는 해가 질 때까지 감나무 가지 끝 쭈굴쭈굴한 레몬빛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진밭골 입구―세한도 8

  자주 왼 무릎을 다치는 당신
  고요의 외동따님

  산길 끝에 각시붓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덤불숲을 빠져나온 길이 길 잃을까 두려워 얼굴이 새파랗다. 세발자전거 타고 철수가 영이를 만나러 가는 듯 세발자전거 타고 영이가 철수를 만나고 오는 듯 졸졸졸 도랑물 흐르고 도랑물 속으로 별똥별 지고 별똥별 지는 서쪽으로 나뭇잎만 우수수 날 저물자 길은 제 마음 들킬까 두려운 듯 점점 큰소리로 흐르는 도랑물 속으로 몸을 숨긴다. 흘러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서울 가신 우리 오빠 기다리고 있는 듯 각시붓꽃 한 송이 저 혼자 피어있다. 학교 종이 땡, 땡, 땡, 소리에 놀란 철수와 영이가 운동장 가장자리에 떨어뜨린 명찰 같다.

세모가 네모에게―세한도 9

  수면제가 삼켜버린 바다, 한 움큼
  수면제를 삼켜버린 바다

  누가 제 몸을 사루어 번제를 드리는지

  바다는 없고
  통곡소리 문득 멈춘 저녁노을 뿐,

  시론 강의라고 썼다가 세모가 네모에게 라고 고쳐 쓴다. 나는 오늘 보름달이 가리키는 우회하는 지름길을 따라가야 하니까. 저물기 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둥근상징의 식빵을 구워내야 하니까. 나, 곁에 우리, 라고 쓰려다 말고 철길, 뒤에 여인숙, 이라고 쓰려다 말고 모루위에 산마루를 올려놓는다. 나는 오늘 어차피 모서리를 두드려 수평선 문장을 다듬어야 하니까. 딱딱한 여백을 다독여 푸른 바다 흰 갈매기 불러내야 하니까. 저녁 노울 저 너머로 하얀 돛단배를 타고 가야하니까.

개미와 함께―세한도 10

  이 많은 탑들을 선생이 다 쌓았소? 내가 물었다
  탑은 쌓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라오. 그가 말했다

  개미 일행이 동쪽을 입에 물고 서쪽으로 가고 있다. 죽은 남근과 그의 혈족들은 생각보다 무겁다. 그는 오늘도 낮술에 젖어 일어설 줄 모르는 그림자와 그림자의 검은 망토 펄럭이며 거미가 바람에 마른다고 누가 말했더라, 권태의 피붙이가 바람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더듬이 더듬더듬 개미 일행을 따라간다. 자빠지고 처박힌 이마가 반듯한 한 사람의 일생, 사지가 멀쩡한 해바라기가 태양을 엎질러 캄캄한 바위 속이 개미들의 왕국이다. 미켈란젤로여, 내 몸을 두드려 나를 풀어라!

남으로 창을 넓게 내었다―세한도 11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남으로 창을 넓게 내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겨울나무 가지들이 쭉-쭉- 하늘 높이 뒷굽을 드는 동안 까치들이 깍, 깍, 깍, 운다. 어쩔까 하다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곁에 쉼표 세 개를 찍었다. 갓 구운 빵처럼 모락모락 김이 난다. 까치들이 한 짓이다. 남으로 창을 멀리 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올 것이었다. 어쩌다가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어차피 폭설이었다.

친구 생각―세한도 12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

  토종이란 말은 닥스 무늬의 씨암탉 같다. 원산지가 멕시코인 백일홍의 꽃말은 멀리 있는 친구 생각이다. 지구에서 짧은 인생을 끝내고 우리는 물 자체 또는 안개 같은 물의 모습으로 우주의 끝까지 날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에모토 마사루 씨는 당신이 물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물도 당신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한다. 멕시코, 멕시코, 토종이 아니어서 탐탁잖지만 나는 오늘 고요의 남쪽, 초록의 빈 터에 백일홍을 심었다. 멀리 있는 친구생각이 난다.

풀밭 위의 식사―세한도 13

  풀밭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다
  개미와 함께 꿀벌과 함께 바람과 구름과 함께
  식탁 위에 뚝, 뚝, 떨어지는 감꽃과 함께

  나는 이미 도착 했다. 타, 타, 타, 맨발로 걸어서 닝, 닝, 닝, 닝, 저 언덕을 넘어서 나는 이미 도착했다. 마른 대숲을 지나 훨훨 날아서 나는 이미 도착했다. 들고양이에게 오랑캐꽃에게 하늘로 원족가신 어머니에게 얼굴 감춘 돌멩이에게 틱낫한 스님에게 자두나무 꽃그늘에 나는 이미 도착했다. 대지 위를 걸을 때 그대의 발과 대지의 접촉에 집중하라. 지구에 입맞춤을 한다고 생각하라.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꽃이피어난다. 때때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라. 나무, 꽃, 뛰어노는 아이들......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뚝, 떨어지는 감꽃에게, 날벼랑 거울앞에 나는 이미 도착했다.

너풀너풀―세한도 14

  오늘은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너풀너풀

  아랫마을 잔칫집에 갔다가 신발 바꿔 신고 저물게 돌아오는 옆집 아저씨 두루마기 자락처럼 너풀너풀은 너부러진 세월 같고 시간의 숨소리 같고 세월은 막걸리 같고 오래 취하는 동동주 같고 푹 퍼진 아줌마 엉덩이 같고 시간은 코냑이나 위스키 같고 토라진 열아홉 뜯어고친 입술 같고 세월은 시간의 숙주 같고 파 먹히는 어미같고 시간은 세월의 서자 같고 집 나간 아이 같고 세월은 저만치 피어 있는 현호색 같고 시간은 당신이 심어놓은 매발톱 같고 김해경은 세월 같고 이상은 시간 같고,오늘은 하루 종일 어제의 시간 같고, 오늘은 너풀너풀 내일의 세월 같고

저급한 희망―세한도 15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독 오른
  뱀 대가리 스스로 꼿꼿하다

  알레고리는 세계 이해의 저급한 단계이다. 《시와 반시》의 출발은 작고 소박한 희망에서부터 비롯된다. 서울이 아닌 이 지역에도 제대로 된 시 전문 잡지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작고 소박한 그러나 분명한우리들의 희망 속에는 적지 않은 갈증과 허기의 시간들이 퇴적되어 있다. 알레고리는 오발이 잦은 구식무기이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이 삶의 중심이며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의 한 가운데임을 확신하는 자존과 오만이 참된 시인의 요건일 때 갈증과 허기는 고독한 그들만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저급한 시인들의 애첩이거나 한물간 시인들의 노리개이다. 척박한 땅에 씨뿌리는 이 순간의 오기와 고독이 풍화되는 그 날을 기다리겠다.히말라야 산중에 28년 동안 왼팔을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한 요기의 손가락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릴때까지 아무도 제 손가락 불지지지 않았다.

옛 생각―세한도 16

  싸락눈 내리다
  구름이 엎지른 기별 댑싸리비로 쓸어내다

  그해 여름 우리는 선운사에 있었다. 나는 지금 선운사 달빛에 묶인다. 계곡 물소리에 시린 별들의 머리칼이 돋는다. 나는 지금 대책 없이 솟구치던 그대 슬픔 속에 꽁꽁 묶인다. 남도 소리도 끝나고 황소개구리가 컹컹 울었다. 쓰러진 술병처럼 문학도 인생도 시들해지고 보름달이 컹, 컹, 컹, 한여름 밤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며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주섬주섬 윤심덕을 추스를 때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무겁게 덮치던 그대 눈물, 그것은 느닷없는 해일이었다. 휘영청 달빛이 잃어버린 시간 아득한 거기 현해탄 푸른 물을 엎질렀던 것,

K시인에게―세한도 17

  더러워서! 먹었던 마늘을 죄다 토해놓고 도로 곰이 된 그대가 그대의 육신을 뜯어먹는 칠흑의 갈피들이 하 투명할 때, 진주라 천리 길이 훤히 보일 때

  망자를 새들에게 보내는 그 순간은 참혹하고 황량하며 쓸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죽음인들 쓸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티벳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순례이며, 머물지않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현재의 시간은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이며, 바람에게로, 새에게로 뿌려지는 天葬은 바로 영혼이 영원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문이 됩니다.(박하선)

L시인―세한도 18

  햇빛은 이미 봄이니,
  봄은 또 이 지상에 셀 수 없는 연둣빛 눈을 매달 것이니,

  지금 선생님께서는 흰눈 안에 머물고 계시겠네요. 그눈이 올해 내린 첫눈인지 궁금해요. 늦게 자료 보내드려 죄송해요. 나름대로 챙겨보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제가 사는 일산에도 곧 첫눈이 내리겠지요. 오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눈 소식을 듣고 나니 새삼 눈이 기다려져요. 눈이 오면 저도 눈 소식을 선생님께 전할게요. 건강하세요. 2001. 12. 4

김훈을 베끼다―세한도 19

  장롱 속, 깊이, 잠자던 아주 오래 된 그 때 그 피난 간 아버지 땀 묻은 티셔츠 왼쪽 겨드랑이에 숨겨놓은 부적의 붉은 일획처럼

  비루먹은 말이 마구간에서 뛰쳐나와 병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세상을 향해 길게 울었으며 그림 속의 별들이 세상으로 튀어나와 하늘에 박혔다고도 했다. 소가 사람의 말을 지껄여대서 부려먹을 수가 없게 되었고, 공알에 혀가 돋아서 여자들이 음문으로 말을 했으며, 수꿩이 암말 엉덩이에 붙어서 교미를 했는데, 암말이 사람을 닮은 핏덩이를 유산했다고도 했다.(김훈, 《현의 노래》, 44쪽)

벽돌과 저녁노을―세한도 20

  저녁노을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

  보면 당신 생각난다. 당신의 일생은 빗소리에 눌려 납작하다. 바람에 쫓겨 추풍령을 기어오르는 철길처럼 납작하다. 납작한 철길은 땅 끝에서 끝나고 납작한 철길은 구병산 너머 흰 구름 저쪽까지 달려가지 못하고 납작한 철길은 숨이 차서 아득한 수평선을 건너가지 못하고 되돌아온 메아리 새파란 입술처럼 저녁노을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허공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 보면 당신 생각난다.······??

어떤 유리병은‘퍽’하며 깨어진다―세한도 21

  느티나무 가지 끝을 기어 나온 딱정벌레가 딱딱한 초승달을 갉아먹는 소리 크고 환하게
  쓸쓸함의 아래턱이 부슬부슬 한겨울 쪽으로 무너지는 소리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환하게

  어떤 유리병은‘퍽’하며 깨어진다. 깨어진 유리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이다. 어떤 유리병은 깨어질 때‘퍽’하는 소리를 낸다. 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달빛 소리이다. 어떤 유리병은‘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그것은 가슴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머나 먼 모래밭, 언어의 자궁에 대한 그리움의 둔탁한 주먹이 퍽! 어떤 유리병을 깨뜨렸던것.

빗방울처럼―세한도 22

  새털구름 위를 달리던 세 발 자전거
  신발 벗어 거기 두고 맨발로 뛰어내리는 바퀴들처럼

  하늘에서 빗방울 떨어진다. 빗방울은 민들레 씨앗처럼 지붕 위를 떠돌며 안착할 지점을 찾아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를 거듭한다. 발바닥으로부터 자전거 바퀴가 내려지고 천의 빗방울들이 활기차게 대지로 낙하한다. 광장이란 빗방울이 서식하는 구석의 딴이름이니 즐거운 비행의 펄럭이는 흔적이 무지개이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너울너울―세한도 23

  봄비 자욱하게 지나가셨네
  저 죽은 나뭇가지 끝 일요일 축축하게 젖었네

  축축한 산안개 내려오시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너울너울 생전의 내 어머니 무명치마 내려오시네. 내 어머니 근심 걱정 앞산 절벽 덮으시네. 아랫배 불룩한 치마바위 덮으시네. 자욱한 봄비소리 자욱하게 덮으시네. 울울하던 머리털 보이지 않네. 머리털 다 빠진 시간의 골짜기 오소리가 훔쳐가네. 딱정벌레 발가락 꼼지락 꼼지락 겨드랑이 나사못 돌리고 있네. 예배당 종소리 발밑까지 내려오시네. 내 어머니 무명치마 내려오시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해서 해종일 상추를 심고 고추를 심었네. 옥수수를 심고 호박을 심었네. 축축한 일요일 해바라기 필 때까지, 이글이글 저 태양 꽃필 때까지 감자를 심고 고구마를 심었네.

빗속을 둘이서―세한도 24

  이런날정말싫타!
  앞으로이런날잦을텐데...깜깜하다!

  “산채는 더러 있나 본데 여기 사람은 순전히 먹지 아니하니 괴이한 풍속입니다. 고사리 소로장이 두릅은 있기에 간혹 얻어먹습니다. 도무지 저자[市]와 장場이 없사오니 평범한 것도 매매가 없어서 있어도 몰라서 얻어먹기 어렵습니다.”(추사 김정희) 그대가 뜬금없이 보내온 깜깜하다는 깜깜해서 깜깜하다. 너의 맘 깊은 곳에 하고싶은 말 있으면 고개 들어 나를 보고 살며시 얘기하라고 노래하던 추사와 이름이 비슷한 김정호는 왜 빨리 죽었을까? 이 빗속은 언제나 깜깜해서 깜깜하다!는 내 십팔번이다.

나를 훔친 도둑―세한도 25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꽃 한 송이가 더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냇물 전체가 술렁대는 것이다.(바슐라르)

  텃밭을 일구어 옥수수를 심었다. 바람의 가장자리로부터 추녀 끝이 술렁대었다.
  세월을 훔쳐 온 오랑캐꽃이 초록의 빈 터에 고요의 남쪽을 들여놓았다. 오래된 약속이었다.

  경찰이 도둑을 쫓아가면 도둑은 달아난다. 그러면 경찰은 거꾸로 도둑의 발자국을 따라 그의 소굴로, 도둑이 처음 나온 곳으로 찾아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나온 길을 거꾸로 추적하여 소굴로 찾아가라. 이 소굴이 근원이다. 이곳이 그대에게서 이 모든 세월을 훔쳐온 모든 도둑들의 근원이다. 그대가 그곳으로 들어가면, 도둑들은 모두 떠날 것이다.(슈리 푼자)

어느 봄날―세한도 26

  구름을 쟁기질하는 너에게서는 늘 낙엽 타는 냄새가난다.

  갈매기 식당은 그곳에 없다. 내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된장이나 김치처럼 기다림은 항체가 없어 면역도 되지않고 유행을 타지도 않고 시간의 침식을 받지도 않는 듯하다. 갈매기 식당은 충무시 동호동 눈 내리는 선창가에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떠나는 뒷모습은 멎을듯한 마음의 흔적이며 누구에게나 기다림은 너무 오랜 기다림이다. 도다리 쑥국으로 이름난 그 식당은 한려수도 어디에도 없다. 나는 지금 첫사랑의 무덤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검은 외투의 실루엣, 주술 깃든 여인의 젖은눈을 보고 있다. 소복한 주모의 갈매기 식당은 구름 속이나 괭이갈매기 울음 속에 있으리라는 게 내 판단이다.

R을 위한 모자이크―세한도 27

  누군가 마당 건너고 창문 건너와 먼지 가득한 책장 밑까지 달빛으로 넘실댑니다(류시원, <바다로 가는 먼길1> 부분)

  아득한 곳으로부터 넘실대는 달빛은 아득한 곳으로부터 구만리 장천이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거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松柏]가 뒤늦게 시든다[後凋]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유홍준《, 완당평전 1》, 학고재, 395쪽)

이 세상 저자―세한도 28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

  “나의 시작(출생),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나의 누나에 대한 기억을 회상해 본다”, “내가 세례를 받았던 폴란드 바도비체 교구…이웃들과 친구들,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에 갈 때부터 내가 노동자로 일하고 이후에 카라코프 교구에서 일할 때까지 사귀었던 친구들…”

  지진 멎고 깽깽이 피었다. 2005년 4월 그날, 추기경 한분이 찾아와 젖은 손수건을 두고 가셨다. 젖은 기억은 당신의 耳順한 맨발일 터; 딱따구리가 천상의 악기를 다듬는 마른 가지 저 너머 일렁이는 잔물결; 이 세상 저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침묵 한 그루―세한도 29

  침묵 한 그루
  봄과 겨울 사이 天 · 地 · 玄 · 黃 사이
  군살 하나 없는 뜬구름 같이

  침묵의허리는곱고가늘다침묵이내려놓은그림자는삭탈관직당한선비의그것보다차겁다침묵의머리칼에는석양의햇볕냄새가묻어있다그겨울이지나봄은가고또봄은가고빈집에오래침묵이켜놓은호롱불언저리싸락눈내리는소리사시사철들린다철새무리들이가만히날개를펴고우주의리듬에몸을맡긴채히말라야산맥을넘을때취하는비행법,瀞飛;

  한때 나는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이라 쓴 적 있다

너무나 좋은 혼자―세한도 30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사마귀는 저렇게 꿰맨 자국없이 저렇게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신발도 엇이 후회도 자책도없이 메뚜기는 저렇게
  삶이란 무릇 간절함뿐이므로, 간절한 울음이란 맨몸이므로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어떤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입에서 새가 되어 날아가고
  어떤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생으로 스민다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세한도 31

  하늘 높고 바다 깊다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테레사 할머니가 보인다. 빈민가 골목길에 세워둔 조그만 게시판이 보인다. 굽은 등과 주름 잡힌 손으로 할머니는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믿음, 믿음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섬김, 섬김의 열매는 평화”라고 당신의 생각을 가만가만 적고 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쓸쓸함을 말할 때,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강물 풀리고 무덤이 되지 않는, 쓰러질 때 받쳐주는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더없이 고요하고 마침내 평화롭다.

오규원 선생께―세한도 32

  화전민이 일군 허공 아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는 없다
  허공이 일군 자귀나무 어깨 위에
  흰 구름 고봉밥 뭉개 뭉개 피어있다

  있다와 없다 사이 허공 위와 허공 아래 사이
  무심하게 끼어 있는 2005. 9. 10. 토요일. 적막.

  기록이란 말은 요도에 박힌 결석처럼 아프다. 기록이란 말은 영구불변하는 금강석 같다. 기록이란 소멸의 항체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생의 의지이다. 그러나 기록에 대한 기록한 사람의 지분은 아주 적다. 금강석은 단단해서 시간을 비끼고, 그 빛은 찬란해서 천지를 비추나 한시절의 주인은 이미 그곳에 없다.

하늘까지 70리―세한도 33

  새벽 두 시에 마시는 커피
  새벽 두 시와 함께 마시는 커피
  감나무가 내려놓은 달빛 아래 마시는 커피
  감나무가 내려놓은 달빛과 함께 마시는 커피

  후시딘연고 상처 난데 바르는 후시딘연고 생전의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후시딘연고 상처 난데 바르는 후시딘연고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하면 화령장터 백광약국에 가서 후시디하나 사오너라! 하시던 후시딘연고 바르면 상처가 잘 아무는 후시딘연고 서랍 속에 잠자는 후시딘연고 바르면 상처가 잘 아무는 후시딘연고 어머니가두고 가신 후시딘연고 가을 하늘 하 푸르러 흠 없이 깨끗하니 이제는 쓸 데 없는 후시딘연고 상처 난데 바르는 후시딘연고 바르면 상처가 잘 아무는 후시딘연고 새벽 두 시에게 발라주고 싶은 후시딘연고 달빛에게 발라주고 싶은 후시딘연고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어디냐? 후시디 하나 사오너라! 하시…

저만치서―세한도 34

  아저씨, 대학교 교장 선생님 되셨지요!

  산꿩 푸드덕, 푸드덕 산꿩, 玄玄玄 저 하늘 저 물결

  대학교 교장 선생님! 눈이 까만 어린 아이가 저만치서 내게 건네준 이 말은 눈이 까맣게 살아 있었다. 기표와 기의가, 입과 항문이 미끄러지지 않아서 갓 익혀낸 쑥갓처럼 향기로웠다. 玄玄玄玄 저 하늘 저 물결 둥실둥실꽃 피겠다. 저만치서

한 세상이 떠나고―세한도 35

  신발장에 신발 올려놓듯 그렇게,
  2006년 3월 25일 신천 둔치에 개나리 만발해서
  대문 잠그고 소풍가는 아이같이 그렇게,

  머리가 아파서 오늘 나는 텅 빈 시간 속을 혼자 걸었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살아 있던 날들의 하늘과 살아있던 날들의 햇살과 살아 있던 날들의 빗소리를 데리고 아마도 한 생명이 거기 묻혀 있으리라. 돌무덤가 생명을 내려놓은 들풀들이 햇볕 속에 황폐했다. 봄이 오면 넝쿨 장미를 심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내려놓은 풍경―세한도 36

  바위 밑에 멈춰 있던 이끼 낀 시간이 우루루
  물소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 따뜻했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계곡의 아침 세월속에 묻었다
  한 컵의 바람에도 내 삶은 텅, 텅, 깡통처럼 울렸다

  그 시절 동무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지금은 안부조차 모릅니다. 나는 게까지 가지 않고 걸상처럼 생긴 어느 나무토막에 가 앉아서 물속으로도 황혼이 오나 안오나 들여다보고 앉았었습니다. 잎새도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꾸로 물속에 가 비쳤습니다. 물은 그런 틈사구니로 잘 빠져서 흐르나 봅니다. 그 내려놓은 풍경을 만져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람 없는 저녁입니다.(이상, <슬픈 이야기>)

끝말 이어가기―세한도 37

  감나무 잎 진 자리 텅! 비었다

  떼떼기 방아깨비 호박여치 사마귀 어디로 갔나

  제 주검 입에 물고 어디로 갔나

  기억의 곳간이 텅! 텅! 비었다

  비어 있는 텅! 텅! 이 기억의 곳간을 낳고, 기억의 곳간이 제 주검 입에 물고 어디로 갔나를 낳고, 어디로 가고 없는 어디로가 떼떼기 방아깨비 호박여치 사마귀를 낳고, 떼떼기 방아깨비 호박여치 사마귀가 갉아먹어 비어있는 텅! 이 감나무 잎 진 자리를 텅! 텅! 낳고, 잎 진 자리에서 돋아나는 검은 풍경의 나무 가지 끝으로부터 텅!텅! 솟구치는 저 보름달

어제는 슬픔이 하나―세한도 38

  하늘이 하 높고 푸르러
  그 마을 物物은 耳順하다

  어쩔 수 없이,

  노을 속을 파고드는 기러기처럼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어제는 슬픔이 하나/한려수도 저 멀리 물살을 따라/남태평양 쪽으로 가버렸다./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내 살속을 파고든다./내 살 속은 너무 어두워/내 눈은 슬픔을보지 못한다./내일은 부용꽃 피는/우리 어느 둑길에서만나리/슬픔이여,(김춘수, <슬픔이 하나>)

도망치는 문장처럼―세한도 39

  대전이란 말은 납작하다
  대전이란 말만 들으면 나는 납작해진다

  납작한 아침 햇살 납작한 저 구름 납작한 넙치처럼
  쓰다만 편지 도망치는 문장처럼

  태양과 햇빛을… 더 나은 표현이 없어서 나는 노란색,연한 유황 빛 노란색, 연한 레몬색, 황금색이라고 부를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는 고흐는 노랗다. 나는 새장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오! 신이시여, 다른 새들처럼 나에게도 새가 될 자유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고흐는 새까맣다. 잘 익은 해바라기 얼굴은 도망치다 멈춘 문장처럼 둥글납작하다.

낱말에 파먹히다―세한도 40

  여생이란 낱말의 낯선 잠수함, 여생이란 낱말의 흐린 모닥불, 빈들에서 날 부르는 쓸쓸한 저녁연기, 여생이란 낱말의 한 뼘 양지 녘, 붐비는 첫눈도 차마 범하지 못하는 수성못 여생의 벤치로부터 진눈개비 잦은 벤치의 여생으로 유유자적 미끄러지는 물오리 떼 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유유자적 제 집 찾아가는 산 그림자 본다. 이 밤도 깊었으니 나도 이제 유유자적 건널목을 건너야 하리. 여생의 아랫목으로부터 아랫목의 여생까지 시린 맨발묻어야 하리.

  떨어져나간 팔다리의 기억이 우산을 쓰고
  8시 정각에 지하철을 타러간다. 오늘은 월요일

어이없이―세한도 41

  겨울바람이 이유도 없이 내 모자를 벗겼다. 이유도 없이가 한 짓이다. 아버지의 일생과 맞바꾼 모자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뻘밭이 막무가내로 내신발을 삼켰다. 막무가내가 한 짓이다. 어머니의 기도와맞바꾼 신발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든유곽이 느닷없이 내 속옷을 벗겼다. 느닷없이가 한 짓이다. 먼저 간 누이의 영혼을 팔아 산 속옷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바닥으로부터 머리끝까지 바람과 뻘밭과 유곽의 해일이 쳐들어 왔다. 도둑의 행방이 묘연하다. 깻단을 털 듯 누가 물푸레로 내 몸을 두드렸다. 물푸레가 한 짓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소금 기둥으로부터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문자들이 이 빠진 전갈처럼 새까맣게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의 소행이다.

  해는 지고, 그 마을
  이목구비 문드러졌으니!

구름 산사태―세한도 42

  내가 수년 전부터 연작으로 쓰고 있는 세한도 마흔 두번째가 빠져 있다. 파일을 정리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41과 43은 오래 전에 발표해버렸고 최근에 쉰 세 번째 세한도를 잡지에 보내놓은 상태이고 보니 번호를 조정해서 빠진 자리를 메우기도 난감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아마도 번호를 건너뛰었거나 초고를 망실했을 것이다. 흔히 그럴 수도 있지 뭐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내겐 큰일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큰일이 되는 구름 산사태에 만리장성 무너지는 저간 체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이가 빠진 느낌이다. 세한도 41은 그러나가 소재이고 세한도 43은 한적한이 주제이다. 고민 끝에 나는 이 빠진 그 자리에 후박나무 한 그루를 임플란트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이가 빠진 그때 그 자리는 캄캄한 뻘밭에 처박힌 배처럼 오라! 곤궁의 사막이었으니 큰 나무 그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가 뿌리 깊이 위리안치 되었다
  한적한이 가지 끝에 위리안치 되었다

오규원―세한도 43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날이미지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샬롬!

아들을 위한 각서―세한도 44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이따금 우르르거리는 쥐떼들과 함께 2008년 3월7일 모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공과 공허는 다 같이 이름씨이다. 뼈다귀감자탕과 보쌈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허공은 자연이고 공허는 인위이다. 소주와 맥주를 따로따로 마시다가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셨다. 그대는 착해서 마시기 싫은 술을 내 식으로 벌컥벌컥 목마른듯 마셔주었다. 잘 취해서 허공은 허공으로 발효하고 공허는 공허로 미끄러졌다. 허공과 공허는 비슷한 말이지만 섞이지 않는다. 허공하다는 말이 안 되고 공허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천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쥐들이 우르르 우르르 소나기를 신고 뛰어다녔다. 공허가 한 짓이다. 허공을 떠다니는 남도의 꽃소식이 내 두개골을 열었나 보다. 새벽녘엔 쥐떼들이 아이젠을 신고 우르르 우르르륵 내 머리 속을 뛰어다녔다.

  공허,
  그것은 더럽혀진 허공이리라

버려짐의 태초―세한도 45

  태초에 버려진 개들이 있었다, 버려짐의 태초, 버려짐의 아르케, 성경에 기록된 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와 같이 태초로 번역된 아르케, 싸이프르스 그늘 아래 널브러져 파르테논 신전의 풍경을 완성하는 버려진 개들의 태초, 버려짐의 아르케! 꿈결 같은 에게해를 지나며 꿈에서 깨어나니 나는 어느 소설의 일절처럼 한 마리 벌레로 버려져 있었다. 흉측하고 끔찍했다.

  잔잔한 바다와 숨 막힐 듯 푸른 하늘과 낮고 붉은 지붕들이 할례 받은 햇볕, 할례 받은 말씀 아래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천만년 고요 속에 나를 묻었다

선창가 안개에게―세한도 46

  에게해는 하늘을 닮았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합니다. 하늘이 푸르면 에게해도 푸르고 흐리면 흐리고 검으면 검고 하늘이 붉으면 에게해도 그 빛깔이 붉어진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하늘 마음먹기에 따라 에게 해도 마음먹나 봅니다. 우리 일행의 그리스 안내자는 선교사인 남편을 도와 집시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내 사랑 집시》를 출간하기도 한 희랍어에 능통한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의 성은 손씨이고 양자로 들인 집시의 성은 발씨라 했습니다. 손발이 잘 맞아 행복하게 지낸다며 웃었습니다. 선창가 안개여, 자욱한 섬이여, 되돌아보면 당신과 나도 손발이 잘 맞은 삶의 한때가 있었겠지요. 그것이 비록 엊그제라 하더라도 한때; 그때 그곳은 늘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수평선 저 너머 흰 구름 선반 위에 있을 터입니다.

  밀밭 위를 걸어가는 바람의 맨발처럼
  멀리 아주 멀리 날 버리고 떠나간 내 마음처럼

섬뜩한 파수꾼―세한도 47

  고구마를 심으려다 호박을 심었습니다. 산짐승 중에서도 특히 멧돼지가 고구마를 너무 좋아해서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아나지 않으면 큰일이지 그것이 비록 돈과는 관계없는 내 심심파적의 작물이라 하더라도 멧돼지가 파헤치고 물어뜯어 난장판이 되어버린 고구마 밭은 생각만 해도 억장 무너지지 망연자실 하겠지” 쑥의 뿌리는 너무 질기고 깊이 박혀서 근절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렁이가 먼저 죽으니 농약을 뿌릴 수도없는 일이지만 제 아무리 맹독성의 제초제를 뿌린다 해도 며칠 있다 되돌아보면 나 아직 이렇게 멀쩡해 하며 새파랗게 손사래를 치는 쑥과 한나절 씨름을 하고 겨우 한 이랑을 만들어 거름을 주고 비닐을 덮씌우고 십여 포기호박을 심었습니다. 호박 넝쿨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잘만 가꾸면 개망초 토끼풀은 물론 쑥까지 해치울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난코브라처럼 번쩍 쳐든 고개를 대문 밖까지 내밀어 오래비워 둔 옛집을 저 혼자 지키는 섬뜩한 파수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쭉쭉 뻗어 가는 호박넝쿨에
  지친 내 몸을 맡겨보는 것이다

편지―세한도 48

  샬롬,
  한때는 신부되기를 꿈꾸었던 적도 있었던 저에게 언제부터 인지 경원시 되었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언어로 인사하면서 마음 평안함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선생님과 통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선생님 마음의 평안함을 전달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시와 반시》 지난 봄호의 <혼자 가는 먼길> 마지막 회는 너무도 처절한 외로움의 고백이었습니다. 꼭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들판에서 하염없는 비를 맞고 있다면 나 역시 그런 처절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 찢어진 우산이라도 잠시 머리 위에 드리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누군가가 아니었습니다. 어설픈 우산으로는, 혼자 가는 먼 길에 어지러운 발자국만 보탤 것 아닌가하는 우려로 그저 세월에 맡겼나 봅니다. 이제 그 내리는 비를 그대로 다 맞아내신 선생님과, 새롭게 다가온 선생님의 시에 축복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외로움이야말로 시인의 일용할 양식 아니겠습니까, 사실 선생님께서 그간 광장에서, 난무하는 광장의 언어 속에서 외로울 틈 없이 사셨고...며칠 전 새벽꿈에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별다른 내용도 없는 꿈으로 그저 저에게 평소처럼 인사를 하셨습니다. 한시인, 얼굴 보기 왜 이래 힘들어...꿈꾸기 전날 다시 읽어본 <혼자 가는 먼 길>의 여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게 새벽꿈은 생활과 관련된 예시몽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날 한번 뵙겠습니다.
  샬롬,//울산에서/○○○드림

  그저 누군가는 세상에 없지
  우리 사는 광장이란 쩔쩔매는 광야여서
  제 살 파고드는 비를 맞고 있으니 하 · 염 · 없 · 이

우주의 떠돌이―세한도 49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 그렇게 말하지만; 지구는 당신을 위해 공전하지 않는다. 바다는 당신을 위해 밀려오고 밀려가지 않는다. 새는 당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해는 당신을 위해 뜨고 지지 않는다. 별은 당신을위해 반작이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경이로운 경험은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변을 잘 돌아보라. 그무엇도 당신 없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지구는 지구를 위해 공전하고 바다는 바다를 위해 밀려오고 밀려 가고 새는 새를 위해 노래하고 해는 해를 위해 뜨고 지고 별은 별을 위해 반짝인다. 지금까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든, 이제 당신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안다.《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은 우주의 떠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함께하기를!

  심심함이 심심함의 새끼를 아홉 마리 낳은 그날
  심심함이 제 새끼를 뜯어먹고 심심함을 낳은 그날
  오이를 심고 호박을 심은 그날

그럼에도 불구하고―세한도 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새는 봄날을 노래 부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 핀 감꽃 저 혼자 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깊어 눈곱만한 메뚜기 알에서 깨어날 때 눈썹 같은 메뚜기 가랑비에 젖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널 때질기기도 해라 저 달은 왜 새벽 두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새벽 두시와 함께 마시던 커피 잔을 데리고, 커피 잔에 가라앉는 빗소리를 데리고 한사코 따라와 가랑잎 흩날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家出하는 쓸쓸함, 家出하는 외로움의 고래 등짝이 내 몸을 쿵쿵 들이 받을 때 피 튀고 살 흩어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날 때

  뽕나무 위의 삭개오처럼
  닥지닥지 달라붙은 새까만 오디처럼

장대 끝 갯바위―세한도 51

  장대 끝에 두 귀를 내어걸었다. 바람이불면나무들은오른쪽그다음순간은꼭왼쪽으로흔들려요 장대 끝에 두 눈을 내어걸었다. 오른쪽으로흔들린나무는요그다음순간에는꼭왼쪽으로흔들려요 마른 장대 끝에 이목구비를 내어걸었다. 선생님바람도햇살도가을이에요어둠도가을이 어서밤이되니몸한쪽이서늘하기도해요

  갯바위처럼

텅 빈 마당은 팽팽하다―세한도 52

  그러므로 새가 마당에 날아와 앉는다는 것은 몸 전체가 공간 그 자체인 명사성의 드넓은 세계에 시간성의 흐름과 가벼움을 닮은 동사성의 한 존재가 점을 찍듯 날아와 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새가 마당에 날아와 앉으면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아둔해도 뭔가 일상의 평범한 일에서 느낀 것과 다른, 색다른 느낌을 받고 흥분한다. 어린이도 어른도“아! 새가 날아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들의 어색하나 놀라운 어울림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당은 죽음 없이 한곳에서 영원을 사는 공간의 실체이다. 그에 반해 새는 공간 없이 무변無邊으로 날아다니며 흐름을 창조하는 무형의 동적 실체이다. 따라서 새가날아와 마당에 앉았다는 것은 이런 상대적인 두 세계가만나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늘 보는 새인데도 마당에 날아온 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흥분하며 기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정효구,《마당 이야기》, 작가정신, 2008. 96~97쪽)

  아! 곤줄박이 날아갔다
  텅 빈 마당이 텅 빈 마당 끝까지 팽팽하다

동현에게―세한도 53

  먼 산마루에 내려앉은 멍석만 한 겨울 아침 햇살은 오슬오슬 추워 보인다. 이른 아침 어린이집 마루에 맡겨진 내 외손자 동현이처럼 아침 햇살은 잠시 겨울나무 숲을 머뭇머뭇 낯설어한다. 마음은 제 어미 등에 업혀 꽃 그늘 아장아장 꿈길을 가고 낯선 세상 방문 앞에 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우리 동현이처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 아니야 먼 산마루 햇살이 겨울나무 숲의 스산함을 부추긴다. 내가 화장실에 가서 조간신문을 읽고 오는 동안 멍석만 한 햇살은 수심찬 계곡과 환난의 검은 바위를 살같이 지나 어느새 수성구 지산동 일대를 환하게 장악하고 우리 집 베란다 가득 넘실거린다. 장난감 마차를 타고 꽃밭을 말달리는 우리 동현이 파묻히는 웃음처럼 아니 그보다는 와인 잔에 찬물 붓고 할아버지와 쨍! 할 때 찰랑찰랑 넘치던 기쁨처럼 그때 그 해맑은 눈빛 너머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 내게로 온 어린 왕자처럼.

  쨍!

  얼음장에 금가는 소리의 말발굽 먼 산을 넘어 가네

내 사랑 루디아―세한도 54

  치욕이 치욕의 머리끝까지 성난 가지를 뻗어 올렸다. 달은 이미 지고 밤은 깊어 캄캄했으나 왼팔과 오른팔이 다투지는 않았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치욕이 제 몸을 닫아걸었다. 치욕의 습관이다. 치욕은 혁명의 숙주이므로 겨울에는 털모자를 쓰고 비 오는 날엔 지하철 종점까지 나들이를 가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치욕의 생리이다. 치욕이 치욕의 발끝까지 젖은 뿌리를 뻗어 내렸다. 잔치는 끝나고 설거지거리만 지천이었지만 손이 발에게냄새나고 더럽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닭이 세 번 울었을 때 놀란 치욕이 제 몸의 자물쇠를 하수구에 버렸다. 습관은 타성이고 생리는 본능이다. 혁명은 팔다리가 없으므로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신다.

  루디아,
  비단 장수 루디아, 귓속말같이
  끝없이 흐르는 자줏빛 냇물소리

옛날 옛적―세한도 55

  해종일 처적 처적 눈이 내렸다. 옛날 옛적과 거래하지 않겠다. 내일 모레가 경칩인데 그 마을은 하얀 눈 나라였다. 전화기 전원을 끄고 나는 소문보다 멀리 그리고 기억보다 아득히 잠적했다. 배고픈 곤줄박이가 건초더미를 들락거렸다. 사람을 믿은 죄의 기억들이 신발도 신지 않고 불안의 낮과 밤을 들락거렸다. 잠깐, 잠깐 선잠속에 옛날 옛적 눈이 내렸다. 콩 심은데 팥 났다며 태산이 불쑥 하늘 위로 솟구쳤다. 괘씸한 놈, 아닌 밤중 큰 주먹이 옛날 옛적의 뺨을 때리려다 말썽이 싫어서 그만두었다. 쌓인 눈이 녹자 옛날 옛적 성난 군화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쳐들어왔다. 내 몸 이곳저곳 들락거리던 곤줄박이가 거짓말처럼 앞산으로 잠적했다.

  깽깽이
  깽, 소리에 제 꽃잎 떨어뜨리다 붙여진 이름

몸 무거운 가옥 한 채―세한도 56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주어왔어 사흘 밤 사흘 낮 물먹였어 매부리코였어 그대 형형한 논리가 제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한들 가야산 빙벽처럼 사흘 밤 사흘 낮을 저 높은 날벼랑에 엎지르지 못하네. 빌립보 감옥 무너진 담장에서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주어왔어 쭈그리고 앉아 한나절 하이타이를 풀어 수세미로 문질렀어 대머리 였어 그대 번쩍번쩍 빛나는 언변이 제아무리 청정해서 강바닥 가재 발을 헤아린다 한들 귀뚜라미 부부처럼 별빛을 찢어먹고 가을 밤 별빛을 새끼 치진 못하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잠 못드는 별빛을 다독이진 못하네. 사도 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 무너진 담장에서 언어의 조막손 하나 주어왔어 사흘 밤 사흘 낮햇볕에 말렸어 등 굽은 안짱다리였어 마그마로 솟구치는 그대 열정이 人家를 덮쳐 추문을 전설로 만든다한들 목 쉰 찬바람에게 햇볕을 오려 만든 털양말 한 켤레 신기지 못하네. 어찌하겠는가, 마시는 물도 숨 쉬는 공기도 주먹처럼 어둡고 돌처럼 딱딱한 날들의 몸 무거운 감옥한 채!

  절뚝, 절뚝,
  누군가 지중해 연안을 어깨에 걸치고 절뚝, 절뚝, 절뚝

우울 길들이기―세한도 57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서야 비로소 너를 만났어 너에게 서는 생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어 너를 길들였어 내참 좋은 친구가 된 너는 갈색 머리였어 쵸콜릿 빛 망아지였어 한여름엔 팔 다리가 흘러내리는 우울의 낙지였어 눈 내리면 흘러내린 팔 다리가 빳빳해지곤 하는 엿가락 우울이었어 손에 익은 우울의 고삐를 잡고 가파른 벼랑과 올망졸망한 자갈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어 옛집은 흔적뿐이어서 바람도 들지 않고 비도 새지 않았어 편안했어 기억의 털니가 덜거덕거렸어 화내고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자신만만해하는 한 시절이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어 아궁이 가득 불 비피고 있었어 이스탄불! 이스탄불! 1년 전 오늘 나는 우울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별을 헤다 잠들곤 했었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서 뭉개진 사건들의 흐린 허벅지에 아무도 제 이름을 새기지 않았어

  날벼락 쳤어, 목련은 지고
  너무도 오래 캄캄한 밤이었어

먼 길―세한도 58

  혼자 가는 먼 길이 혼자 가는 먼 길을 데리고 먼 길을 가는 동안
  잃어버린 눈물이 잃어버린 눈물을 데리고 목 놓아 우는 동안 가득한 빈 곳이 가득한 빈 곳을 데리고 가득해 하는 동안

  아버지!

이름다운 산책―세한도 59

  당신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인생이라는 칠판을 채워나가야 한다. 칠판을 지난 날의 짐으로 채워 넣었다면, 깨끗이 지워라.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과거의 일은 모두 지워라. 그 덕분에 현재의 자리에 오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서, 기쁨을 주는 일을 찾고, 그리로 나아가라!( 《시크릿》, 210쪽)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날개 상한 기러기를 주인공으로 한 아름다운 산책이 한 달 사이에 백만 부가 팔렸다. 초유의 사태이다. 여수바우 밭에서 호박을 심는데 까치 한 쌍이 날아와 귀속 말로 일러주었다. 영화로 만든 아름다운 산책이 두 달 사이에 이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사적인 사건이다. 텃밭에서 아내와 고추 모종을 하는데 지렁이가 벌떡 일어나 곱사춤을 추었다. 지렁이와 함께 지렁이 춤을 추었다. 아 세월은 잘 간다 아이아이아이 춤이 춤을 추어 주렁주렁 고추가 밥맛을 돋웠다. 사건의 역사이다. 카르페 디엠! 호박넝쿨이 기러기 편대처럼 해묵은 어둠을 쭉쭉 찢었다. 지렁이 목덜미가 돌연환했다.

백철 냄비―세한도 60

  시골 농가 마당의 백철 냄비를 보면 어쩐지 전날 그집에 심한 부부싸움이 일어난 것 같고, 큰바람이 그 집을 들쑤셔 놓은 것 같고, 리어카 끌고 양동이 이고 간 엄마 아직 난전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고, 집에 기르던 개를 전날 술꾼 아버지와 난봉꾼들이 잡아먹은 것 같다. 술 취한 아버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들의 어깨는 바깥의 바람 소리에도 소스라치고, 백철 냄비는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어미의 통곡처럼 바람에 마당을 구르고, 어디 구석에 쳐박혀 오랫동안 집안 식구들 눈에 안 띄고 싶은 백철 냄비. 오줌보 가득 찬 아버지 술덜 깬 발길질에 으스러지는 백철 냄비, 더운 손으로 만지면 쩍 들러붙는 한겨울 마당의 백철 냄비.(Changing Places/Tord Gustavsen Trio)(<소리, 마음의 물질 5>|작성자 일뤼마시옹)

  자책의 창끝이 옆구리를 찔렀다
  하얀 통곡이 쇳물처럼 쏟아졌다
  우굴쭈굴 얼어붙은 마음의 물질
  발길질에 소스라치는 내 노래의 神託

모일 모처 호두나무―세한도 61

  모일 모처 호두나무, 달빛 질펀한 모일 모처 누가, 왜 純銀의 항아리를 엎질렀을까, 모일 모처 비루먹은 호두나무, 봇도랑이 살고 산비탈이 살고 헛간이 살고 있는 모일 모처, 모일 모처 오래 버려진 호두나무, 참 좋은 기별 같은 도랑물 흐르고, 산수유 노랗게 샛노랗게 몸살을 앓고, 기억의 조랑말들 헛간의 지평선을 땅 끝까지 밀어내는 모일 모처, 모일 모처 온몸에 마른버짐 핀 호두나무, 혈혈단신 모일 모처, 캄캄한 산비탈과 잘 드는 낫과목 터지는 예초기와 쑥대밭 모일 모처, 그랬었구나. 바닥 헤진 신발 한 짝 살고, 손때 묻은 지팡이 살고, 버석 거리는 비닐봉지 살고, 가랑잎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일모처, 추억의 사타구니, 비애의 사타구니, 우울의 사타구니, 첩첩산중 사타구니 백일하에 드러난 사바세계 모일 모처 누가, 왜 항아리 가득한 純銀의 生을 엎질렀을까, 검은 시간의 골짜기로부터 구물구물 기어 나온 사위질빵, 할미밀빵으로부터 친친친친 제 몸 감긴 모일 모처 호두나무, 자다가 벌떡 일어난 개구리 떼들 질펀하게 봄밤 엎지르는 모일 모처, 純銀의 生을 한 입에 구겨 넣는 식성 좋은 모일 모처, 모일 모처 호두나무

세한을 노래한 지 어언 십 년―세한도 62

  쓸쓸하다고 쓰자
  쓸쓸하다는 문장으로부터
  솜털이 송송한 애벌레 한 마리 기어 나온다
  찬바람 잎사귀 갉아 먹는다

  흔적도 없다
  뱃길 끊긴 지 어언 십년

  외롭다고 쓰자
  외롭다는 문장으로부터
  종아리가 통통한 아기 오리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흐르는 실개천 뜯어 먹는다

  흔적도 없다
  세한을 노래한 지 어언 십년

  고독하다고 쓰려다 말자
  고독하다고 쓰려다 만 문장으로부터

  머리칼 다 빠진…… 내일 저녁 창문 열고 마실 나온다
  만 리 밖 인기척 빨아 먹는다

  어둠이 어둠끼리 등을 긁는 듯
  메밀꽃 밭 언저리가 어제 아침까지 따끔거린다

김영근 시인에게―세한도 65

  의자가 있다
  의자가 저 혼자 앉아 있다
  침묵이 데리고 온 의자
  물소리가 쉬어가는 의자
  쉬어가는 의자가 앉아 있는 의자
  구름이 만든 의자
  구름의 이 못질한 의자

  스님 불 들어가요

  의자가 있다
  의자가 꼿꼿하게 앉아 있다
  달빛보다 깨끗한 의자
  깨끗해서 내 손이 닿지 않는 의자
  내 손이 닿지 않아 등이 가려운 의자
  등이 가려워도 잘 참는 의자
  서산 저 쪽으로 기우뚱하지 않는 의자

  스님 불 들어가요

  의자가 있다

  태초에 의자가 앉아 있다
  앉아 있다 보다 훨씬 반듯하게 앉아 있다
  젖은 신발이 앉아 있다
  젖은 하나님의 발에 불 들어와서
  환한 맨발이 있다
  앉아 있는 의자가 환하다

옹알이―세한도 66

  깽깽이 피었다
  고요의 남쪽이 옹알거린다

  옹알이는 대지의 체온
  옹알이는 우주의 리듬
  옹알이는 태초의 흔적
  옹알이는 언어의 태초,,,
  와 같이 쓰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깽깽이 피었다
  벌들이 찾아와 옹알거린다

  옹알이는 반가운 기별
  옹알이는 햇살이 차린 식탁
  옹알이는 시간의 입구
  옹알이는 초록의 신탁,,,
  과 같이 쓰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고요의 남쪽
  깽깽이 해종일 옹알거린다

허만하 선생의 문장―세한도 67

  “따라서 <흔적>은 <기원>보다 기원적인 것,
  즉 <기원의 기원>인 것이다.”

  허만하 선생의 문장 속에는 용암이 흐른 흔적
  화강암을 깎아 만든 비석의 흔적, 뜬금없이
  오직 손톱으로 허공에 새긴 三年不蜚의 흔적
  벌레의 흔적, 벌레가 아닌 것이 벌레인 흔적
  벌레인 것이 벌레가 아닌 흔적

  “아득함을 혼자서 흘렀을 물길
  무섭다! 시의 길”

  허만하 선생의 문장 속에는 발길소리 멎은 흔적
  시간을 허물어 만든 봉분의 흔적, 뜬금없이
  오직 발톱으로 맨땅에 물길을 낸 三年不蜚의 흔적
  개불알꽃의 흔적, 개불알꽃이 개 불알인 흔적
  개 불알이 개불알꽃인 흔적

  태초; beginning, core, foundation, ultimate concern

  기원의 기원은 기원의 태초
  어둠이 어둠을 뜯어먹어 사월은 캄캄하네, 뜬금없이
  적막의 음문으로부터 고요의 입구까지 천리 길이네
  무섭다! 혼자서 흘렀을 흐름의 태초. 아득한
  지상의 순리

남몰래 흐르는 눈물―세한도 68

  피어나는 꽃잎과 떨어지는 꽃잎 사이
  분노의 뼈와 치욕의 살 사이 살얼음 호숫가
  어스름 거느리고 날아온 굴뚝새

  ―면목 없는 비애
  ―면목 없는 용서

  솟구치는 눈물과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
  말하기와 듣기 사이 두고 온 노르망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묻은 팔다리

  ―그때 너는 어디 있었니?
  ―그때 너는 도대체 뭘 했니?

흐르는 칼―세한도 69

  책갈피에 꽂힌 가을하늘
  가을을 도려낸다 하늘 푸르다

  편지 속에 접힌 가을바람
  가을을 베어낸다 바람이 분다

  하늘 도려내고 바람 베어내면
  가을만 강바닥에 가라앉겠지

  잘 드는 칼이여, 쓸쓸한 글쓰기여

  갈갈갈 가을은 흘러가겠지
  깊은 밤엔 칼칼칼칼 저 혼자 흐르는 칼이 되겠지
  • 이전

  • 다음

강현국

시집 1 | 좋아요 5

  • 나비보내기
  • 좋아요

보고있는 시 공유

  • 책갈피
  • 차례 및 낭송시 듣기

달은 새벽 두 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강현국

시집 댓글 달기

시집 책장 추가

보고있는 시집 공유

더 많은 시집 보기

달은 새벽 두 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강현국

댓글전체보기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차례 및 낭송시 듣기

  • 한 자락 소낙비

    13

  • 하얀 대낮

    15

  • 누이와 기러기

    16

  • 미주리 하늘 너머

    17

  • 캄캄하게 꽃 진 자리

    19

  • 김광석을 듣다가

    20

  • 레몬빛 허공

    21

  • 진밭골 입구

    22

  • 세모가 네모에게

    23

  • 개미와 함께

    24

  • 남으로 창을 넓게 내었다

    25

  • 친구 생각

    26

  • 풀밭 위의 식사

    27

  • 너풀너풀

    28

  • 저급한 희망

    29

  • 옛 생각

    30

  • K시인에게

    31

  • L시인

    32

  • 김훈을 베끼다

    33

  • 벽돌과 저녁노을

    34

  • 어떤 유리병은‘퍽’하며 깨어진다

    35

  • 빗방울처럼

    낭송시

    36

  • 아주 천천히 그리고 너울너울

    37

  • 빗속을 둘이서

    38

  • 나를 훔친 도둑

    39

  • 어느 봄날

    40

  • R을 위한 모자이크

    41

  • 이 세상 저자

    42

  • 침묵 한 그루

    43

  • 너무나 좋은 혼자

    44

  •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45

  • 오규원 선생께

    46

  • 하늘까지 70리

    47

  • 저만치서

    48

  • 한 세상이 떠나고

    49

  • 내려놓은 풍경

    50

  • 끝말 이어가기

    51

  • 어제는 슬픔이 하나

    52

  • 도망치는 문장처럼

    53

  • 낱말에 파먹히다

    54

  • 어이없이

    55

  • 구름 산사태

    56

  • 오규원

    58

  • 아들을 위한 각서

    59

  • 버려짐의 태초

    60

  • 선창가 안개에게

    61

  • 섬뜩한 파수꾼

    62

  • 편지

    64

  • 우주의 떠돌이

    66

  • 그럼에도 불구하고

    68

  • 장대 끝 갯바위

    69

  • 텅 빈 마당은 팽팽하다

    70

  • 동현에게

    72

  • 내 사랑 루디아

    74

  • 옛날 옛적

    75

  • 몸 무거운 가옥 한 채

    76

  • 우울 길들이기

    78

  • 먼 길

    79

  • 이름다운 산책

    80

  • 백철 냄비

    82

  • 모일 모처 호두나무

    84

  • 세한을 노래한 지 어언 십 년

    86

  • 김영근 시인에게

    88

  • 옹알이

    90

  • 허만하 선생의 문장

    92

  • 남몰래 흐르는 눈물

    94

  • 흐르는 칼

    낭송시

    95

책장,착갈피

시집(시)을 책장,책갈피에 추가했습니다

  • 닫기

서비스안내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