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이재린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크랙션을 누른다
  — 당 신 의 유 방 이 위 험 에 노 출 되 어 있 습 니 다
  테이프를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툰드라 시대의 사랑—피카소 〈우는 여자〉

  이쪽도 저쪽도 아닌
  순간의 전부이자
  전부인 순간

  최선을 다해 울었지
  은밀한 음악을 들으며 흘러갔지

  흘러간 것들이 꽁꽁 다시 밑동에 돌아와 쌓이는
  흰 말채나무 한 그루의 고독

  등 푸른 고독이
  순록이 되어 뛰어다니는 얼굴에서
  해체된 울음이 각진 화음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았지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야 정돈되는 시절을

  여기 없는 것들의
  빨간 파란 노란 울음의 알갱이들이
  실은 오래 불렀던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얼어붙은 것들이 뜨겁게 역류하는 동안
  노래는 태어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울음 그치면
  사랑은 북으로 머리를 두고
  긴 잠에 들겠지

질문의 형식

  늦은 밤 지하철역 플랫폼
  한 울음이 한 울음을 지켜보고 있네
  울음은 상투적이지만 생기가 넘치네
  취객 하나 어슬렁 그것을 밟고 지나가고
  밤의 불빛은 후줄근하네

  승강장 벤치에는 썰물과 함께 온 異國의 남자가 지포라이터
를 만지작거리다
  담배도 없이 불을 켜네
  어쩌면 울음의 다른 모습일지도 
  불꽃 속에서 얼핏 제3세계의 밤하늘이 보이네
  울음의 발화점은 어디인지
  빛의 언저리가 축축해지면 어떤 기억들은 이미 내 것이 아니네 
  왜 그랬니, 오래 기다렸으나 응답이 없네

  칸칸이 물음의 외연들을 싣고 열차는 달려가고
  겨울에도 무성한 질문을 달고 사는 앙상한 가지들
  울음을 위로하는 건 또 하나의 울음임을 
  울음 뒤의 침묵은 더 깊은 그것임을
  지나간 날들이 울음이라는 질문의 색다른 형식으로 내게 가
르쳐 주네
  질문의 원인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네

  거기,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
  저문 것들이 더 멀리 저물어 내일을 준비하는 곳
  바람이 지면 그대로 화정火定에 드는 거기, 그곳
  수많은 별은 누구의 울음인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오래 흘러간 질문들이 투명한 날개가
되어줄는지
  발랄한 울음이 사철 내내 푸른 그늘을 드리울 상록수역
  오이도행 마지막 열차가 막 지나쳐가네
  막차가 떠난 후에도 남겨진 풍경들이 울울창창 
  싱그러운 적막이 되네

진사백자 듣기

  천삼백 도 불길 속에 은거 중입니다
  그곳은 내쏘고 되쏘는 빛의 엉김으로 그득합니다
  동요 속으로 산패된 기억이 쌓이고
  한껏 안을 열어 밖을 봉쇄합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오만해지는 빛의 관절을 누르고
  타닥타닥 풀무질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소리는 단추를 풀 듯 두근두근 가슴을 건너고
  고개를 숙인 채 망연히 서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사라져 어둠을 흉내 내는
  소리에 유약을 바르면 한 덩이 노래가 됩니다
  등요登窯 속 소나무는 최초의 흙을 만나
  안전하게 도발하는 비장의 키를 꺼냅니다
  웅크린 달이 웅 울음 울 때
  바람의 점막이 촉촉해질 때
  진사의 붉은 내력이 어둠을 찾아오면
  안에서도 열리지 않던 문이 굳건히 열립니다
  소리의 전유물은 목이 긴 기다림이 획득하는데
  그것은 마지막 창불에서 특히 유효합니다
  가슴에 너울성 파도가 치고
  빛의 고유번호를 식별하는 바람의 눈이 매서워지면
  파찰음으로 완성되는 소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빈 등

  그곳에 가파른 계단이 있다 
  계단이 보인다는 것은 비탈이 있다는 말이다 
  한눈을 팔다 추락하기 십상이다 
  내가 나에게 받침대가 되어주는 얼개의 층층다리
  비탈을 오르다 골골골 폐수가 되어 빠져나가는
  불같은 마음의 수채통
  휴지처럼 술술 풀리는 삶은 치욕임을
  흐르는 물에게 말한다

  누군가 그곳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철이 들었다는 말이다 
  거친 숨소리는 빛 좋은 음악이 된다 
  색소폰처럼 살짝 휘어진 계단은
  파란만장한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뒤통수쯤에 감추고 있던 청춘의 사마귀
  C3 층계가 수상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마음은 아픈 계단을 타고 수없이 오르내렸다
  눈으로 확인한 걸 손으로 다시 확인하며 돌아서야만 했다
  버려진 노래는 
  속이 꽉 찬 바람이 되어 허공에 떨어졌다 
  허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갖게 되었지만 
  버려진 나는
  혼자 꽃 피우고 열매 맺고 혼자서 이중창을 불러 젖혔다 
  혼자 부르는 노래는 악보도 없이 뻣뻣했다

  누군가 피 흘리는 벽에 기대어 운다
  추억은 맹종죽처럼 자라고
  백년에 한 번 핀다는 그 꽃을 피우느라 
  빈 등은 뜨겁다

노인의 바다

  백발의 신사가 좌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빛바랜 장정들이 일렁이자 그가 항해를 시작한다
  안경 너머 두 눈이 한창 상어 떼를 쫒고 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쪽배 한 척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동전의 수줍음이 만져진다

  삶의 조류가 팍팍해지고
  꼬리 잘린 것들이 미끼를 문 채 바다 꼭대기로 밀려오면
  햇볕에 그을린 시간은 늙은 어부의 눈꺼풀 속에서 꾸덕꾸덕
말라간다

  끌고 가는 것인지
  끌려가는 것인지
  건져 올린 활어들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사흘 밤낮 피 냄새를 맡은 활자들이 검은 활어가 되어 펄떡
일 때까지
  반쯤 뒤집힌 배가 건져 올린 것은 불굴의 의지가 놓쳐버린
무엇
  정작 바다가 키우는 건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인이라
는 하드 장정의 책
  함께이지만 섞이지 않는 바다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거기, 노인의 발치에서 도란도란 일렁이는 부표들
  갯마중 나온 소소리바람이 페이지를 넘긴다

동지

  동지冬至에 동지同志를 생각하네
  위태롭게 숨은 배신을 생각하네
  사랑 이외에는 모두가 잡사雜事일뿐
  거두절미하고 단순명료하게
  모든 것을 걸었던 혈맹의 그 밤
  모든 것을 건 대가로 우리는 동지가 되었고
  배반은 나약한 자의 무기가 되었네

  낯익은 풍경들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 하루하루
  세월을 편집하는 동안
  어느 추운 밤의 모서리를 돌다 멀어졌는지
  멀리 있는 동지를 불러보는
  오늘은 동지

  뜨겁던 밤들의 자줏빛 추억을 넣고
  팔팔 끓여 우려낸
  저 슬픔으로 얼룩져 끈적끈적한 마음이 새알팥죽이라면 허허
  벌판 추운 밤의 모서리마다 미련 없이 뿌리겠네
  식어가는 팥죽 위에 서리는 엷은 장막처럼
  식어가는 사랑의 어떤 기미를
  이제 막 生의 추위에 입문한 몸들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묻네
  지금은 나쁜 패를 쥐고 생을 곁눈질 하는 장세
  끗발은 펄펄 끓는 팥죽 속 새알심처럼
  내 안에 스스로 떠오르는 것

  하지만 동지여,
  대낮에 전조등을 켠 채 달리는 차를 보며
  이제 막 어둔 터널을 벗어나왔음을 알 수 있듯
  나 또한 길고 긴 밤의 동지를 벗어나 환히 불 켜진 얼굴로
  너에게로 달려가고 싶네
  너는 아직 내가 가지 못한 길이니

만선

  어둠이 하나둘 별을 사정하면
  환한 얼굴로 태어나는 저녁의 창들
  오직 한곳으로만 집중되는 오만한 빛을 창문은 알고 있다
  그 빛을 따라 기억의 플랑크톤이 모여든다 

  누군가는 창가를 서성이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죽는다
  집어등을 밝힌 오징어배처럼 
  빛의 흡반 속으로 빨려드는 사람들
  겨울 밤 
  아파트는 만선이다

  해풍에 젖은 이들이 물비린내를 풍기며
  카바이트 불빛 안으로 모여든다
  선주는 밤늦도록 귀가할 줄 모르고
  누군가는 빛의 벼랑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삶이 춥고 풍랑이 거칠수록 
  오만 촉광 눈부신 빛을 쏘아대는 
  오, 징한 사랑아

  반점처럼 돋아나는 파란이 
  바다의 기억이라면
  오징어 수족관은 기억의 버블세븐이다
  사람들은 판돈을 걸고 회심의 미끼로 내일을 낚는다

  창이 출렁인다
  층층이 포개진 잠들이 밀려오고
  물풍을 단 꿈이 수면에 일렁이면
  먹물 같은 적요가 밤새 그것을 지킨다

  물기 없는 어둠이 부옇게 새벽을 물들일 때까지
  잠 못 드는 별, 별, 별,
  불 켜진 창을 바라보는 동안 
  바다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슴에 등燈을 달고 사는 몇몇의 여인네와 
  그 가슴을 찢고 태어나 자란 몇몇의 사내들뿐이다 

  바다는 늘 배경으로 있지만 
  목적지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캄캄히 젖을수록 출렁이는 창문 같은 것이다

결례

  아침마다 구두코에 침을 뱉으며
  걸레를 집어 든다

  순수는 걸레의 다른 이름
  더렵혀질 일만 남았다

  누군가 불멸을 노래할 때
  나는 필멸의 오늘을 닦는다

  미워할수록 마음의 백사장은 줄어들고
  서빈백사 옥 물결은 찰랑찰랑 구두를 벗긴다

  걸레는 무섭지 않다
  순수한 걸레는 결례다

  수줍은 걸레는 결례다
  걸레를 구워삶는 것 또한 결례다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구멍을 막을 또 다른 구멍이
  필요해 그만 결례를 저지르고야 마는

  반질반질 윤기 나는 더러운 세상을 위하여
  결례는 걸레를 움켜쥐고 

슈가 스폿*

  잘 견딘 시간은 달다 
  껍질을 까면
  망설이고 부대낀 마음들이 보인다

  물컹한 살점을 한 입 베어물면
  짓무른 상처는 다디달다

  노인의 얼굴에 드문드문 핀 
  저 시간의 주근깨
  태양을 사랑한 흔적이다

  오래 비비고 맞닿은
  그곳이 바로 세월의 성감대임을
  한 겹 벗겨놓고 보니 알겠다

  제일 맛있는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고
  잘 견디었다고 
  달큰한 시간의 넉살을 즐긴다

  바나나를 먹으며 
  달게 썩어가는 법을 배우는데
  문득 노란 껍질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사라진 껍질은 과육의 녹진한 말년을 알고 있을까
  누가 한 입 가득 날 베어 물고 있다

  ✽바나나 과피의 갈색 점

터미널

  가슴에 꽃을 단 버스가 도착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만 버스에서 내렸다
  적막은 소란스러웠다
  잡다한 소리의 리듬을 타고 화로는 피어오르고
  울음소리에 놀란 불꽃이 유리창마다 번지듯 튀어오른다 
  어디선가 여성 3인조 전자 트리오가 맹렬히 
  에러가 난 삶을 반납하고 있다 
  엊그제 먹은 삼겹살은 이산화탄소가 되고 메탄가스가 되고
  눈물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골고루 뿌려진다
  길은 상행선만 있고 하행선은 없다
  그을린 유리창이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동안
  새 한 마리 어둠 속을 퍼덕거린다
  터미널은 그의 마지막 사생활을 알고 있다
  많은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의자에 앉아 두어 시간 검은 연기의 스투파를 읽다 보면
  절차는 끝이 난다
  전출신고는 그의 마지막 의무가 될 것이다
  죽어서 가는 그곳을 나는 살아서 왔다

비자림

  그곳에는 천연기념물이 된 책들이 있다
  이천팔백여 권의 장서로 빼곡한 비자나무 도서관
  대체 어떤 손이 저토록 울울창창한 삶을 기록해 놓은 걸까
  현무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하드 장정의 겉표지엔 저자만이 알 수 있는 일련의 번호가 적
혀 있고
  어떤 생은 얇고 어떤 생은 두껍다
  굵직굵직한 목록을 훑어내려 가다가
  이파리들의 푸른 해설을 먼저 읽는다
  하늘은 간간이 반짝이를 뿌리고
  지나가던 바람은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미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오래 전 만났던 안개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안개를 만나자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기억의 독성은 저토록 푸르러
  눈 먼 새들의 날갯짓이 어지럽다
  꽃이 피고 비자나무에 비자가 열리도록
  마음은 수없이 비자나무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을 것이다
  향기에 취해 깜박깜박 졸기도 했을 것이다
  날 저물자 도서관 지붕 위로 붉은 비가 내린다
  붉은 밥을 먹는다
  숲에선 숲을 볼 수 없듯
  사랑 안에선 사랑을 볼 수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적막이
  산감처럼 어둠을 지킬 뿐이다

붉은 상자

  까페 밀크초콜릿 입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건너편 교회 십자가에도 붉은 네온이 켜진다

  聖과 俗이 나란히 불을 밝히는 저녁 
  누군가 상자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는 
  나올 줄을 모른다

  상자 속에 가만히 손을 넣어본다 밀크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목소리가 만져진다 손끝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성과 속이 네온의 거리에서 비밀의 포장지를 뜯는 밤
  어둠은 골목 입구를 봉쇄하고 늪에서 돌아온 이들은
  구름을 만들고 꽃을 찬양한다 따로 또 같이 그리운 밥을 먹
는다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각 그곳의 불가피한 낭만을 뒤로한 채
하나 둘 성스러운 뒷모습들이 멀어지면
  두리번거리는 시간만 남아

  한번쯤은 뒤를 돌아본다 빤하고 보잘것없는 약속을 건넬 때
도 다소곳이 눈을 감는다
  자주 눈감아 준다

  바람 부는 길모퉁이
  스잔한 외투들이 오고 가고
  세상의 애인들은 모두 뒷골목에 사는지

  스칸디나비아식 난로 위로
  더글라스 전나무가 들려주는 붉고 울창한 소용돌이가 이는 곳

  까페 밀크초콜릿 입간판에 불이 켜지고
  십자가 또한 우울한 시대의 아이콘처럼 높이 더 높이 붉은 손
을 흔들 것이다

  상자가 우리를 구원할 때까지 어둠은 밤새 불꽃을 용접하고
  느닷없는 만남으로 우릴 인도할 것이다

사하라

  어떤 마음은 뿌리를 만들고
  어떤 마음은 초록을 만들어
  나무와 나무 사이 길이 자란다 

  길은 여인의 맨발에서 시작되고 
  맨발에서 끝이 난다

  무장을 한 사내들이 앞장을 서고
  여인들은 낙타를 끌고 그 뒤를 따른다
  로비비아 선인장이 한없이 낮은 자세로 포복해 있는
  그곳의 사랑법은 장렬하다

  먼데서 소소리바람이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 휘어지는 모래밭
  사랑은 이렇게 같은 방향의 상처를 지니는 것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니
  사랑은 이단異端이다
  끝이 다르다는 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귀영하는 외인부대의 사내들은
  사막의 푸른 늑대가 되어 여인들을 이끌고
  뒤늦게 온 사랑이 이미 포기한 사랑을 바삐 쫓아가는데 
  자유롭고 강인한 늑대를 애인으로 둔 여인이 흘리고 간 
  하이힐이 선인장 가시처럼 박혀 있다

  여인이 뜨거운 모래밭에 빠트린 건 하이힐만이 아닐 것이다
  사내를 사랑하므로
  그가 딛고 일어설 척박한 하늘도 기꺼이 사랑하기로 했으리라

  늑대가 하늘을 우러러 우는 까닭은

  사랑은 사막의 부유물에 지나지 않지만
  로비비아 선인장이 흰 꽃을 피울 때까지
  사하라는 그 많은 비를 감추느라 온몸이 바스라질 듯 아프다 
  그곳은 방임과 지루함으로 가득하고
  발밑엔 가슴을 부빈 흔적들이 서걱이는데
  지표면의 온도가 자꾸만 높아지는 이유는
  와디라는 빈 물줄기의 허상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한 곳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생이별과 함께 추위가 찾아오면
  우리는 각자 다른 시간 속에서 황혼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이단이므로

단청

  한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달려가 매달렸네

  베인 마음은 배흘림기둥이 되고
  용서라는 이름의 옥도정기
  애기 배꼽 소독약 같은 꽃살문 위 그것

  절집의 붉고 푸른 처방전이
  팔작지붕 처마 끝 공포에 새겨져 있네

  어디서 베였는지도 모르고
  베인 곳에 노란꽃 피네
  모든 언어의 그늘에도 생채기가 있어

  꽃 떨어질 때까지
  두 손 부비며 바래어가네
  바래어가는 것은 시간의 본분이나
  바랠수록 환해지는 건 절집의 마음

  평생 불쌍한 남자만 사랑했던
  바보 같은 여자

  오랫동안 한 사람을 지켜보았네
  단 한 번의 일몰이 허용된 삶

  청명산 아래
  짧고 긴 문장들이
  빼곡히 혼자 서 있네

골목 안 수선집

  왜 저 산은 저렇게
  지루하게 똑같은 모습일까
  — 李箱, 권태 —

  깊어질수록 이름 숨기는 것들이 있다
  이제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한다
  그 집은 마음만큼 깊은 곳에서
  버리고 싶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을 기다린다

  수선 가능합니까 수선 
  가능합니다 눈빛이 수런거리고
  지루함은 까메오처럼 등장한다

  슬픔은 너무 무거워 쉬 나이를 먹지 않아
  깨져 뾰족해진 돌이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먼저 
  수술대에 눕는다
  고쳐서라도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일인치만 줄여주세요
  허리통 굵은 가난을 맡긴다
  주름 진 이마의 권태와
  낡고 고장 난 가슴을 맡긴다

  아프지 않으면 예쁜 게 아니래요
  손등을 깨물며
  당신은 당신의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한다
  그렇다고 
  당신과 당신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사이
  홀로 탄생한 노래가 없듯
  홀로 던져진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살다가 한 번쯤 들르게 되는 곳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욕망의 치수를 재고
  자르고 시치고 꿰매어 버리는
  불안이 주는 어쭙잖은 매혹들에 대해
  당신은 자꾸만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에 자유가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
  눈 감으면 떠난다는 사실도
  당신은 알고 있을까
  서스펜스는 美의 종장에 슬며시 찾아와
  우리를 미래로 퇴보시킨다

  똑같다는 건 의미가 없을까요
  당신은 묻고
  눈을 감은 당신은 떠날 준비를 한다

  아파트 불빛처럼 당신들은 닮아가고
  生은 겨우 안전하다
  그리하여
  새로운 권태는 자란다

  남자는 어느새 먼 산을 끌어다 놓고
  쓰윽 마름질을 시작한다

고양이 눈 속에 어슬렁거리는 저녁이 있네

  발리에선 야자나무보다 높은 건물은 짓지 않는다 하네
  꿈꾸고 방황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 또한 나무 아래의 일이
라 하네
  팔이 긴 저녁이 야자새 노래를 잠재울 때
  그림처럼 창가에 앉아 밖을 보는 고양이
  고양이에게 창밖은 무엇일까
  잦아드는 소리 속에 골똘함을 끼워보네
  우러날수록 뽀얀 속내를 드러내는 바다
  노래가 기억의 사골국물이라면
  파도는 골마지 핀 삭힌 시간의 꽃이라네
  바라본다는 것은 깊이를 만져보는 일
  높이를 잊고 사는 새들에게 날카로운 휴식이 되네
  먹고 자란 음식이나 듣고 자란 노래나
  하릴없이 가치로운 일들이
  모알보알 바다 속 거북이와 정어리 떼 만큼이나 순하고 스잔
하다네
  토렴하듯 바다를 데우는
  파도의 귀는 언제나 낮은음자리로 열려있어
  곰곰이라는 다듬어지지 않은 순간조차 어슬렁
  노래가 되고 마는 이곳
  야자나무 밑에는 안심하고 불안해도 좋을 저녁이 있네

염주

  등 굽은 할머니가 버스에 올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을 옮긴다
  걸음과 걸음 사이 사유의 쇠똥구리를 굴려본다
  그녀가 지고 다녔을 태산 같은 돌을 들추면
  곧고 푸른 무언가가 썩지 않은 외로움으로 숨어 있을 것만
같은데

  버스 앞 유리창에 염주가 걸려 있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빼꼼히 

  굽은 등은 할머니 몸이 활이었다는 증거
  어떤 거대한 힘이 스스로를 당기고 당겨 
  먼 곳으로 날아갈 채비를 해 온 것이다

  굽으면 굽을수록 
  이쪽과 저쪽은 충분히 멀어서 가까운데
  도고자는 염주의 매듭이자 그녀의 복사뼈
  염주 속이 깊고 환하다 

  할머니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염주 속으로 들어간다 
  다음 生이 진짜 삶이란 듯 하이앵글로 부풀어 오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 
  투명한 사유의 구슬을 가른다

  생은 단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진 영화
  사랑은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름

  저녁 어스름을 선택한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무엇이었을까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버스는 숨이 넘어가고
  차창도 잠시 숙념에 드는 황혼녘
  생각은 자꾸만 저쪽으로 기울고 
  그녀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길을 홀연히 건너고 있다

거대한 울음— 일곱 빛깔 바위산 울룰루*

  저 멀리, 산처럼 거대한 울음이 엎드려 있다 

  수평선 아래 반쯤 몸을 숨긴 인도코끼리 한 마리, 한 번도 제
울음을 담아본 적 없는 견고한 귀가 수평선을 덮고 있다
  내 머릿결 적시던 네 숨소리 받아내던 그 귀
  소리 안엔 귀가 없어, 고향을 떠나온 코끼리의 울음을 이만
큼에 서서 지켜보다가 
  수평선에 삽입되는 해를 본다
  사라지고 남은 것들이 구멍이 되어 뻥 뻥 뚫려 있는, 인도빨
강으로 물들어가는 슬픔의 집을 바라본다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수만의 나비 떼로 날아오르는 꿈의
시간을 호주 아낭구 원주민들은 츄쿠파라 부르는데
  일곱 빛깔 바위산 울룰루의 울음소리가 글쎄, 세상의 중심이
라니, 배꼽이라니 

  네가 알 수 없는 빛으로 내게 다가왔을 때 세상의 중심은 너
였다가 너가 아니었다가
  조금씩 변해가던 나를 향한 네 마음이 그랬던가
  강한 것들이 휘어질 때면 유독 부드러운 소리를 내곤 하지

  소리가 빛으로 바뀌는 그 시각
  먼 미래로 하강하는 울음 하나 시간의 탯줄을 자른다
  멀리서 울음 듣는 이여 
  츄쿠파 츄쿠파
  한 번도 태어난 적 없는 아가의 얼굴이 보인다
  네가 일곱 빛깔로 물드는 동안 
  나는 책도 없이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호주의 노던 준주 남부에 있는 거대한 모래 바위

달빛 대리점

  아파트 뒤편에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악취가 심해 여름엔 영락없는 시궁창이다 
  어느 날엔가 보름달을 그윽하게 품고 있었던 것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명경이 되어 있었던 것
  악취가 향기가 되는 순간의 
  빛의 구조물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난간에 기대어 서서 비밀의 근원을 들여다보았다
  타조가 알을 품듯 가슴에 달을 품고 잔잔히 
  빛을 굴리고 있었다 빛은 아슴한
  꿈에 예속된다
  지극한 마음의 끝이 다다를 수 있는 거리
  개울에서 우주를 수 만 번 다녀갔을 달
  빛은 대리점의 유일한 사은품이었다
  그곳엔 아주 특별한 손님이 다녀가셨다
  빗물 고인 작은 물웅덩이에도 
  달빛 분점이 차려졌다 
  지금 한창 성업 중이다

망둥어 꽃밭

  서산 동부시장 한 귀퉁이
  망둥어 꽃밭이 있다 
  꾸들꾸들 말라가는 어떤 후생을 
  물골 주름진 손이 돌보고 있다 
  감람빛 플라스틱 쟁반 위에 
  배를 뒤집고 웃고 있는 꽃들 
  욕심을 도려내고 고집을 발라내고 
  남을 것들만 남아서 꽃이 된 물고기가 
  파도 무늬 잎맥 사이 새 삶을 앉혔다 
  할머니에게 꽃은 와룡이거나 봉추 
  비린 마음들이 쇠파리 떼를 부르는 초가을 오후 
  안전구역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해 
  사람들 비탈에 서서 꽃밭을 내려다본다 
  그것은 누군가의 꿈속에서 뭉근하게 졸인 이름이거나
  달빛에 바삭 튀겨낸 울음
  매캐한 국물 속을 휘젓는 뜨거운 소용돌이가 된다
  준설토를 뒤집어 쓴 채 죽어가던 동무 생각에 
  가시별 하나 목구멍에 날아와 박힐 때도 있지만 
  어느 집 냉동실에서는 갈라파고스거북이만큼이나 
  오래 살고도 싶을 것이다
  꽃 이상의 꽃들이 피어있는 할머니의 꽃밭
  내홍을 견딘 꽃들은 같은 무늬의 흉터를 지녔다
  다 늦은 저녁 허기진 이름들이 허겁지겁 그것을 살라먹는다
  몇 겹의 어둠이 뭉쳐진 곳으로 빛과 바람이 피의 비밀을 나누며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순환하는 몸들이 가로림만 갯벌을 마구 달구다
  이심전심 파도소리를 내며 둥그렇게 피어 있다

가을 마곡사

  이제 슬슬 옷을 벗기 시작한다
  녹이 슬기 시작한다
  녹슨 산이 발그스레한 표정을 짓는 것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리워하지도 않는데
  그대가 미운 것

  모두 가을과 무관하지 않다
  가을과 무관한 것은 가을뿐
  피라칸다 작은 열매들이 불놀이를 한다

  녹이 슨다는 건
  제대로 물든다는 것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

  마음 놓을 수 있다는 것
  마음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마곡사 경내에는 혼자라서 
  이미 혼자가 아니어서 혼자가 된 사람들이 
  그득히 갇혀 있다
  심검당 처마 밑 한 움큼 비어있는 자리
  햇살은 늙은 스님의 이마를 톡톡 쪼아대다가 
  고즈넉이 물들이고

  더 이상 물들 구석이 없다
  물들인 흔적이 없다
  흔적마저 떠난 사랑은 이미 겨울이다
  혼자라서 혼자가 아니어서

  대웅보전 느티나무 기둥을 두 팔로 안고 돌아도
  네게로 가는 길만 나에게 없다 

  겁 없는 감이 태화천 물 위로 떨어지는 날
  아주 가까이서 소용돌이 응답이 들려오리라
  사랑을 안고 젖을 물리리라

흔들의자에 앉아

  뒤늦게야 죽도록 미워지는 사람이 있네
  그때 그 말은 안 들었어야 했는데
  안 들었어야 했는데 듣고 만 귀가
  그믐달로 벌을 서고 있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뒤척이는 달의 기척을 온몸으로 느끼네
  비온 뒤 급속도로 돋아나는 독버섯처럼
  아무데도 아닌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불쑥
  불쑥 솟아나는 생각
  흔들어 지우려 애쓰네
  내가 의자를
  의자가 나를
  가만히 흔들다 보면
  어룽어룽 어리는 생각의 얼굴들이
  좀생이별이 되어 떠다니네
  듣지 않았어야 하는 말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보다 오래 반짝이네
  불사不死란 얼마나 끔찍한가
  넌 헤어진 애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니?
  자꾸만 주저하는
  불사不思란 얼마나 참혹한가
  생각 아닌 생각이 뒤죽박죽 떨어져 쌓이면
  그것들을 촘촘히 빚어 별을 만드는 시간
  어느새 의자는 은하철도가 되어 우주를 건너고
  창틀에 끼인 구름은 자꾸만 물을 마시네

최소한의 증거

  나는 52kg의 사탕
  구름을 안은 책

  내 안에 우글거리는 비

  어떤 곳은 젖었고
  어떤 곳은 젖지 않았다

  생각이 깊은 나무는 쉬이 젖어서
  쉬이 젖음으로 생각이 깊어진 나무는
  달려가 안기기에 알맞은 높이가 된다

  우리는 저마다의 갈피를 펼쳐놓고
  저마다의 문장을 도닥이다가
  젖은 이름자를 써 본다

  슬픔은 흰 옷을 입고
  접힌 갈래마다 붉은 글자를 새겨 넣는데
  그것은 외톨이라는 형식의 어울림을 사랑한 까닭이다
  젖는다는 것은 축복이자
  쓸쓸히 웃고 있는 
  궂은 책의 모서리이기도 하다
  
  어떤 비는 
  삶의 잡내를 없애주는 음악과 함께 온다
  아래에서 위로 
  먼 곳에서 가까이로
  비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함께 흐르는 것

  흐물흐물 녹아 흐르고 흐르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쌓일까
  어떤 노래로 우린 익어갈까

  흐르는 것들이 있어 
  사정없이 날 깨무는 저녁
  치약의 목을 조르며 생각한다
  내 목을 졸라대던 속삭임들을

  젖는다는 건 
  널 만났다는 최소한의 증거
  버릴 수 없어 
  젖은 책처럼 나는 자꾸만 무거워진다

노래의 촉감

  깊은 가을날 어둠과 함께 듣는 노래는 서늘하다 
  서늘함은 의외로 따뜻하고 연한 피부조직을 가졌다 
  목석같은 사람도 목성 같은 빛으로 다가온다

  노래의 주성분엔 물기가 많아서 
  제대로 된 노래가 와 닿으면 온몸은 
  촉촉이 젖어 빛난다 새벽이 오면 
  어둠을 조립하는 빛의 손가락들이 풀잎 위에 
  이슬을 얹어 놓고 가는데 그것은 
  슬며시 강렬한 촉수로 부딪쳐오는데

  아름다움도 때론 공포가 되는지 
  사라져 가는 것들의 서늘함이
  한 덩이 영롱함으로 옮겨 앉는다

  공복에 듣는 노래는 
  위산과다의 아침을 지나
  간밤 그녀의 손톱이 가지런히 내 승모근에 닿았던 흔적처럼 
  따끔거린다
  따끔거림은 간지러움을 동반해 차가운 귓불까지 이어진다

  덩어리가 되기 위해 엉켜야 하는데 잔뜩
  헝클어져야 하는데
  우린 매사에 너무 단정하다 깍듯하여 건조하다

  창문 밖 길고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이
  집과 집을
  사람과 사람을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떤 꿈들을 
  서늘하고 따끔하고 간지러운 노래로 한 올 한 올 꿰고 있다
  깊은 가을날,

황홀한 핑퐁

  컴백을 발표한 여배우가 레드카펫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적의 심장부로 침투하는 마타하리
  마타리꽃이 피었다 방가지똥 박주가리 괴불주머니
  해국과 함께 남단에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내리막길일수록 우아하게
  절대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아니 곤두박질쳐야 한다 
  핑!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한다 바닥에도 문은 있어 
  퐁! 그 문을 박차고 올라 다시 컴백을 해야 한다
  인기라는 거대한 시소를 타고 핑퐁을 즐겨야 한다 여름과 겨
울 사이
  꽃과 꽃 사이 무단으로라도 네트를 넘어야 한다

  가을은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이 슬픈 계절이다
  바이올린의 E선이 그렇고 옥탑방 나일론빨랫줄의 덜 마른
옷가지가 그렇고
  날마다 주가가 떨어지는 여배우의 얼굴이 그렇다
  추락을 견디는 시간이란 
  은퇴와 컴백을 반복하는 오만한 여배우처럼 아슬하다
  내게로 반쯤만 기울던 가을빛과 캐스팅을 기다리는 들꽃
  돌아올 수 없어 차츰 잊혀져가는 옛사랑도 가을 놀이터에 가
면 만날 수 있을까
  여배우의 낡은 어깨와 편편해진 가슴은 전성기 때의 기억으
로 또 한 번 
  사무치게 폭발할 것이다

  겨우 착지했다고 안도했을 때
  모든 걸 버리고 퐁! 튀어 올라야 한다 저기 수평선 너머 
  해가 기울면 달이 차듯 이곳에선 곧잘 주객이 전도된다
  보이다가 보였다가 어제의 조연이 오늘 주연이 되고
  오늘 만난 너는 어제의 네가 아니다

  가을이 붉은 치맛자락을 끌고
  하산 중이다

은밀한 기타

  토라진 라디오에서 어쩌다 옛 노래가 흐르면 창밖의 사람은
모두 내 사람이 되네 가늘고 긴 비의 손가락이 Dm Gm
A7......변치 않을 불멸의 코드로 지난날을 되짚으면 生은 수
많은 소리구멍을 지닌 거대한 울림통이 되고 풍경은 모두 은밀
한 노래로 옮겨 앉네

  는개는 오고 는개가 와서 피하고 싶은 빗방울 같은 것 내게
도 있었던가 싶지만 처음 내 몸에서 음악이 흐르게 하던, 푸른
부전나비처럼 여린 봄날의 코드를, 유혹으로 가득찼던 그 방
을, 두려움에 떨던 이십 촉 백열등을, 아무리 끓여도 익지 않던
냉랭한 꿈의 구들을 피할 수가 없었네

  참새 두 마리 줄 위에 앉아 술밥을 먹네 마음 뜨거워지네 뜨
거워진 마음이 산꼭대기에 닿으면 멀리 순결한 갯벌과 안개 낀
포구 너머 우리를 기다리던 예전 다방이 보이고 하얀 얼굴의 소
녀가 보이고 뮤직박스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던 장발의 디제이
가 보이네 

  너는 앉고 나는 서고 마주 흔들리던 눈빛이 탁자 위 성냥처
럼 조심조심 쌓여가네 쌓이는가싶으면 와르르 무너져버리네
쌓이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그러고 보면 매 순간이 음악이네
음악과 함께 늙어가는 일이네
  먹먹한 이름들이 속수무책 날아다니던 담배 연기 속으로 
  풍덩, 주저앉는 음표 하나
  비의 어쿠스틱이 날 울리네

낭가 파르밧의 돼지

  그러니까 한 번도 널 본 적이 없어
  너는 나였으니까
  내 안에 꽉 찬 네 몸뚱아리
  화양동 싸바리 골목을 지날 때
  등 뒤에서 종이 바르는 소리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때까지 접혀진
  압축된 욕망이 어딘가에 담겨지는 소리
  골목 끝 진미돼지국밥집
  펄펄 끓여 우려낸 뽀얀 눈물
  이열치열을 연습 중이었지
  너와 나의 지옥은 같고
  거창하게 촌스러운 내일이 뒤뚱거리며 뛰어다녔지
  부추 넣고 새우 넣고
  국물을 휘저으며 양파에 된장을 바를 때
  낭가 파르밧을 오르는 두 그림자 화면 가득히 펼쳐지고
  골목엔 추억의 종이들이 쌓여가지
  자신의 피눈물을 받아먹고 피둥피둥 살이 찌는 것들
  사랑하는 이가 조금 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자
  하얀 불덩이가 덮쳐왔지 머머리협곡을 지날 때
  가래 같은 비구름이 그르릉거리며 몰려왔지
  삶의 악천후는 새우젓 냄새나는 목구멍으로 꺼이꺼이 밀려
들고
  누군가의 진미돼지국밥집 찾기는 계속되지
  햄머질 소리가 카슈미르의 땅과 하늘을 울리고
  더 높이 추락하기 위해 오르고 또 오르고
  탐욕은 고드름처럼 턱밑까지 바투 자라나지
  오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듯
  불어터진 시간의 면발을 남은 육수 속에서 건져 올리지
  뚝배기에 담겨지는 풍경들의 체온이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
  미식의 기쁨도 잠깐 빙원의 햇살 속에서
  돼지는 죽어서도 결코 웃지 않지

우편함

  계단이 끝나는 곳이나
  문 열면 거기 아무렇게나 보이는 구석진 자리에
  그리움의 미니어처들이 있다
  다가가면 쉬 속내를 열어 보이는 
  층층으로 밀봉된 아파트 속의 작은 아파트
  가끔은 배달부의 붉은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템포의 노랫소리를 엿듣기도 한다
  당신도 들었으면 하는 음악이다
  외진 듯 외지지 않은 그곳에 두근거리는 꽃들이 산다
  어느 날엔가 모시잠자리가 찾아왔다
  유리창떠들썩파랑나비가 물땡땡이를 업고 왔다
  눈많은그늘나비의 침묵을 읽으려면
  두근거리는 꽃의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야 한다
  봉투를 뜯는 순간 내 몸의 일부는 이미 당신에게로 가 있다
  우화羽化하는 그리움과 함께
  한없이 느린 그대여 떠나라 
  돌아올 수 있는 곳까지만 떠나라
  나는 나를 잊기 위해 너를 기억할 것이다
  현실을 견인하는 것은 현실 아닌 것들이었다
  하이앵글 롱샷으로 바라 본 그리움의 집은 작지만 견고했다

늘 푸른 응급실

  사람들은 신중한 보폭으로 그곳을 찾는다
  푸른 링거병을 든 나무 간호사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피톤치드를 처방하는 의사의 얼굴은 깊이 아파 본 자에게만
보일 것이다

— 산 이 뚜 벅 뚜 벅 내 게 로 걸 어 온 순 간 먼 슬 픔 은 시 작 되 었 다

  하룻밤 사이 한층 다복한 꽃송이를 달고 선 산벚나무 아래
  그곳 어디쯤에 흘렸을 내 눈물의 부스러기들을 더듬으며 산
벚나무 하얀 꽃들을 올려다본다
  제 살로 초록빛 띠를 두른 리기다소나무 옆 
  길게 팔을 늘어뜨린 산벚나무 하얀 손이 어깨를 건드린다
  마주잡은 손의 감촉이 서늘하다
  서늘함 속에 따뜻한 미소를 담고 사는 이들의 방
  하얀 꽃잎 다섯 장에 서린 심연의 기둥을 들여다본다
  사라져 갈 것이다 그 꽃들, 사라져 영원을 돌볼 것이다

— 나 를 괴 롭 히 고 고 문 하 던 모 든 것 들 을 서 스 펜 스 라 고 하 자

  그때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노랫소리
  홀로 오는 이들은 허리춤에 노래를 달고 오기도 하는데
  기댄 사람, 누운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 마른 소나무 거꾸로 매달려 절벽에 의지하듯*
  한순간 몸을 열어 귀 기울이다 보면 아픈 시간도 금세 지나
갈 것이다
  늘 푸른 응급실
  곳은 따뜻한 밖이며 서늘한 안이다
  처방전을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잎 나뭇잎을 닮
았다

✽이백 촉도난

소망 헤어싸롱

  뿌리를 살려주어야 해요
  쓸쓸하고 윤기 없을 때도 최대한 뿌리를 살려 
  정중히 다시 세팅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볼륨도 끗발도 펑키하게 살아나거든요
  지독히 느슨해진 상태라면
  먼저 우스개나 너스레로 트리트먼트를 한 후
  사소한 인연의 롤로 정성껏 말아 주시면
  힘이 없던 것들 뽀글뽀글 피어난답니다
  마르고 푸석했던 것들이 마법의 린스 한 방울에 탱글탱글 되
살아난답니다
  오랜 시간 허연 파뿌리나 키우던 모지에서 무슨 신호탄처럼 
  검은 깃발이 불쑥 솟아나 자지러지기도 하는데요
  이것이야말로 봄의 페스티벌이죠
  뿌리를 살리는 일이란 
  불 꺼진 아궁이 앞에서 철 지난 타블로이드판 신문 한 뭉치
  돌돌 말아 쥐고
  검지를 한껏 튕겨 딴죽을 걸 듯 성냥을 그어보는 것
  거시기, 가버린 날들의 뒤통수가 납작해서 불만이신 분들
  때때로 거울 앞에 앉아 롯드를 감아주시면
  가장자리가 물씬 부풀어 오른 기가 막힌 컬이 나올 거예요 
  정수리에서부터 흐르는 멋진 옆 라인
  다시 꽃이에요
  간혹 뜨거운 콧노래로 포인트를 주시면 
  달콤 쌉싸름한 때깔 나는 열매를 맛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
니까 
  그 어떤 처음과 끝도 뿌리는 살아있어야 해요 아셨죠? 
  심하게 상한 것들은 까짓것 뭐 
  미련 없이 잘라 내시고요

풀밭 위의 책

  지렁이 한 마리 
  행간에 앉아 은일의 나날을 경작하고 있다
  세상에 나가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오늘은 빗방울이 와서 태워버린다
  빗방울 타오른 자리로 몸 낮춰 눈 기울여보는데
  삐거덕 청동 창이 열리더니 육두六蠹*가 펼쳐진다 
  벌겋게 충혈된 몸으로 부지런히 말씀을 새기고 있는 그가 보
인다

  비 그치자 토끼풀 사이로 
  여치 사마귀 메뚜기 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밭 위에 펼쳐진 책을 읽는데
  개미 한 마리 글자를 물고 바삐 길 밖으로 사라지고
  나는 성호학당 뜨락에 앉아 은일의 시간을 배운다
  그의 외로움에 내 외로움 얹어놓고 
  지극한 마음이 빚어놓은 청동 조각품을 오래 들여다본다

  풀밭의 주인은 꽃도 새도 아닌 
  지렁이가 숨어 있는 책
  소슬모란꽃문이 있는 작은 절집 같은 책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는 풍경 속으로
  키를 낮춘 바람이 찾아와 말씀과 뒹구는 곳 

  거기
  누구나의 발밑에 있지만 
  누구나의 마음에 머물지 못하는
  베고 누울 수 없는 소의 무릎 같은 그곳

  풀잎 흔들리고
  천천히 책장 넘기는 소리 들려온다
  소리 너머로 굽이굽이 꺾어진 길들이 보이고
  시간을 돌아 한 남자 꿈틀 기어나온다 

  ✽성호사설 인사문에 기록된 글

비틀거리는 잔

  술을 따르던 그가 상견암을 떠올리자
  잔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감정의 박자를 놓친 우리는 
  취하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비틀거린다는 것은 
  아직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인지
  중심을 찾아가겠다는 것인지

  이 쓰디 쓴 물이 얼마나 달콤하게 
  중심을 통과해 가는지 알게 되기까지
  우린 꼿꼿해야만 한다 팽이처럼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골목마다 비애가 넘쳐나고
  비애를 기억하는 술잔들이 넘쳐나고
  윤시내가 열애를 부르던 그 까페에도 
  내 두고 온 잔들이 비틀거린다
  
  다시 술잔을 채우던 그가
  자제암을 떠올리는데
  수심에 잠기는 창문들

  마음속 파쟁의 시간을
  서늘히 건너가는 오늘 날씨는
  다른 곳을 바라보던 널 
  바라보던 내 모습을 닮았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채찍에 휘둘리고 휘둘리며
  가 닿고자 하는 중심은 어디인가 

  문득 기억에서 깨어난 잔들이 
  중심을 잃지 않은 채
  뜨거운 노래를 게워내기 시작한다

  오늘, 
  자제암과 상견암 사이 
  참 많은 비가 다녀가셨다

  비
     틀
  거
     리
  며 

풀밭의 내일

  정금나무 이파리가 바람을 흔들면 
  누군가 꽃의 안색을 살핀다 
  연지벌레 울음이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건 
  풀밭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너와 앉았던 자리는 
  선인장 꽃밭이 되었다 
  사랑의 붉은 내력이다

  변비에 걸린 시간들이 까맣게 슬어놓은
  뒹굴뒹굴 느린 오후에 염소똥 찾기
  풀밭에서 우린 
  찾기 위해 잃어버린다

  기억이라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것들은 
  가지 않은 곳으로 좀체 가려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라는 불빛 아래 편지 봉투처럼 찢어지는 저녁의 괄
약근
  우리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에 목이 매여 있는지
  울음의 발신지를 찾아 흑백으로 돌아가는 시간

  나는 여전히 풀밭을 좋아하고 
  풀밭에 그을린 눈물을 좋아하고
  눈물이 빚은 정금주를 사랑한다 
  숨은 고삐를 찬양하고 
  시간의 뿔 속에 고통을 감출 줄도 안다
  숙변의 나날은 염소의 것이지만 염소의 것이 아니다

  풀밭 위엔 싸댈수록 훤해지는 얼굴이 있다
  환丸 같이 검고 땡글땡글한 어제가 있고 
  지속 가능한 추억이 음메음메 펼쳐져 있다

와운에 눕다

  아버지는 가지된장국을 잡수시고
  아버지의 아버지를 심었다 한다
  들었으나 듣지 못한 것들을
  만났으나 만나지 못한 것들을
  한 곳에 깊이 묻었다 한다
  산지소 계곡물이 따라와
  함께 울었다 한다
  슬픔은 자라 빛이 되고 
  어둠은 자라 노래가 되었다 한다
  지리산 천년송千年松은 千年頌
  부질없는 곡조가 마을을 먹여 살린다 한다
  허공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나무는 오묘한 높이의 성부聲部를 가졌다 한다
  오래 가다듬은 목소리로
  바람의 음역을 다스리며
  인연이 끝난 다음까지 노래 부른다 한다
  그 주소지에서 한때 세를 살았던 나그네는
  뜨거운 단절음을 남긴 채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나무는 소슬한 높이의 고독을 지녔다 한다
  와운 마을에 봄이 오면
  아직 녹지 않은 말들이 정령치 넘어 피아골로
  섬진강 줄기를 타고 넘나든다 한다
  거친 물줄기가 아랫도리에 새겨지고
  한 덩이 푸른 고요는 자꾸만 새끼를 쳐
  아주 구성진 곡절을 이룬다 한다
  영원령 벽소령 바람재를 지나
  붉은 말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빨강은 색이 아니라 한바탕 빛이 된다고 한다
  지빠귀 오는 가을이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녁이 펼쳐지고
  새들과 둘러앉아 달팽이 요리를 먹는다 한다
  삶의 아랫목을 그득히 데우는 바람의 허밍은 한아시* 이슬 머금은 장단에 
  밤새 할매송을 지킨다 한다
  여기 와운에 누워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사이다

  현관 앞에 기척도 없이 누군가
  칠성사이다 한 병 놓고 갔네
  알쏭달쏭한 세상
  보글거리는 마음 한 자락
  속으로 한참을 걸어들어가 보네
  길은 수시로 생겼다 사라지지만
  한 번도 굴헝을 다 보여주지 않네
  생각의 궤양들이 삐죽빼죽 돌기를 만들어
  의심과 의문 사이, 나와 사이다 사이
  차이와 차이 사이 사이좋게 존재하는 알싸함으로 찰랑거리네
  동굴의 맛은 
  낡은 관절을 톡톡 쏘아대는 노년의 맛
  칼을 갈며 이를 갈던 날카로운 순간들이
  주상절리로 펼쳐지네
  맵거나 뜨겁지 않은 것은 청춘의 맛이 아니지
  이제는 어떤 반찬과도 어울리는 순한 두부 같은 얼굴
  깊이를 잴 수 없는 미로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네
  천연 동굴 탄산 약수 한 모금 길게
  눈으로 마셔보네

사루비아

  아무나 쪽쪽 빨아먹다 
  버려진 여인이라고
   그 말이 길을 막아버렸지
 쉬운 길의 어려움을 항변하는
  가냘픈 꽃의 엉덩이가 슬퍼
  가을엔 초미세 아픔까지도 사랑하게 되지
  골목을 배회하는 바람은
  낯선 곳을 더듬는 재미로 살아가지
  아주 각별한 순간
  남자와 여자가 빠르게 몸을 섞으며
  쟁인 시간 속에 절여질 때
  날개를 괸 꽃은 철없는 열매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저녁은 핏방울들의 춤
  내면엔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그녀가 누군가의 허기진 영혼을 달랠 때
  적요한 실내에서 우린
  한 자루 모나미 볼펜과 씨름하지
  꽃은 속수무책의 달인
  초원의 갈비뼈를 지나 고통의 횡격막을 관통하는
  꽃은 피나는 기억
  백지白紙 위로 산발적인 어둠이 찾아오면
  서둘러 창을 열지

  아무것도 아닌 삶이 단단해지는 순간이 있지
  사랑은 패배를 위한 싸움
  그 무엇도 받지 말되 
  아낌없이 빼앗길 것
  지더라도 결코 패배하지 말 것
  그녀를 쪽쪽 빨아먹는 것은 
  꽃의 영혼을 지키는 일
  백지에게 희롱당하며 
  영혼을 빨리며
  사루비아는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우리 모두의 이름이지

그늘

  제 몸의 꽃들을 밀어내는 나무에게서 배고픈 세상에 밥이 되
는 꿈을 본다 꼬들꼬들 익어 뜸 들던 것들 윤기 나는 밥이 되
었다가 누룽지만 남았다 뜨거웠던 육신만이 누룽지로 남아 중
얼거린다 바람이 꽃을 따먹던 자리, 달빛이 어둠을 휘젓던 자
리에 적막이 집 한 채 지을 동안 어떤 노후는 묻고 싶으리라 한
번 더 끓어오를 수 있느냐고, 다시 밥꽃으로 피어날 수 있느냐
고, 이팝나무 꽃 진 자리 그들만의 넉넉한 밥상이 차려진다

말로야 스네이크

  어떤 풍경은 똬리를 틀고 앉아 
  뭉근히 날 건너다본다

  저수지 근처를 흘러다니던 
  마른 잠이거나
  홍가시 나무 마루장 위를 
  뛰어다니던 햇살이거나

  가까이 갈수록 보이지 않는 
  높은 담이 있어
  두 팔 잃어버린 구름 
  담벼락 밑을 서성인다

  안을 수 없는 것들은 
  기어코 기어서 오는데
  모호하게 다가오는 것들의 끝을 
  무엇으로 기억하나

  추억의 물방울들이 상하지 않도록
  마음은 뱀처럼 차가워져야만 하는가

  떠난 사람은 남고
  남은 사람은 멀리 떠나고 없는
  실스마리아의 계곡

  도망 갈 데는 많고 숨을 곳은 없는
  비가 우글거린다
  아직 
  아무도 젖지 않았다

왕릉의 꽃다발

  누가 놓고 갔을까 왕릉에서 만나는 꽃다발은 封印 같다 망
설임 같다 능의 주인을 불러내려는 듯 쓸쓸한 옛 무덤에 화사
한 온기로 내려앉은 꽃은 누구의 손일까 수줍게 내민 연애편지
처럼, 작별이자 해후의 인사말처럼, 편지봉투에 공손히 적혀 있
는 호칭처럼…… 내 마음속 여를 들여다보듯 낭산 도리천에 잠
겨있는 왕릉을 보다가 꽃의 마음을 읽는다 花鬼가 된 지귀의
마음일까 바람이 꽃이 되는 세월동안 휘어질 대로 휘어진 무덤
가 소나무들 그 갈필의 흔적에서조차 다정한, 그녀 이름은 김
덕만……이라고 안내판은 말하고 貴下……라고 꽃다발은 쓰
는데

뻐꾸기 세레나데

  뻐꾸기가 운다 식은 빵과 포도주가 차려지고 시간은 뻐꾸기
를 경배한다 사람들은 뻐꾸기 울음을 먹는다 시간의 족발을 먹
는다 뻐꾸기가 운다 포크를 놓친 눈들이 현관문을 비튼다 너
무 많이 비틀지는 않는다 뻐꾸기 몸속에 발랜스가 산다 언발
랜스가 발랜스를 흉내 낸다 아침이 저녁을 흉내 낸다 뻐꾸기가
운다 긴밀하게 운다 울기 전에는 뻐꾸기는 뻐꾸기가 아니다 입
만 살아서 몸이 시끄럽다 울어줘서 고마워, 뻐꾸기는 몸이 울
음이다 점점 짙어가는 자주빛 시간이다 뻐꾸기는 이제 울지 않
아도 운다 거친 비를 뿌리는 시간의 침대 위에서 사색은 늘 조
루였다 뻐꾸기가 외출을 한다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담
배를 물고 놀이터를 지나 신작로를 건너, 밤이 되어도 돌아오
지 않는 뻐꾸기, 나는 졸다가 뻐꾸기가 되었다 내가 운다 사랑
은 언제나 눈물보다 먼저 말라버린다

밤기차는 청강리를 출발해 청량리로 달려간다

  코딱지꽃이 피었다 발밑 가득
 
  듣고 싶은 말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밤마다 달을 보고 손을 흔든다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살았다

  불꽃은 언제나 그늘 속에 핀다

  요령껏 증오하면서

  새발의 피는 그러나 뜨거웠다

  神이 대신 말할 것이므로 그녀는 침묵하기로 한다

  저녁을 도둑맞은 저녁

  바늘로 뜬금없이 달을 찔렀다

  어떤 꽃은 순정 한 번 바치지 못한 채 늙어가고

  고통은 안에서 피어나 안으로 진다

  아주 못된 곳에서 착한 얼굴의 그녀가 왔다

  종려나무집에는 종려나무가 없었다

  클라이막스는 가장 낮은 곳에서 폭발하고

  밤기차는 청강리를 출발해 청량리로 달려간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봄날이 갔다

뿔들이 보이네

  이제야 그대를 보네
  가시를 품어 온 지난날이여
  탱자나무가
  먼지 이는 담벼락에서 
  온갖 더러움을 껴안은 후에
  흰 꽃으로 태어남을
  흰 빛은 흰 빛 이상의 것임을
  무고한 견딤의 빛임을
  알겠네 꽃은 가시보다 강함을
  꽃잎 속에는 바람이 지나간 길이 있어 
  온몸의 길들이 우네
  꽃을 피우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고
  저기, 이제 막 꽃봉오리 벙그는 사람들
  우는 듯 철없이 웃고 있네 
  눈물 흐른 뒤에야
  가시가 보이네 그대 머리 위
  성성하게 출렁이는 숨은 뿔들이 보이네
  뿔과 뿔이 사이좋게 충돌하고 있네

신갈나무

  용인 지나 옛집 가는 길
  손바닥에 낡고 그늘진 약도가 있다

  읽을수록 바스락거리는 길
  골탄을 껌처럼 씹으며
  골탕을 먹이던
  덜컹덜컹 맷집을 키워주던 길

  사유의 급발진에 놀란 연노란꽃
  방지 턱을 넘어 담벼락에 가 부딪힌다

  어긋난 길은 비틀대다 주저앉고 
  때마침 비는 생각의 가랑이를 씻긴다

  기억은 즐겨 변화구를 던지지만
  손가락을 베는 것은 칼끝이 아니라 백지 한 장
  상처는 고온다습해 쉬 탈이 나고

  판교 지나 옛집 가는 날
  손바닥에 밀폐된 나무 한 그루

  부전나비 애벌레가 머물다 간 톱니모양 이파리
  마음을 베는 것은 그 이파리 한 장

무덤의 형식— 굴업도에서

  어떤 최후는 시든 꽃다발처럼 버려진다
  산허리를 맴돌고 있는 안개는 꽃들의 영혼
  종일 자신의 최후를 배회한다

  목기미 해변의 닻무덤 같은 
  최후의 최후가 흩어져 있는 후덥지근한 시간 속에
  그것이 그것인줄 모르는 사람들이 
  덕물산 아래 산게처럼 꼬물거린다

  죽음의 내향성 발톱이 삶을 파고드는 현장에서
  안개가 안개를 부르고
  안개가 안개를 왜곡하고 희미하게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안개의 무의식 
  안개의 습관 같은 것

  언덕에 오르자 누가 4절지 바다를 불쑥 내민다
  꽃들의 유대에 대해
  안개의 옅은 유머에 대해
  들러붙어 꼬물거리는 속삭임들에 대해 
  마음의 찌불을 드리운다

  야생사슴의 탈각된 뿔이 또 다른 생을 살고 있는 개머리 능선 
  너머 너머로 달려가 
  어느덧 소사나무 숲에 다다르는 바람 속에도
  가만히 봉돌을 던져 본다

  큰천남성 이파리가 이토록 영롱한 까닭은
  발아래 하늘이 있기 때문
  닻이 꽃으로 피어났듯
  꽃의 닻들이 다시 먼 항해를 시작하는 
  아련하고 따뜻한 사빈들

  무덤이라는 삶의 형식을
  최후의 해후를
  날 범하던 그 입술로 노래하는
  바다 밖으로 돌돌돌 삐져나온 파도 한 자락
  형식은 형식으로 파쇄된다

질주疾走

  사내는 새가 되고 싶은 게다 
  시속 이백킬로미터의 도로는 그의 하늘 
  빨간색 브이알 오토바이가 바람의 혈맥을 건드리며 날아오
른다 

  피 묻은 하이바엔 부드러운 깃털을 세우고 은색 짐바리에는
한 이름이 또 한 이름에게 건네는 
호외를 싣고 
  비상하는 저 사내 
  허공을 짚은 다리 사이로 칼집이 번득인다 칼집 깊숙이 아마
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부리를 숨기고 있을 게다 

  마음의 곡률에 따라 가끔은 기우뚱대기도 하면서
  몰입과 이완의 틈바구니로 슬쩍 미소를 찔러 넣은 채 
  바퀴살의 맹렬한 상상 속으로 내처 잠입해 들어간다 

  허기진 길들은 바퀴에 쩍쩍 들러붙다가 때로는 빗방울 타는
소리를 내다가
  속력이 빠를수록 쾌감의 순도는 높아지고 쾌감의 극치에서
드디어 한 이름을 불러낸다
  붉은 바람이 사내의 날렵한 승모근에 촉촉한 질감으로 내려
앉는다 사내에게 속력은 행복의 단위이자 파비날이다
  호외의 아침을 꿈꾸며 처녀림의 바다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쌩떽스의 창공을 통과해 당신도 그렇게 달려오고 있는 걸까
  당신의 속도와 내 기다림의 함수가 빚어내는 저 아득한 비순
환 소수의 행렬을 바라본다

  거리엔 무한 사정을 꿈꾸는 죽음의 퍼포먼스가 날마다 펼쳐
지고
  당신을 만나지 못해 나는 늙을 수도 없는데 입술을 쪼아대
던 새는 애인의 몸속에서 밤새 날개를 뒤척일 것이다

Q의 사생활

  그 바닥에서 이십팔 세는 환갑이라고 하네
  그 바닥에서 삼십삼 세면 노장이라 하네
  삼십삼 세의 술래놀이꾼과 이십팔 세에 
  환갑을 맞이한 룸싸롱 마담은 그 바닥을 떠나야 
  나이를 되돌려 받는다 하네
  짜릿한 손맛을 잊어야 비로소 
  사는 게 사는 거라 하네
  끝없이 추락을 즐기는
  바닥도 바닥을 모르는 바닥
  바닥난 몸을 풀며 흘렸을 땀과 웃음
  신기루 같은 나이의 운명을
  바닥은 알고 있다 하네
  폭삭 속고도 또 속아주는 나이
  빈털털이가 되어 다시 행복해지는 나이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보는, 
  실패와 성공은 이란성 쌍둥이임을 아는 나이
  투명한 물속을 홀로 지그시 바라보며
  바닥의 허풍과 교만, 생리와 전략을 짐짓 모른 체
  끝까지 비밀을 캐다가 무참히 아웃 당하면
  슬픔이 스폰서가 되어주는 나이
  나이가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나이도 바닥이 주는 선물임을 알게 되는 나이
  이렇게 저렇게 바닥의 내력을 진술하다보면
  바닥에서 첨벙 물소리 들린다 하네

웃음의 과녁

  그가 웃을수록 그녀는 화를 낸다
  왜 웃느냐고
  언제부터 웃기 시작했느냐고
  웃음의 빛깔에 대해 모양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쓸수록
  웃음은 무성해진다
  아구아구 마구 뼈째 씹어 먹는 웃음의 패러독스

  분노가 쓴웃음으로 번질 때
  질투가 비웃음으로 둔갑할 때
  솔개가 장닭을 채 듯 슬몃 입가를 스치고 가는 그것

  슬픔도 파안대소할 때가 있다
  마음을 꽁꽁 숨기고 싶을 때도
  피식피식 그것이 샌다

  가을이 오면 헤실바실 단풍 지는 모습을 보게 될까
  그것의 성분이 눈물임을
  누군가를 향한 질문이며 고백임을 알게 될까

  웃음의 촉감을 귀로 더듬어 보는 밤
  꽃이 웃고 있다
  길을 잃고 비틀거릴 때
  꽃의 미소가 중심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녀의 반달 눈웃음이 활이라면
  소리는 시위를 떠난 화살

이로당에서 월정명을

  꽃처럼 돌아앉은 그가 대금을 든다
  저고리 화장을 낭창히 떨며 한 호흡을 베어 물자
  는개가 찾아왔다
  장차 왕이 될 아이와 별시를 보던 학동들이 구름판을 밟고
뛰어오르고
  비는 오랜 잠을 씻는다

  밤이 소원을 빌 듯 기왓장에 스미고
  아이의 아버지는 흰 글씨로 주련을 단다
  선율에 그을린 밤이 마음의 밑동을 적시면
  운현궁 호두나무 잎사귀마다 비의 지문이 새겨지고
  죽마를 타고 온 사람은 대답도 없이 한 평생을 쏟아낸다 

  노래는 다시 몇 소절을 묻고 또 묻고
  시간은 별처럼 흩어져 간다
  너 또한 죽어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고즈넉한 소리의 빈소로 찾아와 묵향을 채우리
  완월의 새들
  여운의 탯줄을 자르지 못하고

  잠복한 슬픔이 사선으로 뛰어내려
  굽이굽이 발목은 시린데
  허공에 묻은 소리의 얼룩들 달무지개로 떠서
  사람들은 나방처럼 빛의 벼랑을 읽는다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들이 뒤엉켜
  여름밤은 비대해지고
  나는 이로당 뜨락에 앉아 월정명을 듣는다
  대부송 아래 숨은 달을 만난다

비싼 똥

  똥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되네
  똥 중에서도 아주 비싼 똥
  긴꼬리사향고양이똥이 그렇다네
  녀석의 생식기와 항문 사이에 무슨 샘이 있어
  영묘한 향이 나오는데
  내 안에도 그런 샘 하나 있었으면

  똥 중에는 고양이 똥이 가장 구리다는데
  고양이 똥으로 만든 커피가 그토록 향기롭다니
  녀석의 몸 안엔 신묘한 길이 있어
  커피 열매가 익을 무렵
  그 몸이 필터가 되어 신맛, 구수한 맛
  그것들을 걸러내는 희귀한 손맛까지
  이 기막힌 쓰리쿠션을 즐기려고
  사람들은 똥줄이 탄다네
  녀석의 향기로운 식성이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고

  똥내와 향기의 간극이
  생식기와 항문 사이만큼 지척이라는 사실
  욕구는 치욕의 경지를 우아하게 넘어섰네
  어느 변설가의 입처럼 요란하게 구린
  그러나 삶의 쓴맛이 풍미를 더하는 들큼한 오후
  그 이름도 야릇한 야생 고양이 루왁
  우왁, 가격표에 놀란 가슴이
  잡다한 말의 배설물 속에 앉아 커피를 마시네

  채 삭히지 못한 말이 향기가 되는 순간이 있네
  뜨거운 잔속에 진실이 담겼든 거짓이 담겼든
  말의 생식기는 더 이상 은밀하지 않고
  실없는 호기심에 똥구멍만 찢어지네
  맨 처음 고양이 똥에서 커피를 궁리해 냈을 생뚱맞은 손과
  녀석의 항문에서 내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먼 길이 궁금할 뿐이네

네 것이면서 네 것이 아닌

  눈을 가늘게 뜨고
  냄새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더듬어 보아요
  냄새가 먹어치운 기억들
  냄새 너머의 냄새

  멀리 갈수록 풍미를 더해요
  기억을 공명시키고
  펀치를 날려요
  우리는 냄새의 혼혈이 되죠

  사랑이 어떻게 기억을 간직하는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날 어떻게 추억하는지

  기억은 점점 어려져
  체취가 주는 정교한 두려움을 사랑이라 믿어요 어쩌면 
  서로의 기억 속에 냄새의 박물관을 짓는 일

  수천 수레의 나무와 바람과 햇살을 지나
  꽃잎이 지는 속도로 우리 잊혀져갈 때
  체취의 비밀만이 끝내 떠나지 못하고 곁을 지킨다는
  이 비릿한 사실

  냄새에 속고
  냄새가 먹어치운 기억에 속고
  어차피 사랑은 제대로 속는 것
  속았다는 걸 까마득히 잊는 것
  잊은 척 하는 것

소문난 돌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다지
  에콰도르 아가씨의 피부 빛을 닮은 돌들이 산다는데
  바람 잘 날 없어 뻥뻥 구멍이 뚫린다지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밑동에도 돌들의 에피소드가 쌓여
가고
  밤마다 비명이 쏟아진다지
  진정한 구멍은 멀리 있을 때 더 또렷이 보인다지
  어떤 이는 그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잉크 빛 길들은 구멍에서 구멍으로 끝없이 흘러다닌다지
  누구는 상처라 하고
  누구는 흉터라 하고
  힘을 쓰든 꾀를 쓰든
  한 번 생긴 구멍은 메울 수 없다고 하지
  구멍가게에 꿀방구리 드나들듯 개구진 파도가 남실거리고
  여름이면 여행객들이 구멍을 살피러 모여 든다지
  돌과 돌이 붙어먹는 현장에서
  구멍을 파며 다짐 한다지
  여행하는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독자가 되기도 하고
  고독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기도 한다지
  가슴에 구멍이 난 것들은 쉬 무너지지 않는다고
  권태라는 말의 구불거림과 지그재그를 

풍죽

  흘러가는 것들은 이름이 없다
  말하려는 참이다

  뗘도는 것들 속에서
  나무는 나무의 배경
  띠풀로 엮은 누각 너머
  감또개를 먹는 그림자들
  그림자의 배경은 그림자
  바람에 맞설 이유란 없다

  이유 없는 이유만이 있을 뿐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창의를 입고 윤건을 쓴 선비가
  나무 아래 있다
  저쪽으로 건너가려는 참이다

  바람 속에 얼마나 많은 비가 예비 되어 있는지
  댓잎 끝은 왜 바람의 왼쪽에 있는지
  한결같은 질문의 답은 몰라도 좋다

  그려진 바람이 
  바람 아닌 것들의 몸을 빌려
  부재를 증명하는 동안
  구름을 바위틈에 새겨놓고
  막 돌아서서 누군가를 부르려는 참이다

  바람의 피가 묵죽 가지에 번진다
  느닷없는 비가 생을 분절시키듯이

뒷모습을 빌리다

  동이포루 난간에 기대앉은 
  한 움큼의 고요는 누구인가
  앉은 채로 떠내려가는 섬 하나

  그 섬이 날 뒤흔들 때 
  밖은 축소되고 안은 비대해진다 
  거친 물줄기가 등 뒤에 새겨진다

  비굴한 이별과 합리적 상처로 가득한 뒷모습은 
  차디 찬 이미지의 따뜻한 능실陵室 
  나는 그를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각 그는 나의 주인공 
  저 중무장한 무채색의 항명을 음악이라 우긴다면
  아마도 서주부는 오랜 망설임
  휘저을수록 끈끈해지는 침묵 사이로 머뭇머뭇 비가 내린다
  외로움의 극지에서 내리는 비는 
  피의 길로 온다
  응답을 받지 못한 비의 전사들이 
  내 안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지난날을 송출할 때 
  너는 비스듬히 포개 앉아 숨은 별의 박동을 듣는다

  동이포루와 동이치 사이
  수원 화성 돌담길을 천천히 걷다가 
  동장대 지나 구절초 꽃밭에 나란히 앉는다 

  지금쯤 천진한 양들이 풀을 뜯겠지 
  아프지 않기 위해 아파하겠지
  초스피드의 지루함으로 어두워지겠지

  오랜 아픔이 음악이 되어 흐르는 동안
  비스듬히 기대앉은 저 뒷모습을 훔쳐와 
  지동시장 순대국밥집 유리창에 
  밥풀로 가만히 붙여둔다 
  빌려서 노래하고 갚지 못한 것들이 아득하다

감은 눈— 오딜롱 르동의 그림 앞에서

  종소리는 지금 
  어느 저문 가슴을 타공 중일까
  소리를 떠나보낸 종은
  묵묵히 돌아올 소리를 기다린다

  느린 바다가 흐르고
  여인은 물속에 반쯤 몸을 담근 채 
  비스듬히 눈을 감고 있다

  따뜻하고 차분한 물은 여인의 가슴께에 오래 머물고
  생각은 깊은 곳에서 마구 헝클어지고 미끄러지는데

  그곳은 
  감은 눈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저녁 눈동자로 가득한데

  공기처럼 물처럼 
  불가청성의 음악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 이제 그만 저 바다의 대님을 풀고 싶다

  녹슨 안개가 낡은 절집처럼 서 있는 곳
  찾아 올 궁극의 애인을 위하여 
  무릎 꿇고 눈을 감는 사람들

  눈 감으면 환해지는 얼굴이 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병을 어쩌지 못해
  슬픔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감은 눈 속에 착지하고
  이내 침몰하는 아침을 맞는다

  기억은 허물고 다시 짓는 집
  너와의 이별이 슬프지 않아 몹시 슬펐던 그 밤도
  파도꽃 피던 창가의 아침도
  모두 잊혀지면서 무연히 조립된다

  큰 종이 울면 작은 종이 따라 울고
  이 우중충한 기쁨을 위하여
  눈물의 옹이들이 망각의 대서양에 금빛 기둥을 세울 때까지
  어깨를 드러낸 채 나도 잠기고 싶다

  죽음은 삶의 선명한 배경
  살아서 늘 눈 감던 것들
  죽은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뜬다

  어느 날 여인의 품에서 종이 울리면
  누군가는 마침내 눈을 뜨리라
  빛을 향하여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빛의 수영장

  물의 꽁무니에 악동들이 있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풀장 벽면에 박동 리듬을 그리는 한낮

  뛰지 않을 수 없어
  달리 요동치지 않을 수 없어
  미끄럼주의 표지판 밑을
  生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모르는 아이들이
  첨벙첨벙 지나간다

  물방울이 튀어오를 때마다 중중무진 기록되는 빛의 그래프
  그것은 누구의 심장인가

  줄여야 마음껏 넓어지는 공간에서
  사우나 번호 키 발목에 찬 빛의 어버이들이
  더 이상 바랠 수 없는 낯짝으로 앉아
  부딪쳐 깨짐으로써 풍성해지는 소리의 입자를 바라본다

  흰 타일 벽은 물의 허기와 집착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순하게
젖어
  저녁이 아이들을 먹어버릴 때까지
  빛의 계면을 넘실대는 포말들을
  그 불연속의 미래를 기록 중이다

  떠돌던 빛이 하나 되어 저녁으로 온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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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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