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귀

정진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말년이다 돌담을 쌓는다 서로 다른 돌들이 서로 만나서로 든든하다 비인 틈을 용케 닮은 것들이 서로를 채운다 더군다나 소색인다 햇발이 소색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돌들이 소색인다 속삭인다가 아니라 소색인다 더 은근하고 부드럽다 소리로 서로 만진다 여러 곳에서 발품 팔아 주워 온 강돌들이다 쌓는 정성도 정성이었지만 여러 강물로 씻긴 것들이어서 소색이는 물소리가 다르다 흐르는 굽이가 서로 다르다 빛깔도 다르다 이 소리들로 이 굽이들로 이 빛깔들로 나는 한 소식 할 작정이다 연주회를 열 작정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실체의 발견發見이다 아직 덜 받아 적었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햇살 속에서 내는 한 소리만 영랑께서는 결로 보이며 햇발같이 적어 주셨지만 한밤의 소리를 받아 적노라면 밤을 꼬박 새워도 몸이 가볍다 새벽 먼동으로 몸이 트인다 촉촉하게 담을 넘는다 젖어 있는 햇발을 새벽에 보았다 촉끼**라는 말씀을 비로소 만졌다 보은 송찬호네 대추 마을 앞 강물 것도 있고 이성선이 밟으며 떠난 설악 계곡의 것들도 있고 담양 소쇄원 앞 강물에서 댓잎 바람 소리로 씻기던 것들도 있으며 내 생가生家 마을 보체리 앞 개울, 한겨울에도 맨발 벗고 건너던 막돌들도 있다 당신의 꿈결을 흐르던 강물에서 건져진 것들도 있다 태 끊고 맨몸으로 태어난 것들도 있다 다만 나의 돌담 안에 모옥茅屋 세 칸 반 들이고 내 신발 한 켤레 댓돌 위에 벗어 두었다

  ✽영랑永郞. 《시문학》 2호(1930. 5)에 <내마음고요히고흔봄길우에>로 발표. 
  ✽✽촉끼 : 슬픔의 가락 속에서 피어나는 싱그러운 음색의 환한 기운(미당未堂)

願往生歌

  즐비櫛比하였다 목 달아난 석불들이 줄로 서서 국립 경주 박물관 본채가 뒤로 넘어갈 것 같은 경사를 버티고 있었다 봄날 늦은 오후, 나도 목이 달아난 내 몸뚱이 한 채를 그 끝자리에 세웠다 어디 보존할 데를 찾지 못해 그간 헤매이다가 여기 와 한 자리를 겨우 세 들었다 뒤로 넘어갈 듯 갈듯 비알지고 있는 내 몸이 가담되었다 나의 낡은 경주 박물관이 구원되었다 목 달아난 내 몸뚱이가 어디 한두 채뿐이었겠는가 아직 싱싱한 그 눈웃음과 입술 미소가 살아있는 그림자로 내 이승과 저승 사이를 원왕생원왕생願往生願往生 드나들고 있는 모가지여, 모가지여 직전直前의 것만을 허락받았다 이 산천 저 산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이끌고 온 갸륵한 소모消耗여, 직전의 것만을 비인 자리를 허락받았다 슬픈 행복이여, 봄날 해질 무렵 원왕생원왕생 범종梵鐘이 울었다

  ✽국립 경주 박물관 뒷 뜨락에 목 달아난 부처들이 수십 채 줄로 서있다.

모르는 귀

  인왕산으로 가는 북촌 골목 한 흰 벽에 모르는 귀,* 귀가 하나 잔뜩 걸리셨어요 귀만 남으셨어요 바쳐진 소모의 얼굴들 귀로만 남으셨어요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진종일 걸리셨어요 젖꼭지도 없이 당신의 젖꼭지를 진종일 빨았으나 무엇 한 모금 넘긴 바 없어요 넘겨주신 것 하나 없이 머언 모래밭 모래알들만 그들의 그늘만 낙타도 한 마리 없이 버석거리게 하셨어요 <모르는 귀> 당신이 듣고 있는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중이신지 잔뜩 하얗게 걸려 있긴 마찬가지셨어요 모르는 귀로 잔뜩 밤샌 날 새벽 그간의 내 시편 몇 행 겨우 읽어 오음五音을 떨게 해 놓고 내 귀청이 트이는 걸 건드려 놓고 나 오늘은 열심히 네게 가지 않았어요 모르는 귀, 너만 우거지기 때문이었어요 나만 지워지기 때문이었어요 오, 무서워요 모르는 귀, 잔뜩 지워진 내가 들려요

  ✽<모르는 귀>: 정서영의 조각. 2016. 8. 26. 선재 미술관 오픈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정진규 시집, 2015. 3. 30. 중앙북스

그릇과 가지치기

  아내는 이 늘그막에 우리 집 그릇들을 새것으로 모두 싸악 바꾸었다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는 간장 종지까지 새 것으로 싸악 바꾸었다 이 봄에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했다 이 늘그막에 우리들 그간이 금 간 데 없이 싸악 지워졌을까 입맛도 싸악 바뀌었을까 나는 겨울 가고 봄이 깊어지기 전 우리 집 마당 나무들 가지치기를 제대로 했다 나무 의원이 다녀가셨다 그가 놓고 간 가윗날 살펴보니 예사 것이 아니었다! 심검당尋劒堂*이여, 가지와 허공의 향방을 애초대로 짚고 지나갔다 바람 불고 지나간 자리마저 다듬었다 웃자란 자리만 잘라내었다 자른 자리없이 잘라내었다 분별이여, 그대 아득히 떠나간 자리, 심검당尋劒堂이여

  ✽심검당尋劒堂: 큰 절엔 거의 심검당이 있다. 수덕사修德寺의 말사 개심사開心寺의 요사체 심검당이 유명하다.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창건, 두리기둥 그대로 있 다.

은어사銀魚寺

  새 똥 속에 캄캄하게 숨었다 나온, 복분자 열매 속에 새까맣게 숨었다가 나온 그걸 찾을 수 있겠니 씨, 거기서 죽었다가 나온 그런 무덤의 정체正體를 알 수 있겠니 새 한 마리와 복분자 열매 하나가 함께 몸 섞어 생산한 생살을 만질 수 있겠니 좀체 네게 나를 보이지 않고있는 힘겨루기, 내 그리움이여, 그렇게 새까맣게 여물고 있는 씨, 살 내리고 있는 내 그리움의 생살이여, 나 이번 멀리 지중해 나가서 배 타고 나가서 튀어 오르는 물고기 한 마리 겨우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썩는 사과 향내

  혼자 살다 죽은 김판식이 문패가 한 달 넘게 그대로 붙어 있다 김판식이는 세상을 떠나고 판식이네 집만 그대로 남아 있다 판식이는 과수원 주인이었다 그 앞길을 준재가 아침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면사무소 안내원으로 출근을 하고 판식이 아들이 관리인에게 과수원을 맡기고 난 다음 덜 팔려나간 사과들이 창고에서 썩고 있는 향내가 마을에 넘치고 있다 죽은 김종삼 시인이 만지면 금방 썩어 났다던 그의 개성 과수원 사과들을 생각나게 했다 김판식이 일을 하고 낮잠을 자던 과수원 그 작은 방, 그가 피우던 담배 갑엔 두세 개 담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어서 실겅에 소중하게 얹어 놓았다 그의 과수원의 사과 향기와 구겨진 담배 갑이 그리고 그대로 아직도 걸려 있는 문패가 진종일 마을에서 무슨 말로 서로 만나고 있는지 죽은 다음엔 사과 향내도 구겨진 담배 갑도 걸려 있는 문패도 그저 그것으로 남을 뿐인지 죽은 김종삼 시인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도 대답을 못했다 다만 일찍이‘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 대답해 두었다 하였다 놀랜 것은 혼자 살다 죽은 판식이도 이북以北서 김종삼처럼 월남한‘ 민간인民間人’ 아버지를 뒷산에 모셨다 하였다 그런 교섭交涉이 은유의 실체로 이미 약정되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사과’였다 썩는 사과의 향내였다 늘 알고 보면 그러하였다

서글펐다ㅡ환멸의 습지에서 가끔 헤어나게 되면은 남다른 햇볕과 푸름 이 자라나고 있으므로 서글펐다.(김종삼 <평범한 이야기>, 《신 동아》 1977. 2. 이숭원 발굴)

  이렇게 기인 머리 인용문을 달고 있는 것을 내 시에서 본 적이 있는가 <서글펐다>가 사무치게 좋았기 때문이다 환멸의 습지가 내 시의 자양으로 늘 거기 있었으므로 그걸 헤어나는 게 내 시였으므로 사랑을 해도 늘 그와 같았으므로 그게 늘 햇볕 공터와의 만남이었으므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었으므로 번외番外로 오는 남다른 것이었으므로 푸르다기보다는 늘 초록으로 거기 깔려 있던 것이었으므로 그날 이후 꾸역꾸역 몰려오는 충만이었으므로 <서글펐다>가 사무치게 차올랐기 때문이다 황홀과 서글픔은 한 몸이다 눈물이 났다 너와 나만의 보석이었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무슨 슬픈 일 좀, 일 좀 있어야겠다>* 미당은 그걸 벌써 아득히 매만지고 있었다 겨우 더듬거려 말하고 아련히 떠나는 그의 뒷등에 부는 가을바람이었다 아득한 배고픔이 나를 먹여 살렸다

  ✽미당, <봄>

외기러기 한 마리

  한밤에 혼자서 날아가는 맨 꽁무니 허공 묻은 외기러기 냄새, 별들 건드리고 지나와 별 냄새도 묻어난다 반짝거리는 냄새다 최승자 시인이 점성술에 빠져서 다녀왔다는 특히 그 별의 냄새가 묻어난다 내게는 이런 일들이 매우 큰 사건이 되었다 성중천性中天이다* 외기러기가 외기러기다워지고 별들이 별들다워지는 냄새의, 문향聞香의 시간이다 귀가 열리는 시간이다 내 우주 사업이 첫 로켓 발사를 끝낸 시간이다 한생 내 안에서 실은 이리 일어서고 저리 지워지는 개업과 파업의 우주 사업은 여러 유형으로 출몰하여 왔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성중천 맨 꽁무니 외기러기 한 마리 네가 오늘은 바짝 내 곁에 다가와 날고 있다 앞가슴 속털이 날린다 내 온몸이 쓸 만해지고 있다

  ✽성중천性中天: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 추사秋史 불이란不二蘭 제발題跋

나무여 나무여

  그냥 그대로 지나갈까 보아 지켜 서 있는, 그날 그 자리 떠나지 않고 줄창 거기 서 있는, 기다림의 우듬지로 허공을 빠듯이 채우는, 한겨울에도 떨리는 우듬지 속털로 키를 높이는, 기다림의 뿌리로 땅 속 새끼 발끝마저 곤두세워 보태는, 나무여 나무여, 내 남루의 등짝 등 돌려세우는 키 큰 기다림의 나무여, 그간 허공에 쟁인 너의 키를 눕히면 그냥 내게 와서 닿고도 남는, 열 뼘이나 더 남는 키여, 가 보았자 겨우 여기였구나 그간 객지서
 건드린 헌 계집도 버리지 말란다 뒷방 벌써 비워두었거니 영산홍 한 그루도 창가에 심어 두었거니 마음 놓고 어서 돌아가잔다 돌아가잔다 나무여 나무여, 네가 심어 두고 떠난 나무여

큰 나무 방석

  우리 집 느티는 하늘땅 오르내리는 새들의 거처요 나의 방석이다 저녁이 오면 창 너머 건너와 큰 그늘로 지 방석을 미리 가져다 놓고 저를 기다리게 한다 깊게 거기앉아 나를 뎁히는 너의 체온, 창 밖 한 마리 새의 경로도 새로 보인다 기다림은 체온의 기억이다 당연한 기다림은 몸이겠지만 마음이 향도가 되어 길을 낸다 큰 나무는 제 자리를 비워 놓고 제 비움을 채우게 한다 마악 날아와 앉은 새의 가지가 그만큼 흔들린다 큰 나무 가지가 허공을 채워가는 고요의 우듬지를, 생장生長의 곡선을 오늘도 가득 눈으로 만졌다 한 마리 새로 가서 거기 앉았다 저린 몸 견딜 만하면 허공에 곱게 꽃으로 상감象嵌 되었다

점자훈민정음點字訓民正音

  내 눈이 많이 멀었다 기대기 시작하였다 점자點字에 대한 정답 내기를 내 시와 함께 먼동이 틀 때까지 꿈속의 꿈까지 드나들며 진행하였다 헛수고였다 첫날은 실패했다 둘째 날은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어려워 기댈 곳을 찾아 떠났다 문득 떠오른 곳이 나와 수십 년 원왕생 원왕생願往生願往生 내왕해 온 칠장사七長寺 뒤뜰 나한전羅漢殿, 착한 나한님들 일곱 분이셨다 날밤 새운 사흘 만에 겨우 응답을 주셨다 그거야 점자點字는 관음觀音이시지, 오돌도돌 손끝으로 보니까 오돌도돌 보는 소리가 나니까 관음으로 터득하셔야지 나한님들은 그게 부처의 글씨라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읽어내는 견성見性의 소리, 오돌도돌 공부하라고 착한 귓썀을 냅다 쎄게 치셨다 귓썀 덕에 내 점자點字의 눈이 번쩍 관음觀音 안경을 썼다 내가 심어 가꾼 연꽃의 충만을 만나러 갈 때이다 오돌도돌 만나러 갈 때이다 그가 천수千手를 내밀고 있다 내가 쓴 열일곱 권의 시를 직방直房 오돌도돌 연꽃으로 만나야 할 때이다 점자가 점자를 지워낸 점자가 되어야 한다 오십 년 넘게 건너온 아내가 거기 있다 아내가 아내를 지워낸 아내가 거기 있다 색깔의, 소리의, 향기의, 맛깔의, 살결의 한몸, 오돌도돌이 거기 있다 마스터폰에도 점자 문자가 뜬다 오돌도돌 문자가 뜬다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세종대왕께서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 오돌도돌 점자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셨다 내눈이 많이 멀기는 멀었다 자알 멀었다

벼락이여, 들치기여

  영혼에도 오른쪽이 있어서 오른쪽 가득 마악 피어나던 옹아리꽃 한 송이, 들치기 오토바이 한 대가 날랜 솜씨로 훔쳐 달아난 가속도, 그 뒷자리를 나도 가속도로 뒤쫓아 오토바이를 몰다가 몸을 상했다 특히 오른쪽 대퇴골이 부스러졌다 영혼의 수리修理를 위하여 우리 사람들은 사랑의 절대를 자산을 삼는 기특함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수리공으로 부스러진다 나의 대퇴골이 그 물증物證이다 그러나 네 영혼의 그 가해자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네 영혼의 이쁜 어금니 하나 흘리고 서둘러 도망친 네 가해자의 오토바이가 그 가속도의 행방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내 부스러진 대퇴골도 속수무책이다 상처의 내 오토바이가 한 영혼의 기슭에 쓰러져 가속도로 녹슬고 있다 그간 네 예쁜 그 영혼의 어금니 하나 손아귀에 꼬옥 쥐고 내 육신이 무슨 교신을 해 왔던가 무슨 상처의 옹아리꽃을 다시 피웠던가 상처뿐인 내 오토바이여, 상처의 가속도를 무엇으로 터득했는가 상처를 무슨 칼날로 대패질했던가 쌓이는 너와 나의 대패밥이여, 놀라워라 대패밥이 다시금 피워내던 상처의 옹아리꽃 한송이여, 궁극窮極이여 궁극窮極이여, 거기 있었구나 가해자가 바로 너와 나라는 걸 우리가 서로의 들치기라는 걸 겨우 짐작 턴 날의 벼락이여, 벼락이여 네 예쁜 영혼의 어금니 하나여, 날랜 들치기여 들치기여

내 지팡이는 復古가 아니다

  천만에, 아내는 날더러 걷지를 않는다고 성화지만 그렇다면 저 지팡이들이 왜 저리 쌓여 있겠는가 그만큼 원거리를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고 지팡이들은 말한다 내 지팡이들은 경계를 안다 경계와 경계의 거리가 있다 지팡이는 복고復古의 냄새가 나지만 내 지팡이는 복고復古가 아니다 내 가장 큰 두 개의 현관玄關을 저 지팡이들이 지키고 있다 지팡이 항아리가 내 첫 번째 현관玄關을 지키고 있다 나의 석가헌 이별 길은 언제나 귀환 길로 되어
있음이 돌아오고 있음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서 혁명이 없지만, 원점은 혁명 귀환이 아니지만, 오늘도 표천공 할아버지 산소로 해서 보체 연지蓮池로 해서 봉구재 들녘으로 해서 나의 느티나무 현관玄關으로 그 음예陰翳 로 씩씩하게 돌아왔지만 혁명이 보이지 않지만, 두 개의 현관玄關만이 아니라는 걸 다시 알았다 발견이다 그 지팡이들 발바닥을 살피다가 알았다 여러 개의 현관이 묻어 있었다 혁명의 상처가 묻어 있었다 새들의 현관玄關, 구름의 현관, 꽃들의 풀잎 이슬들의 현관, 내 생가生家의 현관, 지렁이들의 현관, 또 한 여자의 현관을 건드리기 시작했구나 입술들의 현관, 원거리였다 나날의 새 현관玄關들 그들 속에 혁명들이 우글거렸다 내 지팡이엔 경계와 경계엔 혁명의 상처들이 물들어 있었다 원점에 당도해 있지만 내 지팡이 잔등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늘시비詩碑

  시론가 정효구가 낸 시집 《신월인천강지곡新月印千江之曲》에 시 <하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거기 경상북도 영양군 첩첩산중에 밤하늘 보호 구역이 생겼다는 진짜 정보다운 정보가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있다 상처를 입힐까보아 몇 번씩 망설이다가 정진규 하늘시비詩碑 하나를 거기 나 세상 떠나는 날 세워주시라고 부끄럽게 육필로 적어 두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 <별>이라는 시다 한 번만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다면 백비白碑 하나로끼워 주시기 바란다

창제 중이시다

  요즈음 우리나라 말씀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사람들이 서로 떠드는 저잣거리엘 나가보면 사람들은 알아듣고 있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쉴 새 없이 진종일 지껄여댄다 표정을 살피니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해서 그러는 귀머거리들이다 소리는 나는데 지독한 사투리다 목소리만 높다 별난 창제 중이시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시대의 언해본諺解本이라면 더듬거리는 맛이라도 있겠으나 나의 귀는 캄캄절벽이다 소리로 듣는 말과 눈으로 읽는 말은 혹 다를까 해서 전에 없이 책을 펼쳐도 청맹과니일 뿐이다 원래 장님들은 귀가 먹었다 원래 소리와 글씨는 한 통속 한 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시집들엔 별들이 없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만 깔려 있다 다행이라고 뒤집어 생각한다 일찍부터 속말 찾기, 보이지 않는 말 듣기로 늙어 온 나이니 관음觀音의 수하手下였던 나이니 우리말 되찾기로 길 찾기로 도로 공사를 시작할 작정이다 시급하다 고속도로를 뚫고 있다 터널을 뚫고 있다 오솔길 선행先行을 모르지 않는다 나도 창제 중이시다

프로방스 세잔느네 뒷간

  이윽고 당도한 일행一行들 세잔느네 기념관 뒤뜰 뒷간에 줄로 섰다 뒤를 보았다 내 앞은 평론가 유종호 선생이셨고 내 뒤는 누군가 했더니 바로 이근배 시인 부인께서 매우 화급한 눈치셨다 내 십 년 묵은 변비의 동행들이셨다 프로방스 마을 세잔느 기념관 뒤뜰 허술한 뒷간이 내 시의 변비, 세상의 변비를 고즈넉이 기다려 주고 있었다 터지고 말았다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프로방스 마을 세잔느 기념관은 직전直前의 고즈넉함이 가득 고여 있는 곳이다 고즈넉함이 터지면 무섭다 건드리면 터져! 위태로웠다 이층 방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서도 그런 고요의 힘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응답해 왔다 나체 모델을 구할 한 푼의 여유가 없어 벽을 뚫어 세잔느가 훔쳐보았다는 뒷개울 목욕하는 여인들의 맨몸이 거기 그렇게 터져 있었다 세잔느의 가난의 변비가 그렇게 터져 있었다 사물들의 세상의 속내를 드러낼 수 없어 내가 걸린 이 말씀의 변비가 세잔느네 뒤뜰 뒷간에 와 있었던 까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기념관 하나 나도 갖고싶다 뒤뜰에 이런 뒷간 하나 있는 고즈넉함 지니고 싶었다 사물들이 세상의 벽을 뚫어 말씀의 속내를 짚을 수 있는 집 한 채, 고즈넉함의 집 한 채 실은 오래전부터 몰래 짓고 있었다

심각함에 대하여

  김춘수 선생과 김동리 선생의 통영 젓갈의 심각함의 관계, 그 맛으로 끈이 되어 있는 이름들을 나도 지니고 있다 이제는 숨겨 둘 수가 없다 아무래도 소중하다 김춘수 선생이 보내드린 통영 젓갈을 자시고 김동리 선생이 심각하다고 하셨다는 그 말씀의 반열班列에 나도 나의 이름들을 감히 올릴 수밖에 없다 심각하다 그건 발효의 관계다 끈이다 끈은 발효의 궁극이다 고임이다 실로 심각하다 박경자는 엄나무 고목 책상으로 내가 시를 쓰게 하고 있다 유금옥은 철마다 강원도 산나물로 내게 당도한다 두릅과 엄나무 순의 심각함으로 나를 채운다 그 끈의 향기로움을 내가 알게 했다 일찍이 내가 윤문자의 집으로 심각하게 띄운 내 편지가 윤문자의 감기는 눈을 밝게 열게 한 적도 있다 기적이라고 했다 윤문자의 논산은 해마다 마늘 농사로 내게 심각한 맛을 가르친다 매운맛을 알게 한다 가을이면 문경새재를 넘어 엄재국의 사과 상자가 어김없이 향깃한 차가움의 맛을 싣고 온다 얼마나 몸 밝은지* 제 모습에 덧칠된 빛깔에 취하지 않으려는** 서로를 절반쯤 죽여주는*** 엄재국의 사과, 십 년이 넘었다 심각하다 김순일의 서산 어리굴젓도 있다 진짜 발효의 궁극이 실물實物로 있다 세설헌洗雪軒 김규성은 우리집 잔칫날 채알을 거둘 날 없게 한다 해마다 미당未堂의 고창 복분자 발효의 궁극을 항아리째 싣고 오신다 발효의 궁극들이여 맛의 끈이여 어찌 이뿐이랴 모두 반열班列이시다 내가 사는 일이란 오직 맛의 끈들을 놓지 않는일이다 심각하다

  ✽, ✽ ✽, ✽ ✽ ✽ : 엄재국의 시 <절정>

예리한 향기

  짧은 동시 한 편 써서 네 필통 속에 이번 생일 선물로 몰래 넣어 주고 싶다 그렇게 새 연필을 깎고 예쁜 종이를 오리고 싶다 그렇게 깎는 소리와 그렇게 오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렇게 오려진 자리와 깎아진 자리의 새살자리 그런 모양새도 네게 보이고 싶다 그런 모양새는 언제나 말을 비우는 말을 떠내는 동시를 데리고 왔다 새로 깎은 칼날, 새로 깎아 드러난 연필의 나무 살 예리한 향기, 그 향기에 피 흘린 적 있으신지 거기 네가 단칼에
 베이게 하고 싶다 단칼에!

초록 밑줄

  초록 우듬지의 생명 곡선이여, 이른 아침마다 눈으로 씻어 밟는 우리 집 마당 나무들의 하늘 흐름이 나의 초록 밑줄이십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새 한 마리 앉아 흔들림도 다릅니다 무게가 다릅니다

  풀밭 낮은 키의 우듬지들도 생명 곡선으로 솟아 이슬 젖어 있음을 또한 알았습니다 날카로움이 이다지 포근 포근 깔립니다

  맨발로 밟는 풀들의 마당 가득한 흐름이 나를 아침마다 받들어 주는 나의 초록 밑줄이십니다

  초록 율생오성律生五聲 속을 한 마리 작은 굴뚝새가 생명 곡선 그으며 가로지르는 아침 마당 주인이 오늘도 허리 굽히고 있습니다

지지직거리다

  율려律呂의 우물물이여, 어김없이 그대 옆구리의 한사물로 한 그루 파초이거나 무엇이거나 배롱나무 붉은꽃들로 만나고 있음이여, 오늘은 칠장사 뒷 숲 가까이 반딧불이로 가득 찍히는 거기 한밤 내 가 있었다 <따뜻한 슬픔>으로 빛남을 받아 적었다 별빛 또한 차갑게 퐁당거렸다. 반딧불이는 온몸 던져 대장간 담금질로 한밤내 지지직거린다 조경선 시인네 작은 연못엔 그렇게 연꽃 몇 송이가 한밤 내 지지직거린다

젖은 날개

  한참 걸어 나가야 우편물을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집입니다 입구入口가 꽤 멀지요 비 오는 날은 우산을 펼쳐 들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아내의 꽃밭이 마중처럼 가꾸어져 있어, 꽃들이 늘 피어나고 있어 다행입니다만 문단속을 하지 않고 늘 열려 있는 아내의 꽃밭은 어제 내린 비바람으로 쓰러져 정중하지가 못하지요 우편물도 늘 속까지 젖어 모시기 조심스럽습니다 새 한 마리 날아와 펼치고 종종 대던, 우산으로 받치고 있던 우체통, 제 젖은 날개를 털지도 못합니다 젖은 그리움을 어떻게 털어내겠어요 무게가 꽤 나갑니다 미리 젖어 있었던 탓이지요 얼른 날아가지도 못합니다 새와 나는 늘 그렇게 들켜요 비 내리는 집 앞에서 젖은 날개로 서성거려요

옹아리들

  맨 얼굴로 열려 있는 순간에 빠른 속도로 살 지나간 내 옹아리들이 몸이 된 사물들의 속살들, 배밀이하는 삼천포 앞바다 햇살 덧칠하는 잔물결도 있다 봄날 해인사장경각 창살 비쳐 들어 스미는 목판 속살 가만히 밀리고있다 말씀들이여! 그간 쓰지 않고 간직한 오랜 세월의 그것들을 내어 쓰기로 작정했다 뚜껑을 연다 아직 바알갛다 시량柴糧이 동이 난 내 살림, 배가 고파 그것들까지 내어 살쓰기로 작정했다

초록 도둑떼들

  초록 우듬지들 허공에 오돌도돌 가득 돋아 거느리고 있다 생명의 점자點子들 눈엽嫩葉 화살 떼들이시다 명적鳴鏑들이시다 초록 도둑들이 떼로 오셨다 허공을 훔치러 오셨다 이 봄 산천의 나무들께서 오돌도돌 눈 감아도 읽을 수 있게 저마다 허공에 깔아 놓으신 초록 함성이시다 초록 점자點子들이시다 내 손끝이 초록 물 들고 있다 짚어가고 있다 떠난 지 오랜 네 숨결 끝자락까지 짚어지고 있다 한바탕 허공에 빠듯이 깔리는 초록 점거點據

초록초草

  이른 아침 새로 뜬 눈으로 날마다 나무 초록 풀 초록 실컷 바라보는 게 유익하다 마음을 위해서도 그렇다 생가에 내려와 십 년, 사무치도록 그걸 했더니 어머니도 다녀가셨다 세상에 다친 눈이 많이 좋아졌다

  대단하시다 또한 나는 봄철 나물을 철마다 생으로 받아먹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파아랗다 그가 다듬고 있는 나물 손, 손톱 밑이 초록이다

연애시절초草

  부처님의 손바닥에서 예수님의 못 자국을 보았습니다

  텃밭의 고추를 처음 깨물며 거기서도 쿵, 율려초성律呂初聲을 초록살로 맛보았습니다

  새들은 절대 귀소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 둘이서 한 채 집을 지었습니다

못물

  연잎 반대기 가득 솟아올랐습니다

  <얼음 담금질이여, 소름 꼭지까지 가득가득 식어 있던 물의 금강金剛이여,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못물, 물밑이란 이런 곳입니다 첫 번째 응답이십니다 기다리세요 두 손 모은 꽃봉오리 합장合掌으로 봉긋 하늘 여시는 새벽, 당신은 거기 그리 서 계시겠는지요
  
  못물, 물밑이란 이런 곳입니다 첫 금강의 응답이십니다

생강꽃 핀다

  봄, 봄에는 방안이 훨씬 춥고 방 바깥이 훨씬 따뜻하고 화안하다 이때 생강꽃 방 밖에서 노오랗게 피어난다 툇마루에 진종일 나앉아 생강꽃 보거라 이게 사랑 체온이다 네 몸 바깥의 뜨거움을 안의 차가움으로 용케 건사하지 않았더냐 꽃 피우지 않았더냐 이 봄에도 생강꽃 핀다 그간 용케 분별하였다 안전하다 싸아하다

연꽃

  아침마다 연꽃 장엄 보러 몸 열고 나가는 나의 봉행奉行이 또한 꽃장엄이다 이 외로움 일행一行으로 꽃장엄하며 여기까지 왔다 상처로 꽃 터뜨려 여기까지 왔다

꽃소식

  어쩌나 서산 구재기 시인네 야서野墅, 운용매는 눈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였다 우리 집 운용매는 지금 저토록 한창이라고 서둘러 꽃소식을 전갈하고 나서 받은 이 서운한 응답이 며칠째 사뭇 언짢았다 쓸쓸해졌다 큰꽃은 모호한 침묵으로 오래 머문다는 말로 위로하긴 했으나 꽃소식도 이럴 수가 있다 같은 해 봄날 구재기 시인이 나누어 준 꽃나무였다 괜한 짓 했다 우리 집 운용매가 초라해 보였다

월정사月精寺

  달빛 속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너의 서글픔이 너의 감당이 아득하다 월정사月精寺 달밤 일보삼배一步三拜로 꽃지는 늦봄 꽃들의 매캐한 내음이 하도나 자욱하시다

합장合葬

  아름다운 상처로만 아물었는지 몇 번이나 덧났는지 내 몸은 그걸 무덤으로 뒤척입니다 마음이 합장合葬되어 있습니다 내가 심야深夜가 되어서야 돌아온 증거의 시간들이, 통과通過한 사물들이 곁에 따라와 깊게 누웠습니다 눈에 밟힌다 하셨습니다 새벽이슬 맺힌 무덤, 맨발로 밟힌다 하셨습니다

전집 자서 全集 自敍

  신발을 벗을 때마다 내 몸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밖의 몸이 안의 몸으로 어떻게 들어서는가 오늘 하루 그렇게 나는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 어떻게 허락받았는가 모든 창들은 여닫기는 동안 바람 한 줄기를 구름 한 장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모든 것들의 결과 틈이 궁금하다 팔질 八耋이 되기 전에 비행기와 배를 타고 이 몸을 내 보내 고 들여놓고 싶다 나가면 이승이 저승이 되고 저승이 이승이 되는 결과 틈이 생길까 궁금하다 나의 맨발이 짚고 지나는 곡선이 그려진 전집全集 속의 한 권을 보태고 싶다 권별로 꽂아 놓고 싶다 아마 너에 대한 전집全集이 첫 권으로 꽂혀 있을 것이다 너를 드나든 이승과 저승이 따로 있을 것이다.

파초

  우리 집 마당 율려정사律呂精舍 앞에 파초 한 그루를 심고 길을 냈습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키로 하늘 지붕의 높이까지만 갔습니다 더는 넘보지 않았습니다 율려律呂의 정체正體를 보이셨습니다 은유의 실체를 보이셨습니다 우리 집 마당 관음觀音의 세 번째 자제이십니다

연못

  연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기다림이 상처로 왔다 향기로 왔다 하늘을 열었다 연꽃의 상처는 순번順番이 다르다 그래서 번외番外다 속상처가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연못 둘러리로부터 돌아가면서 연꽃이 터진다 속상처가 터진다 가장자리 꽃으로 속상처를 깊게 어루만진다 순번順番이 다르다 그래서 번외番外의 꽃이다 꽃의 순번이 연꽃은 다르다‘ 제 슬픔 제 배고픔 제가 물려 달래는 범종梵鐘의 유곽乳廓과 같다’

  ✽정진규, <범종梵鐘>

가을비

  생각났다 누가 늘 날 뒤쫓았던 비 오는 날의 그 중학교 운동장, 젖고 있던 측백나무 울타리 가을날이 거기와 있었다 거기 꽤 깊게 스미고 있는 틈서리, 슬픔의 새경이 제법 무겁다 거기 누가 까아만 우산으로 그걸 펼치고있다 나보다 먼저 당도해 저만큼 지나고 있어 다행이다 슬픔의 새경은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 넘칠 뻔했다 덧날 만큼 덧났다 그만하면 되었다 되었어 가을비 내린다 향깃하다 차갑다 지나가길 바란다

허당

  마늘 농사 잘 지어 추녀 밑에 아낙과 주거니 받거니 올려 달고 이제 올 매운 농사는 고추만 남았다 하였다 내 매운 농사는 그냥 비어 있구나 허당虛堂 하나 지어 냈구나

봄비

  파종播種하는 봄을 맞아 낡은 마음 거둬 내는 내 봄의 씨앗들을 익일택배翌日宅配로 서둘러 네게 보냈다 곧 이어서 봄비도 하늘이 익일택배로 부쳐 주었다 하늘 인심이 최고다 물의 발굽들이* 만드는 속도가 무엇보다 믿을만하다 싹이 트느냐

  ✽유리창을 구기며 물의 발굽들이 흘러내린다: <의자> 송종규, 《현대시학》2015. 3

겸허의 내막

  김종길 시인이 노년의 당신 시에‘ 이것도 시라고’라는 표제를 달아 겸허의 내막을 짚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간의 내 시들의 결까지 깊게 짚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분의 맨발 참 정갈하셨습니다

가물다

  물 인심은 하늘 인심, 사람 몫은 아무래도 아니다 물밥을 고추밭에 아무리 주어도 감당이 가지 않는다 낌새가 오지 않는다 손 놓고 넋 놓고 앉아 있는 둔덕을 아시는지 고추가 자꾸 떨어진다 자꾸, 물 없인 되는 게 없다 저 큰 산도 발치에 어김없이 강물을 흐르게 하시고 있다 고추도 사랑을 안다 하늘의 물 인심엔 넋이 있다는 걸 몸으로 아신다

비가

  헤밍웨이가 쓴 가장 짧은 소설 ;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겨 보지 못한
  정진규가 쓴 가장 짧은 시 ;
  팝니다, 아기 배냇저고리, 한 번도 입혀 보지 못한

홍매화

  서방질 다니는 꽃이 매화 중에서도 홍매화라서 솔직히 말해 나는 그게 좋았다

까치집

  우리 집 느티 까치집이 날로 커지고 있다 그간 살펴본 바로는 새끼들 세 차례나 시접 내 비인 자리가 넉넉할터인데 방 한 칸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사정이 생기셨나보다 틀림없다 맨날 시끄럽더니 작은 마나님들 세 분은 더 모셨나 보다 비로소 이른 아침이 고요하시다 이토록 탈 없이 집 한 채 수습하시고 상속하시는 우리 집 느티 까치집

과자 만들기

  말해 봐, 과자로 만들어진 마음들의 나무들의 이름을 몇 개나 더 이름 달 수 있는지 과자로 만들어진 사과들의 이름을 몇 개나 더 이름 달 수 있는지 과자로 만들어진 책들의 이름을 몇 개나 더 이름 달 수 있는지 말해봐, (같은 질문 양식을 몇 개나 더 만들 수 있는지) (왜 또 다른 쪽으로는 그런 양식의 질문을 불러오기가 싫은지) 말해 봐, (그쪽엔 과자의 레시피가 전혀 없는지) (처음부터 과자를 부른 까닭이 무엇인지) 이 질문들부터 해결하는 해결사가 되어야 시인이 될 것 같군, 그 대답의 자리에 한 채 화엄이 들어앉을 것 같군, 자 더 이상 갈래가 다단하기 전에 여기서 그만 갈피를 잡아야 해 말해봐, 어순語順이 어디서부터였지 <같은 질문 양식을 몇 개나 더 만들 수 있는지>가 첫 번째였어 내가 알고 있는 과자 이름만큼이라는 정답正答이 금방 나와 은유의 실체는 없는 사물까지 무한無限이란 정답도 금방 나와, 그다음 순번은 무엇이었지 <왜 또 다른 쪽으로는 그런 양식의 질문을 불러오기가 싫은지>였어 그러면 은유의 실체는 무한이 아니잖아, 과자는 무한이 아니잖아, 매사 손이 잘 닿는 데가 있어 땡기는 데가 따로 있어, 그래도 그걸 넘어서야 과자지 번외番外의 맛, 그게 과자의 맛이야, 율려律呂과자야, 우유 맛이야 드디어 번외까지 내달았군 그러고 보니 화엄까지 넘보았군 한바탕 잘 놀았어 그만하지

사과와 모과

  오늘부터 나는 그냥 본 대로 본다 그 본다만 쓰고자 한다 써서 그리다를 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써서 그리다는 달라지는 게 너무 많았다 두꺼웠다 더 빨리 배반했다 사과를 그리다가 더 빨리 모과가 되었다 그게예술이라고 선생님한테 배웠다 모과를 들고 선생님 침우당枕雨堂 대문을 들어설 수 있었던 날 나는 선생님의 도제徒弟로 비로소 입문했다 나는 이제 그 입문 일생을 선생님을 배반코자 한다 오늘부터 나는 느리고자 한다 게으르고 싶다 그냥 본 대로 본다가 오래 간다 무엇이든 손대지 않고는 못 백이다 보니 손이 가면 쉽게 상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여자가 특히 그랬다 어쩌면 내 전생全生은 배반의 일생이었다 모과 투성이다 오늘 나는 그냥 본대로 본다 그 본다를 쓰고자 한다 그걸 배반할 수 없는 절대 실물實物을 만났기 때문이다 순간 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모과 투성이가 한꺼번에 지워졌다 경주 박물관에 가시거든 아래층 동쪽 문으로 들어서셔서 석굴암 동영상만 보시지 말고 그 황홀함을 만나시라 왼쪽 벽을 끼고 안쪽으로 조금만 발을 옮기시면 당신의 몸도 그렇게 가눌 수 없어져야 마땅하다 당신의 모과 투성이 일생도 한꺼번에 지워져야 마땅하다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배반을 졸업했다 그냥 본대로 보지 않으면 못 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젊은 불두 한 쌍이 못 본 체 나란히 서 있었다 소녀상 한 채와 소년상 한 채, 그 눈웃음이여, 입술 미소여, 못 본 체라니! 에돌아 아득해짐이여, 결로 번지는 절대 살결이여, 모과의 실체여, 나 배반할 수 없었다 나 오늘부터 사과에 손대지 않게 되었다 못 백이는 못된 버릇 나 깨끗이 배반하게 되었다 그냥 본대로 본다가 오래간다 마땅하다 아득하다 마땅하다

손을 잡는 게 내 일인데

  손을 잡는 게 내 일인데 사람이 되었건 나무가 되었건 연장이 되었건 그게 줄창 내 일인데 이번엔 다르다 쥐는 게 다르다 새로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또 어떻게 놓아야 할까 어떻게 놓칠까 또 언제 놓는 날의 슬픔에 젖을까 그 무게에 밟히고 있다 속 강물을 날로 불리는 손이다 그걸 지워서 내 몸 무게의 영혼의 평균율平均率을 운영하는 것이 율려律呂의 첩경임을 터득한 지도 오랜데 미리 눈치챈 내 숲 속의 새들마저, 나를 운행하는 허공의 날개들마저 새벽부터 떼로 날아와 지저귄다 전처럼 새들에게 응답應答을 할 수가 없다 목이 메이는 슬픔의 강물이 넘쳤다 갇혀버렸다 외로움의 복병伏兵이 나를 압도했다 율려律呂 운영이, 세상 손을 잡는 일이 이번엔 다르다 쥐는 게 다르다 어디까지 가려나 맨날 데이고 있다 속도가 있다 맨날 화상을 입고 있다 연비 자죽이 매일 덧나고 있다 금강金剛이 있다

내가 자주 잊는 말들에 대한 소견

  상고대, 조팝나무, 이팝나무, 배롱나무, 비비추 이 다섯 분이 우선 내 앞에 나앉으신다 까닭이 규명되지 않는다 내 생각이 자주 떠올리는 말, 그래서 내가 자주 잊는 자주 지우는 이름으로 확인되어 버렸지만 왜 이토록 자주 떠오를까 그 실체를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고 염치없이 깊게 만질 수도 있다 다른 말들은 말로 하라면 다 할 수가 있지만 그리라면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오늘도 우리 집 뜨락 배롱나무가 말로 되지 않아 나의 기억처럼 늦봄이 되어서야 겨우 싹을 내미는 그것 앞에서 아침 내내 작심하고 말로 불러 보려고 한참을 애썼다 끝내 실패했다 그렇지! 실체가 이름을 가로막는 것일까 작명作名이 잘못되었다고 거부하는 것일까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 자미화紫微花, 목백일홍木百日紅은 언제나 금방 떠오르니 그건 잘된 작명이란 이야기인가 아닌 것 같다 실체와 말씀과 내 기억의 총량으로 분석 규명을 해야 옳다 얼음꽃 상고대 또한 배롱나무와 같은 형편이다 다만 비비추는 푸른 하늘을 낮게 나는 파랑새로 내 기억을 지운다 키 큰 보라색 꽃이다 이팝나무와 조팝나무는 자주 잊는 말이라기보다 분간이 가지 않는다고 해야 옳다 한 음절씩이 서로 다르기에 내가 어지러울 따름이다 실체는 그리라면 잘 그릴 수 있다 하나만 말하라면 이팝나무는 몇 백 년 묵은 고목도 있다 이제 갈 길을 찾았다 너무 자주 불러 지워지는 이름이여 실은 그토록 그대들을 자주 불러 자주 잊는 게 탈이었다 바로 그거였다 실체와 말씀과 내 기억의 총량, 그것의 한몸을 데리고 나 이제 그대들에게 빠듯이 다가가리라 작심作心하였다 그게 옳다

양철지붕과 빗소리

  양철지붕과 빗소리는 누구에게나 단짝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그 실물이 남아서 녹슨 소리로 너와 나의 그날의 단짝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 늙음에 염치도 없이 그렇게 젊음을 개칠해 주는 날이 있다 가짜의 비린내가 진하게나는 몸의 날이 있다 웬 떡이냐 이것, 우선은 즐겁다 가짜래도 몸의 소모는 즐겁다 개칠로서의 몸의 소모와 순서대로 끝내가는 몸의 소모는 어떻게 다를까 정신이 끝날 때와 육신이 끝날 때는 서로 다른가 그렇다면 단짝이 아니지 그래서 비린내가 나는 거지 그래서 개칠이지 그래도 개칠이라도 해서 보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버텨서 개결해지는 끝장의 백비白碑에 나는 청맹과니다 양철지붕의 빗소리가 녹슨 개칠이 나는 그립다 접을 수 없구나 개칠아, 개칠아, 비린내 나는 개칠아

생짜로 드립니다

  문맥도 멋대로 그대로이다 생짜이다 손댄 흔적이 없는 향기가 있으니 별미로 즐겨 보시기 바란다 우리 집마당 봄나물, 나물은 나물 소리 내며 온다 제맛으로 온다 생짜로 온다 우리 집 마당 봄나물, 아내의 레시피, 생짜로 베껴 훔쳤다 이렇게 지천至賤이다 아내는 지천을 터득하고 있다 생짜의 문법을 시의 지천문법至賤文法을 시의 나물문법을 내게 베끼게 했다 아래와 같다 
  품 1 쑥, 태고의 쓰고 독한, 겨우내 쌓인 찐득한 먼지를 녹여내는, 맑은 정신 들게 하는 태고의 향기 품 2 냉이, 해동하는 흙냄새, 겨우내 그리웠던 손에 만져지는 흙냄새, 연하고 살진 뿌리의 달착지근한 그리움의 맛 품 3 달래, 매운 향기 코가 찌르릉, 눈물이 찔끔, 시래기 맛에 무뎌진 혀에게 한 마디 한다 정신 차려! 품 4 머위, 겨우 애기 손바닥만하게 고만큼밖에 자라지 못했지만 그래도 머위는 머위다 쌉쏘름한 씁쓰레한 성품, 대접만큼 커져도 그게 그 맛이다 그게 순한 맛이다 품 5 돌나물, 앙증맞고 예쁘다 기다란 끈에 조랑조랑 마디마디 매달려 애교를 부린다 뭉쳐있는 그 작고 도톰한 이파리마다 봄 이슬을 함뿍 담고 있어 입 속에서 톡톡 터질 때마다 싱싱한 풀향기를, 이른 봄의 풋내를 입안 가득 채워 준다 품 6 부추, 부추밭에 뾰족뾰족 부추가 머리를 내민다 크지 않은 내 손의 한 뼘쯤 자랐을 때 마늘과 파가 섞인 그래서 오히려 순해진 상큼한 푸른빛의 맛 품 7 담배 나물, 원래 이름은 모른다 우리 어머니가 그냥 담배 나물이라고 하셨다 이게 다 자라서 꽃을 피우면 사람들은 망초꽃이라 부르지 여린 연두색의 기름한 잎들이 소담스럽게 솟아올라 어른 한 줌쯤 되었을 때 뽑아 데쳐서 초고추장에 무치면 연하고 순하고 그냥 술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품 8 씀바귀, 너무 써서 씀바귀, 애들은 질색을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은 안다 이 쓴 맛 뒤에 오는 달착지근한 그 그리운 맛을 품 9 민들레, 별맛 있는 줄은 모르겠다 생김생김이 시원하고 몸에 좋다고 야단들이니 봄 식탁에 오르면 눈을 시원하게 해 주니 약이라 생각하고 먹어준다 품 10 산마늘, 달래 사촌쯤, 달래보다 억세지만 어릴 땐 그래도 달래와 섞어 대접해 주면 잘 섞여서 조심스럽게 제맛을 낸다
  때로 심산유곡도 있다 곰취, 더덕, 신선초, 두릅, 방풍나물 지천至賤이 아닌 것 같아 오늘은 밀어둔다 시의 나물문법으론 제격이 아닌 것 같다

뚜껑별꽃

  내게 패랭이꽃이 보인 날 내가 패랭이꽃으로 태어났다 내게 뚜껑별꽃이 보인 어제오늘 내가 뚜껑별꽃으로 태어났다 뚜껑별꽃이 우리 집 마당에 피어났다 멀리 바다 건너왔다 제주 오름길에서만 피어나는 뚜껑별꽃이 보랏빛으로 우리 집 마당에 다글다글하다 씨앗들은 우주를 극사실로 운행한다 풀꽃 이름들 만한 극사실이 없다 내가 알기로는 며느리밑씻개가 그 실체다 우리 문화사다 생김새하며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지난해 늦가을 제주에 다녀온 내 바짓가랑이에 묻어 온 극사실이다 나의 풀꽃 전집全集에 올랐다 족보를 갖게 됐다 풀꽃 우주 공부를 나는 다시 시작했다 내 노년의 사업이 되었다 극 사실엔 무엇보다 직선直線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영혼의 탱탱한 주름살이있었다 생명 곡선이 파도로 바다를 채우고 있었다 침묵의 숨결마저 보여 주었다 제주 오름에만 피어나던 뚜껑별꽃, 우리 집 마당에 뚜껑 열고 이 봄 다글다글하다 우리 집 마당 하늘엔 밤마다 새별들이 다글다글하다 내 바짓가랑이가 바다 건너 싣고 온 우주의 극사실들이 다글다글하다 어둠의 뚜껑 열고 별들로 등극登極하시었다 뚜껑별꽃

세 건의 샛서방 사건

  청도 감도 무화과도 씨 없는 수박도 어째서 씨가 없는지를 십 년째 규명 못하고 있다 그간 내가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는 이것뿐이다 모두 다 향기 짙게 예쁘게 꽃을 피우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염치없다 열매를 맺고도 씨가 없다 시침 뚝 떼고 있다 감꽃은 흰빛 정갈하게 얼마나 앙증맞던가 목걸이도 해 걸지 않았던가 푸른 수박 덩굴 위로 노랗게 궁그는 이슬 맞은 새벽 수박 꽃은 또 얼마나 놀랍게 가속으로 둥근 우주 하나씩을매달던가 무화과는 꽃까지 피운 적 없다고 시침 뚝 뗀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한밤 내 피었다가 먼동 틀 때 이쁘게 오므리는 걸 나만 못 보았다 했다 꽃 피는 날이 따로 있다 했다 그런데 모두 다 씨가 없다 누구 짓인가 규명해야 한다 나만 못 보았다 했다 샛서방들이 드나든다 하였다 그리하여 열매들이 저리 달고 탐스럽다 하였다 그럼 우장춘 박사가 만들었다는 그 씨 없는 수박은 어찌된 것인가 우장춘 박사가 샛서방이었던가 씨가 없다 도서관까지 드나들며 찾은 말이 <세포자살>이었다 씨 없는 수박도 우장춘 박사가 달이 차면 씨 세포가 생길 때쯤이면 자살하도록 자동장치를 해 놓았단 말인가 청도감도 무화과도 꽃 피고 샛서방들이 다녀간 다음 씨가 생길 때쯤 씨 세포 자살을 스스로 감행토록 자동장치가 되어 있다는 말인가 탄로가 두려운 샛서방들의 짓이란 말인가 샛서방들밖에 없다 우장춘 박사의 연구 논문을 찾아 읽었어야 했지만 십 년 동안 나는 왜 그걸 피했던가 샛서방이 두려웠던가 새로운 숙제다 샛서방들의 정체가 규명되면 내 할 일이 끝날 것 같았다 왜 나는 이 규명의 길에 이토록 들어섰던가 이것도 숙제다 순리順理다 아무래도 이걸 지울 수 없는 게 내 숙제다 샛서방질에도 세포자살에도 순리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 시가 여기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늘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엎드린다 물이다 샛서방질에도 세포자살에도 순리가 있다

죽 쒀서 개 주다

  내가 개가 되었다 개가 되고 말았다 그가 죽을 쑤었기 때문이다 그도 개가 되었을까 내가 그가 쑨 죽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이 내 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쑨 죽은 밥이 아닌 죽이었기 때문이다 그 밥도 못 되는 죽을 그가 쑤었고 그 밥도 못 되는 죽을 그가 내게 먹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개가 되었다 놀랍다 그걸 개인 내가 먹어서 실상은 죽이 밥이 되었기 때문이다 밥이 된 죽, 죽이 밥이 되었으니 그건 네 것이 아니라고 그걸 토해 내라고 요즘 생난리 법석이다 너는 개가 되기도 했으니 그 개마저 토해 내라고 개마저 네 것이 아니라고 요즘 생난리 법석이다 개는 개줄로 나를 꽁꽁 묵었다 개는 밥을 먹을 수 없다 하였다 아하, 그래서 그가 저렇게 고대광실 부자가 되었구나 저렇게 날뛰는 개 부자가 되는 방법이 거기 있었구나 죽을 쑤면 저렇게 개가 될 수도 있구나 너도 개가 되고 싶다고? 죽 쒀서 개에게 주어라 오늘의 경제학 원론이다

게으른 달

  말들의 안락의자에 구석구석 앉아 있었을 뿐인 모든 사물들과 깔끔하게 결별하였다 의미도 무의미도 털어내었다 할 수 있다 내가 신축한 내 정신의 집 한 채도 거침없이‘ 게으른 달’이라고 붓글씨로 써서 내어 걸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겠느냐 나는 사물도 모르고 말도 모르게 되었다 사실일까 소문은 내 안에서만 자자하다 이건 사실이다 치워진 비인 안락의자들이 새떼들처럼 집합해서 까맣게 어디로 떠나가는 을숙도, 그래 그때의 저녁하늘을 고개를 한참 젖히고 목 부러지게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사내의 키가 슬프게 꺾어지고 있는 시간의 뒷전, 텅 비어버린 말과 사물들의 뒷전, 비어버린 몸이 내가 신축했다는 내 정신의 집‘ 게으른 달’이 산들바람에마 저 대책 없이 구겨지고 있다 통과하고 있다 무슨 직전直前이다

밥시時

  술을 빚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 한 동이쯤 고였으니 그대에게 가리라 살 버린 나의 뼈, 뼈 버린 나의 뼈, 뼈를 지나 또다시 썩은 한 모금, 또록또록 한밤중에도 홀로 뜨는 한 모금, 독하고 독하게 눈뜨는 한 금, 한 모금으로 그대에게 가리라 이제 한 동이쯤 고였으니 그대에게 가리라 진국으로 온전히 가리라 이 한 동이는 우리들 사랑의 밥, 나는 그대의 밥이다 이젠 그대도 닫힌 고리를 풀리라 꽂아 두었던 놋숟가락 하나, 퍼어렇게녹오른 놋숟가락 하나, 소리 없이 뽑아내리라

제주 한란‘ 축왕’에 대하여

  꿈에서 만났다‘ 축왕’, 정말 제주 한란에‘ 축왕’이 있는지 확인하면 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치한 식물도감이 눈앞에 꽂혀 있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제부터 꿈에서 본 대로 옮겨 볼 작정이었다 꿈속에서 운영한 은유도 그대로 합환合歡, 새끼를 출산해 볼 작정이었다 은유의 실체는 원래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실상이어야 실상이다 태를 잘라서 태를 이어내는 세상 만들기다 그걸 해 볼 작정이었다 어디까지 가게 될까 지워지지 않았다 자꾸 형상이 끼어들었다 지용芝溶의 으스스한 꽃,‘ 도채비꽃’이 가로막고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消耗되>는 숨 가쁜 백록담白鹿潭이 헛수고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짚어 보니꿈도 우리말은 소리로 꾸게 한다. 나는 제주 한란‘ 축왕’을 소리로 보았다 침묵의 소리로 보았다 그래서 실상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만 자꾸 들린다 실상이 보이지 않는 실상을 무얼로 내밀 것인가 이런! 견디지 못해 끙끙대는 내게 아내가 식물도감을 내밀었다 1980년 이종석 교수가 정리한 <한국 식물 자원의 분류학적 연구>에 제주 한란‘ 추광秋光’이 있었다 오호라, 침묵의 소리로 꾼 내꿈의 오기여! 연음連音의 꿈이여! 위대한 은유의실체여, 오기여!‘ 축왕’이여!

홍옥 한 알

  한 겨울 눈 오는 날 청계천 헌 책방엘 갔다 김종삼 특집 낡은 시 잡지 표지에 이름도 없는 내가 김수영 전봉건 김종문 신동문 김광림 시인과 함께 섞여 내다보고 있었다 움, 무우순, 무순無順, 번외番外라고 금방 끼룩거렸다 성중천性中天이 거기 있었다 맨 꽁무니 기러기 한 마리여

  그즈음 어느 겨울날 아리스 다방 골목길 과일 가게에서 김종삼 시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조심스럽게 싸들던 홍옥 한 알과 김하림 시인도 이 겨울 생각났다 눈이 내리고 있다 열애 중인 그들이었다

김종해의 아랫목

  김종해가 아내의 밥상을 차린다고 했다 그것도 외국여행에서 돌아오는 아내를 위하여 찌개를 끓여 놓고 반찬을 이것저것 챙긴다고 썼다 칠십 노인의 밥하는 손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근배도 그런 일은 못 할 거다 그게 허세나 자랑으로 보이지 않고 겸허와 섬김의 아름다운 궁극窮極으로 만져지는 게 신기하다 마지못해 설거지 몇 번을 해 본 나이긴 하지만, 그것도 이내 돌아서서 아내를 위함이란 말이 끼어 들까봐 서둘러 내 부끄러움을 오늘은 애써 설거지했다고, 내 그릇을 씻었다고 쓴적이 있기야 하지만 종해는 그게 아니었다 그냥 <아내를 위하여> 그 자체였다 축하한다 종해가 말이다 종해는 이제 시를 제대로 알고 있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것도 시랍시고 써 놓고>* 숨을 몰아쉬며 애써 감추고 있는 노인임을 비로소 고백한다 나도 어떻게 하면 축하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는 되었다 종해야 고맙다 시의 짐작에 당도하기는 하였다고 겨우 운신運身하고있는 나를 보고는 있다 뜨락의 나무와 마른 풀잎들을 다시 기웃거리고 이 해지는 겨울 저녁녘 내 황토방 아궁이에 바알갛게 불을 지피면서, 삭정이들을 꺾어 넣으면서 종해의 궁극窮極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따뜻한 아랫목을 짚어 보고 있다

  ✽김종길 선생의 시 표제

엄재국의 사과

  엄재국이 키운 사과 상자가 해마다 문경새재를 넘어 당도한다 그의 사과 한 알을, 첫 번째 한 알을 아삭, 우주로 짚었다 오성五聲의 첫 자리 우주로 들었다 궁宮! 내안에 떨어졌다

까치 이발소

  은하수를 해마다 건너오는 까치들이 그걸 알고 있다 길 잃은 아이들에게 은하수 다리를 놓아주는 엄지손가락 하나가 없는 한창섭 이발사가 머리를 깎는 아침이다 까치 내외도 마당에서 깡총깡총 유리창 쫑긋 머리 깎으러 기웃거린다 말더듬이 착한 아이들은 그걸 안다 이발사 한창섭 아저씨는 처음엔 그걸 몰랐다 말더듬이 아이들 시키는 대로 문 열고 가위 들고 빗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깡총깡총 까치 내외는 아저씨한테 다가왔다 머리에 솟은 뻣쩡털 하나씩 곱게 잘라줬다 까치들은 느티나무 위로 날아올라 깍깍 꼭 두 마디씩만 짖었다 그날이 칠월칠석날이라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까치 이발소라고 한창섭 아저씨가 써 붙인 간판, 지금도 붙어 있다 아저씨는 평생 머리 깎아 돈 많이 벌었다 모자라는 아이들 학교 세웠다 이게 전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한길 학교다

  ✽경기도 안성 원곡면에 내 친구 이발사 한창섭이 세운 재활 한길 학교가 있다.

가짜 시인

  보체초등학교 아이들하고
  어린이날 약속해 놓고
  약속 못 지켰다
  내년 어린이날엔
  문학동네에서 동시집 꼭 내서
  모두 다 돌려준다고 해 놓고
  약속 못 지켰다
  제목까지 《별똥별 별똥별》

  정진규 시인 할아버지
  별똥별 별똥별 거짓말쟁이
  가짜 시인이야
  얼굴 빠알갛다
  내년엔 꼭 약속 지킬게
  진짜 시인 꼭 될게
  • 이전

  • 다음

정진규

시집 1 | 좋아요 9

  • 나비보내기
  • 좋아요

보고있는 시 공유

  • 책갈피
  • 차례 및 낭송시 듣기

모르는 귀

정진규

시집 댓글 달기

시집 책장 추가

보고있는 시집 공유

더 많은 시집 보기

모르는 귀

정진규

댓글전체보기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차례 및 낭송시 듣기

  •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15

  • 願往生歌

    17

  • 모르는 귀

    18

  • 그릇과 가지치기

    낭송시

    19

  • 은어사銀魚寺

    20

  • 썩는 사과 향내

    21

  • 서글펐다

    23

  • 외기러기 한 마리

    24

  • 나무여 나무여

    25

  • 큰 나무 방석

    26

  • 점자훈민정음點字訓民正音

    27

  • 벼락이여, 들치기여

    29

  • 내 지팡이는 復古가 아니다

    31

  • 하늘시비詩碑

    33

  • 창제 중이시다

    34

  • 프로방스 세잔느네 뒷간

    36

  • 심각함에 대하여

    41

  • 예리한 향기

    낭송시

    43

  • 초록 밑줄

    44

  • 지지직거리다

    45

  • 젖은 날개

    낭송시

    46

  • 옹아리들

    47

  • 초록 도둑떼들

    48

  • 초록초草

    49

  • 연애시절초草

    50

  • 못물

    51

  • 생강꽃 핀다

    52

  • 연꽃

    53

  • 꽃소식

    54

  • 월정사月精寺

    55

  • 합장合葬

    56

  • 전집 자서 全集 自敍

    57

  • 파초

    58

  • 연못

    59

  • 가을비

    60

  • 허당

    61

  • 봄비

    62

  • 겸허의 내막

    63

  • 가물다

    64

  • 비가

    65

  • 홍매화

    66

  • 까치집

    67

  • 과자 만들기

    71

  • 사과와 모과

    73

  • 손을 잡는 게 내 일인데

    75

  • 내가 자주 잊는 말들에 대한 소견

    76

  • 양철지붕과 빗소리

    78

  • 생짜로 드립니다

    79

  • 뚜껑별꽃

    82

  • 세 건의 샛서방 사건

    84

  • 죽 쒀서 개 주다

    86

  • 게으른 달

    87

  • 밥시時

    88

  • 제주 한란‘ 축왕’에 대하여

    89

  • 홍옥 한 알

    91

  • 김종해의 아랫목

    92

  • 엄재국의 사과

    94

  • 까치 이발소

    95

  • 가짜 시인

    96

책장,착갈피

시집(시)을 책장,책갈피에 추가했습니다

  • 닫기

서비스안내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