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천사

김성춘

천사

  짙은 눈썹으로 밤새가 운다

  어린 별들의 몸이 뜨겁다

  별의 열 손가락 끝, 새의 맨발이 만져진다

  울음은 언제나 뜨겁고 슬픔보다 깊다

  내 발목에 초사흘 달, 푹푹 빠진다

  달의 잎사귀에 푸른 음악 묻어난다

  별의 몸은 부서지지 않고 반짝인다

나비 관음觀音

  그는 새가 아니다
  새가 아니지만
  순결한 하늘은 그의 길이다

  물색 스커트 투명한 날개로
  지그작
  재그작
  어린 접시꽃 근처에도 갔다가
  훌쩍,
  키 큰 감나무 우듬지도 타고 넘는다

  허공이 울퉁불퉁한가
  걸음은 늘 지그재그다
  지그작
  재그작
  뒤뚱거리는 혼신의 저 팔락거림!
  생의 동력이다
  날개 틈새로 울퉁불퉁한 길 보인다

  그는 새가 아니지만
  아름다워라 팔락이는 저 물색 스커트
  햇살 속으로 왔다 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내 안에 그가 다녀간 흔적이 깊다

  틈이 고맙다
  숨길을 터준다
  숨길 없는 틈은 죽음이다
  문과 문 그 틈새로
  달빛과 별빛이 오고
  꽃잎과 꽃잎 틈새로 벌과 나비 오고
  악수하는 손과 손 틈 사이
  입술과 입술 틈 사이로
  달콤한 사랑의 향기 온다
  새벽 다섯시와 새벽 네시 오십구분 오십구초 그 틈새로
  푸른 새벽이 도착한다
  틈을 사랑하는 나는
  일하는 틈, 운전하는 틈, 틈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오늘도 손녀가‘뽀로로’티비 보는 틈새
  잠시 틈을 내어
  틈새 세상 바라본다
  틈이 고맙다
  틈은 쪼개면 쪼갤수록 또 아름다운 틈이 생긴다

역광逆光

  산 너머 누가 붉은 서치라이트를 켜고 있다
  순간이 극명하다
  나와 황혼 사이, 내가 잘 보인다
  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황혼녘, 검은 눈썹 같은 저 산의 능선들
  A4크기로 잘라 벽에 걸고 싶다
  붉은 체리 같은 노을도
  역광 속 선명한 능선의 비명도 벽에 걸고 싶다

  먹물이 온몸에 번지듯
  폐허 같은 도시에 대형 봉분들 허공에 떠 있다
  누렇고 큰 비눗방울처럼
  산자와 죽은 자의 길이 잘 보이는 도시
  길 끝에 가서도 가야 할 길 아직 잘 보이지 않는 도시
  순간이 꽃처럼 극명하다

  오늘의 역광 속에
  나무들이 무릎을 꺾고 있다
  나와 황혼 사이 내가 잘 보인다
  가야 할 길 먼 불빛 속에 잘 보이지 않는다

3월

  새벽에 일어나‘ 산이 텅 비었다’라고 썼다가 지운다
  ‘텅’을 지운 자리에‘ 에메랄드 같은 새벽’이라고
  썼다가 다시 지운다 산을 썼다 지웠다
  하는 틈새로 이마를 밝히는 푸르럼

  산은 내 젊은 아버지
  보일 듯 보일 듯한 산의 마음도
  저 골방의 구석도
  생각하면 아, 광활한 우주다

  새벽의 귀가 새파랗다

  골짝 바람, 칠불암 돌부처 귀가 시리다

  아이는 아직 독일 가 있고
  앞집 영감은 수술 후 투병중이다
  작년 텃밭에 뿌린 어린 봄동, 푸실푸실
  허공에 푸른 발길질 하는

나는 가끔 빨간 입술

  새벽 테이블, 붉은 사과 한 알 향기롭다
  과즙으로 충만한 부푼 가슴
  하나의 붉은 벼랑이다
  어디선가 저 붉은 열매 본 기억이 있다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지만
  가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
  어디선가 저 뜨거운 언덕을 만난 기억도 있다
  만나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과들, 향기롭고 둥근 것만이 아니다
  사과를 오오래 들여다본 자만이 안다?
  한 알의 붉은 사과
  그 벼랑이 가진 심연, 아무도 모른다
  새벽 테이블, 향기로운 붉은 사과 한 알
  벼랑 앞의 나
  지금, 폭풍 전야다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의 글

화花요일

  맹물 같은 시간이 왔다가 간다
  오늘은 화요일
  아무 일 없어요?
  갑자기 독일 가 있는 아내한테서? 전화가 온다
  오늘은 화요일
  벚꽃이 가고 배꽃이 흐드러지게 왔어
  벚꽃이 가고 배꽃이 오는 그 사이로
  갑자기 천안함이 침몰하고
  사마란치가 침몰하고
  좋아하는 시인 최하림이 침몰했어

  오늘은 화花요일
  흐드러진 배꽃 나뭇가지가
  농염한 여인 같은 날
  갑자기 뒷산 개구리들 떼죽음 당했어
  어떤 몹쓸 친구가 싹쓸이 했나 봐
  꽃에게 남산에게 물어도 대답이 없어
  강 건너 사랑하는 바다도 아무 대답이 없어

  아무 일 없어요?
  궁금한 배나무가 환히 뜰을 밝히는 오늘은
  꽃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날

어떤 꽃나무

  나는 그 나무가 죽은 나문 줄 알았어 검은 옷 입고 검은 구두 신고
  고독한 포즈의 그 나무, 무심코 지나다니며 본 길가의 그 나무

  13월 초순인가 사월 초순인가 하여간 그 근처
  갑자기 그 나무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어

  왜 라디오 볼륨이 점점 높아지는 그런거
  검은 꽃나무의 몸 어디선가 신열의 볼륨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어
  발갛게 부푸는 젖꼭지의 봄 기미가 투명한 물로 번져 나오는

  아, 살아 있었던거야 그 검은 옷 검은 구두의 나무 
    투명한 뼈로 숨쉬고 있었던 거야
    나무의 중심이 물오름으로 소란했던거야

  아무래도 좀 이상한 그 나무
  앞으로도 더 이상해질 것만 같은 그 나무

    나무의 중심부가 꽃 물살로 소란한
    이마에 열이 좀 느껴지는…… 
  13월 초순인가 사월 초순인가 하여간 그 근처

달콤한 달

  하느님 어찌 좀 해 주세요 ?
  폰 메시지도 없이
  하늘 로터리 돌아 걸어온 저 달
  귀뚜리 낭랑한 밤
  붉은 접시꽃잎에 붙은 저 달
  달과 나
  짐짓 딴청도 피우며
  툇마루에 흰 궁둥이 걸치고 새우깡에 소주도 함께 마셔요
  뜻밖의 행운처럼 녹아드는 저 달
  그냥 즐겨도 되죠
  가을 밤 삼매경에 빠져도 삼매경 되죠?
  하느님 저 달 좀 잡아주세요
  불쑥, 은빛 마당에 굴러온

뙤약볕―오규원에게

  시인詩人의 집에 갔다
  오랜 장마와 태풍 뒤 8월. 경기도 서종면 서후리
  강물을 빙빙 돌아 강물로 도착했다
  마당에 분홍꽃 떨기 자귀나무 한 그루
  혀 떨군 늙은 개 한 마리. 오규원식으로
  허공에 기댄 채 허공이 되어 있었다

  검은 망토의 산제비나비들
  분홍꽃 자귀나무와 잎새 가까이 숨쉬는 푸르름 사이로
  고요 한 사발씩 나르고
  푸른 고요와 자귀나무 꽃잎 사이에서
  시인은 뙤약볕 되어 땡볕과 싸우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새 한 마리 울지 않고 지나갔다

  경기도 양평 고요의 모서리

  검은 산제비나비 데불고
  장마뒤 찾은 8월 데불고

물소리 천사―그의 全身은 물이었다

  물소리 하나 이승을 떠났다
  물소리가 새 한 마리와 잘 놀다 떠났다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佛日庵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도 입구에도
  버스 정류장 근처에도
  뒷골목 동네가게 앞에서도 그 물소리
  또렷하게 잘 들렸다

  이승을 떠나는
  물빛 옷자락 사이로
  물소리와 새소리가 잘 보였다

  흰 맨발 뒤집어 보이며
  하얀 덧니 반짝이며
  숲속에서 살랑이는 나뭇잎의 몸짓으로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가난한 사람들의 뿌리를
  적시고 또 적셨다

  물소리 하나
  난초 꽃 향기로 가득한 봄날
  온 들녘이
  한창 눈부시다

청음淸音

  어미 개가 첫 새끼를 낳고 있었다. 깊은 밤에

  첫눈 소복소복
  어둠 속에서
  바다의 양수가 터지고
  어미 개가 혼자 탯줄을 물어 뜯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탯줄을 삼키며
  구멍이란 구멍마다 어미 개가
  밤의 밑구멍까지
  붉은 혓바닥으로 새끼를
  핥고 또 핥고
  바다의 밑구멍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푸성귀 같은 질긴 파도 소리가
  새벽 문틈 사이로
  밤의 구멍이란 구멍마다

달, 소스라치다

  첨성대 앞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푸른 유방 사이로
  유리 구슬이 밤을 내려다본다. 둥글게
  밤은 푸르고
  사랑의 시간도 푸르다

  달밤은 언제나 추억처럼 둥글다

  내물왕 부근 밤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흰 옷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첨성대 지나 내물왕릉 지나
  유리구슬과 함께 걷는 밤
  문득
  푸른 유방과 유방 사이로
  악,

  소스라치는 저
  달!

골목집―고향

  어머니의 푸른 치마처럼 오륙도 앞바다가 펼쳐졌다

  얼굴이 납작한 굴딱지 지붕들

  절영도 영선동 그 골목집

  등잔 아래 그늘처럼 깔리는 어머니 흐린 목소리

  자갈치 시장 낮은 뱃고동처럼 내 안을 철썩이던 그 골목집

  코가 납작한 고무신짝들 하늘에 둥둥 떠 잠들고

  고깃배 타고 떠나간 형님,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 골목집

  지금도 내 안을 철썩거리며 잠들지 못하는 그 골목집 파도 소리

  어머니 푸른 치맛자락 구겨지는 소리 들리는

  문득 가고 싶은,

비밀은 썩지 않고

  흙을 입에 문
  금 귀고리 찌그러진 금관 은제 허리띠 황금 칼 금동신발, ……
  입이 없는 저 비밀들
  무덤 속에서도 썩지 않고 반짝인다

  누구일까 비밀을 입에 문
  설명할 수 없는 저 모래 사막
  설명할 수 없는 녹슨 시간들
  비단벌레 화살통 금제 말띠 장식 바스라지는 등자들……

  상처는 상처로 썩고
  시간과 비밀은 아직도 썩지 않고
  반짝이며 사라지는 모래 사막과 함께

  아, 무덤 속이 환하다!

2009년 오월 어느 날―오탁번 시인에게

  국립경주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쪼르르,
  성덕대왕 신종 앞으로 굴러가는
  오월
  아저씨
  와, 저 거, 저 큰 종, 진짜야?
  진짜 맞아요?
  와, 컵 엎어 놓은 것 같다
  떨어질까 겁난다
  고고 박물관 지나
  다보탑 석가탑 앞에 선 오월
  아저씨
  어느 게 진짜 다보탑이야? 여기 석가탑도 있어?
  눈이 휘둥그레
  박물관 뜰에 서서
  끝도 없이, 호기심을 굴리는 오월
  성덕대왕 신종이 덩…… 덩…… 웃는다.
  신라의 쪽빛 하늘 만지며
  쪼르르
  오월의 굴렁쇠 굴리는!

귀뚜리와 눈물

  귀뚜리도 눈물을 알까

  우는 것이 천직인 저 귀뚜리

  알고 있을까

  모든 눈물은

  바람 부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귀뚜리도 알까

  오늘 밤도

  먼 곳에서 누군가 캄캄한 이슬을 삼키며

  스탠드 불빛 아래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모든 눈물은

  바람 부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까

흐느낌, 읽다

  손녀 아이 잠속에서 흐느낀다
  아랫배가 애벌레처럼 꾸불텅거린다
  꿈속에 슬픈 일
  당신…… 들려?
  꿈속에…… 새끼 곰 판다가?
  글쎄…… 엄마가?…… 할머니가?
  흐느낌 사이로 밤의 강물 소리 뜨겁다
  밤의 나뭇잎새들 가뭇가뭇 몸을 흔들고
  마당의 접시꽃들이 붉다
  흐느끼는 강물의 이마에
  밤의 이불을 살며시 끌어 와 덮어 준다
  창 밖, 어둠을 첩첩 껴 입은 산비둘기
  밤의 강물 삼키며
  꾸루루, 꾸꾸루루

시를 찾습니다

  1

  시가 집을 나갔다.

  사월 며칠 벚꽃 흐드러지게 핀 날

  흰 고무신에 말은 좀 더듬거리고 지팡이도 없이

  경주시 배동 들판에서 실종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혹시 시를 보셨거나……


  2
  
  가난을 천직으로

  새와 흰 구름과 달의 언어를

  잘 놀다 집 나간 당신

  어디서 정처없이 떠돌고 계시는지……

  구룡포 바다 쪽으로?

  고요의 기림사 절 뒤 오솔길로?

  역전시장 할매 해장국 집?


  3
  
  파불로 네루다는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모른다고

  시인 오규원은

  그의 현대시 작법 어느 구석에도

  당신은 없다고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生밖에 없다고


  4

  시를 찾습니다

  어제도 신새벽에도 아니 오시고

  내내년 벚꽃들 환장하는

  사월에나 오실까

  예고도 없이

  피투성이 맨얼굴로.

뻐꾸기

  갓 따온 싱싱한 상추 같은
  오월 아침
  개다리소반 앞에 두고 손녀와 마주한다
  흙담 넘어 뻐꾸기소리 놀러 온다
  온유야
  뻐꾸기 어떻게 울지?
  “뽀카 뽀카……”
  온유야
  뻐꾸기 어떻게 울지?
  “버까 버까……”

  아, 흙담 넘어
  놀러 온 이쁜 손녀 뻐꾸기
  뽀카 뽀카
  버까 버까
  갓 따온 싱싱한 상추 같은

웃기 돌

  웃는 돌이 아니다
  웃기는 돌도 아니다
  새까만 장물에 오래 잘 눌러진
  무거운 입술의 돌, 말한다,
  화두 던지듯

  가라앉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길 가라앉혀라

  가무잡잡한 돌의 입술
  고행승 같은 돌, 말한다, 끝이 보일 때까지

  당신의 첫 걸음 애터지게 껴안아라

  마음의 한귀퉁이?
  새벽처럼 찾아오는 푸성귀 귀때기 얼굴

  ✽제목 : 수필가 김은주의 수필에서.

어떤 개인 날―전피수갑의 손

  가을 꽃 길, 웬 사내 하나 서 있다
  꽃 구경 나온?
  아니다
  사내의 손에 흰 비닐 봉지, 전피수갑처럼 붙어 있다
  그런데 흰 비닐 봉지 속 좀 봐
  낭떠러지에 붙은 필사적인 저 벌떼들 몸부림 좀 봐
  어린것들의 탄식 들린다

  사내의 전피수갑의 손, 지구 한귀퉁이
  무너뜨리고 있다 말 못하는 저 어린것들
  서로 엉켜 비상구 없나 비상구 없나
  캄캄한 허공 물어뜯고 있다

  해진 청바지 색 같은 가을 하늘
  조객 같은 들국 몇 송이
  가을 들판의 한귀퉁이 무너뜨리는
  전피수갑의 저 뭉툭 손!
  나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짧아지는 나의 시

  세 살배기 손녀에게 세상은 알 수 없는 나무들로 가득한
  천연색 숲인가 보다
  ―이거는 뭐야
  어제 가리킨 소나무를 가리키며 또 묻는다
  아이에겐 최초의 나무
  첫눈 뜨는 첫 나무
  오늘도 어린이 집 나설 때 다시 묻는다
  ―이거는?
  ―응, 단풍나무
  ―이거는?
  ―응, 벚나무
  ―이거는? 이거는?……
  아이의 질문은 계속된다

  집에 와서 화장실에서 쉬―하는
  할애비의 시들하게 늘어진 것 빠안히 쳐다보며
  또 묻는다

  ―이거는 뭐야?
  ……??

  오, 질문은 끝이 없고
  갈수록 나의 시는 짧다

맨발이 울었다

  우는 발이 있다*

  슬픔은 비처럼 어디서나 내린다고 당신이 말했을 때

  우는 발이 있다

  바다의 해조음 같은 당신의 푸른 머리칼이 내게로 왔을 때

  천사의 배꼽이 내게로 왔을 때

  기저귀에 똥 싸는 어린 별이 내게로 왔을 때

  우는 발이 있다

  새벽에도 왔고 노을에서도 왔고

  폭설 속에서도 악몽 속에서도 왔다

  우는 발 하나

  슬픔은 비처럼 어디서나 내린다고 당신이 말했을 때

✽“단테의《 신곡》에서 니콜라스 3세의 발이 울었다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 로댕은 벌써 알았던 것이다. 우는 발이 있다는 것을. 완전한 한 인간을 넘어서 울음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모든 땀 구멍에서 솟아나는 엄청난 눈물이 있다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로댕>에서

우화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 욕한다
  우물 속에만 왜 갇혀 사느냐고
  그러나 당신
  당신의 우물 안 얼마나 잘 들여다보고 사는가
  우물 안 구석구석이 아름다운 심연이라는 걸
  연못 속에 개구리가 살고 내가 살고 사랑하는 당신이 살고
  가시연꽃이 살고 새벽이면 물안개
  오고 이쁜 물뱀도 오고
  개밥바라기별 저녁놀도 스러지는
  연못 안, 얼마나 찬란한 은하인가를
  한모퉁이 시간의 잎새에서
  맑고 큰 두 눈으로
  별빛 쏟아지는 한 세상
  꿈쩍도 않고 두 눈에 담고 사는 그
  연못 속 고요의 한 페이지 건너기도
  생은,
  얼마나 짧고 또 짧은가

엄지발톱 길

  엄지발톱을 깎는다 침침한 눈으로
  비포장 생, 잘 깎이지 않는다
  발톱 사이 지난 길들이 울퉁불퉁 얼굴 내민다
  삐딱하게 닳은 붉은 핏방울 길도 보인다
  보인다. 발톱의 저 밑바닥에
  어머니 엄지발톱 추억이
  툇마루에서 어머니, 비포장 길 발톱 깎으신다
  거북 등 껍질보다 더 갈라터진 모성의 세월 깎으신다. 잘 깎이지 않는다. 그 슬픔 칠순의 생, 붉은 주먹 움켜쥐고 잘 놓지 않는다

  아, 꽃 피던 분홍의 시간들 그 꿈결 속의 길들
  어디서 코 골고 계시나

  나, 엄지발톱의 길 깎고 또 깎는다

  깎아도 깎임을 당해도
  비포장 생, 울퉁불퉁 잘 깎이지 않는다

고선사 탑*

  가까이 오지 마라**

  네 앞에 서면 난 아무것도 아냐

  오호 깊고 황홀한 너의 육신

  지금 나,

  뿌리째 무너지기 직전이야

  이슬처럼,

  네 앞에 서면

  ✽고선사 탑 : 원효가 주지로 있던 고선사에 세워진 탑. 절터는 덕동호에 수몰됨.
  ✽✽문정희의 시, <돌아가는 길>에서

세방 낙조*

  바다가 진도 특산 홍주 빛깔로
  셋방 낙조 끝! 하고 섬과 섬 사이 뜨거운 낙관을 찍는다

  노을이 손가락 섬 발가락 섬 끝까지
  붉고 황홀한 띠로 육자배기 한자락 색칠을 한다

  저무는 세방리
  수평선의 몸 점점 부풀어 오르고
  나도 점점 팽팽해진다
  바다가 캄캄하게 소멸해 간다. 섬도 나도 캄캄해진다

  바다는 섬과 어둠과 한통속
  나는 진도 홍주 빛깔로 온몸이 물들어
  팽팽해진 바다의 몸 더듬거린다
  망연한 손가락 섬이 되어
  진홍 빛 노을의 몸 더듬거린다
  세방리 섬의 끝까지

  뜨거운 인주印朱로
  낙관을 찍는다

  ✽세방 낙조 : 진도에 있는 노을이 아름다운 곳

남천南川 물소리

  달이 코스모스 꽃잎에 착륙한 밤
  남천南川 다리 아래
  웅얼웅얼 가고 있는 시냇물 소리
  돌부리에 부대끼며 정처없는 저 남천南川 물
  부대끼며 가는 것
  저 물소리만은 아니다
  새벽도 한참 지나서
  귀뚜리의 시린 무르팍도 지나서
  내일 새벽까지 더 가야만 하는 저 남천南川 물소리
  정처없이 가게 내버려두자 내버려두자
  빈 채로 가는 저 달
  홀로 가는 남천南川 물소리
  텅 빈 맨발들, 이쁘다

쾌청―주남저수지에서

  댕기물떼세 쇠오리 흰뺨오리 말똥가리들……

  봄이 오는 주남저수지 갈대섬
    겨울 철새들 만난다
  갈대섬 사이로 새들이 초록 보트 타고 있다
    나를 부르는 걸까?
  고개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이뻐 너희들?
  댕기물떼세 쇠오리 흰뺨오리 말똥가리들……

    손 잡고 함께 걷고 싶다
  잔치국수 함께 먹고 싶다

  땅거미가 번지고…… 언제 다시 만날까
    저런 이쁜 시 땡기고 싶은 날

신륵사*에서

 
  1

  남한강 신륵사에 갔다
  언 강가 청둥오리 떼들
  자맥질하는 놈
  애인과 데이트하는 놈
  산천 경계 더듬는 놈
  삼삼오오 즐겁다
  물 속,
  붉고 연약한 오리들의 물갈퀴 좀 봐
  벌새 날갯짓 같다
  견딘다는 것
  떨고 있는 저 우주의 물갈퀴

  한양 쪽으로 강의 허리, 길게 휘어지고


  2 

  여보게
  낯설게 더듬거리게

  말랑말랑한 정신 느릿느릿
  뜬구름 이슬에게도 묻지 말게
  정답은 암중모색 뜬구름도 정답이네
  툭, 한말씀 던진다.

  ✽신륵사 : 고려 말 승려 나옹선사와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원찰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 한강가에 있는 절.

불국사엔 고래가 산다

 
  1

  지하문 밖 수평선 앞에 섰을 때

  흰수염고래 한 마리 물보라를 내뿜으며

  대웅전 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어

  토함산 아래로 헤엄쳐 내려와

  부근을 빙빙 돌다 재빨리 몸을 숨기는 저 고래들 좀 봐

  엷은 자줏빛 몸의 고래들

  아미타고래 반야고래 다보고래 석가고래들

  불국의 해변, 새들은 낯선 먹이를 찾으며 날고

  바람, 햇빛, 모래로 된

  석탑의 하반신을 어루만지며 나는

  고래가 헤엄쳐 온 무수한 시간의 물이랑을 생각했어

  ―내가 건너온 순례의 시간과
  고래의 시퍼런 물이랑은 무엇이 다른가

  고래를 기다리며 나는*

  청바지에 선글라스 낀 갈매기들과 함께

  구름 위 관음전 가파르게 올랐어


  2

  대웅전 해변에 쏟아지는

  달빛 폭포

  은빛 고래다

  새끼고래 한 마리 무설전 뒤안에서

  자줏빛 젖꼭지 빤다

  극락전 해변

  바람, 햇빛, 모래로 된 우리 생生도

  천년 달빛 물살로 출렁인다

  ―내가 건너온 순례의 시간과
  고래의 시퍼런 물이랑은 무엇이 다른가

  고래를 기다리며 나는

  달빛 폭포 물살에 젖어

  자하문 돌계단에

  먼 생까지 오오래 서서.

  ✽자하문 : 석가불이 머무는 불국토에 들어가는 문으로 부처의 몸에 자줏빛 금색 이 서려 있기에‘ 자하’라고 말한다. 
  ✽안도현의 시, <고래를 기다리며>에서 빌림.

국사골* 지나며

  남산 금오봉 1.5K 화살표 길 굽어 있다
  산이 텅 비어 있다
  숲을 키우던 물소리 어디로 갔나
  몇 번 길을 놓치며 길을 읽는다.
  원효도 금오신화도 보이지 않고
  쇠똥처럼 버려진 무덤 하나?
  구부러진 길 끝
  폐허에 앉은 천년 바람과 만난다
  천년이 물 같다
  고요에 범람하는
  햇빛도 바람도 폐사지 유적이다

  숲을 키우던 물소리들
  돌탑 속으로 들어가 돌이 되었나
  별속으로 들어가 별이 되었나

  아무도 떠나간 숲 슬퍼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 숙였다 드는 사이

  남산 금오봉 1.5K 화살표?
  곁에 왔다 가는 산꿩 울음
  푸른 바람 한줄기
  나를 덮친다.

  ✽국사골 : 경주 동남산에 있는 제1 폐사지가 있는 골짜기

심장을!―최초의 광고

  ―여기가 동로마 비잔티움시대
     창녀들의 집터입니다
     폐허의 에페소 잡초 속을 걷다
     사내의 목소리, 귀가 굽는다
     소아시아 항구 도시 터키 에페소.

  오랜 항해 동안 굶주린 사내들을 유혹하는
  돌바닥에 새겨진
  발바닥 광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부르델*로 오시오 당신의 심장을 녹여 드립니다

  아,
  저,
  장미꽃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심장을 타전하는

  ✽부르델 : 유곽

  마블 거리에 있는 고대의 매춘 숙소 광고. 이 광고는 대리석 길(marble street) 옆 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여기 새겨진 발 그림보다 더 큰 발을 가진 사람은 돈을 내고 여기로 오시오.

봄날―불국사 극락전에서

  불국사 가슴에 극락전 있네
  극락전 가슴에
  금빛 멧돼지 한 마리 가부좌 틀고 있네
  안양문 지나 당신 만나러 가는 봄날
  절 입구, 한창 몸 밝히는 명자나무
  아미타
  잔잔한 당신의 미소 번지는 지금
  당신의 눈 속
  토함산이 다시 한 번 가라앉네

  나는 오늘 극락전 기단 모서리에 서서
  붉은 연꽃으로 눈 뜨는
  침묵의 행간을 걷네
  소멸하는 시간의 잎새 사이로
  아미타
  그 서느러움 끝에
  은밀하게 머물고 싶네

울릉도1―天附에서

  아침 밥상 앞에
  수평선이 척, 걸쳐 있다
  괭이갈매기들이
  흰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울릉도엔
  사람들보다 괭이갈매기들이 더 많다
  오징어 배보다 섬말나리꽃들이 더 많다

  송곳봉이 하늘에 떠 있다
  코끼리섬이 우두커니 서 있다
  딴 섬이 눈 감고 명상중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죽으면
  섬을 떠날 수 없어
  괭이갈매기가 되나 봐
  섬말나리꽃이 되나 봐
  푸른 수평선이 되나 봐

  사람들 모두 바다로 나갔는지
  섬이 조용하다

울릉도2

  섬과 섬 사이에서
  섬을 보면
  섬이 보이지 않는다
  삼선암, 공암, 관음도, 죽도……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그리움의 그늘처럼

  밤에 산 위에서 바다를 보면
  바다는 보이지 않고
  흰괭이갈매기 울음과 오징어 배 불빛만 환하다
  무슨 그리움의 불빛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섬을 보면
  섬이 된 사람들이 보인다
  아니
  섬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울릉도3―天附, 흰 등대 아래서

  새벽에
  노숙자 같은 갈매기들
  테트라포트 위에 오두마니 앉아
  나를 본다.
  고독한 저 눈빛 봐.
  저놈도 고독의 사냥꾼?
  등대 벽에 누가 낙서를 갈겨 놓았다
  ―하은 영수 수평선과 자알 놀다 감
   2009. 설날

  등대 아래 서서 등대를 보면
  누군가의 등대가 되고 싶은
  당신이 보인다
  아, 등대가 되지 못한 내가 보인다

울릉도4―수평선은 없다

  수평선과 2박 3일 함께 잤다
  수평선은
  벙어리처럼 입이 없었다.
  수평선의 저 알 수 없는 심연
  수평선의 발 아래, 저 시퍼런 낭떠러지
  심연의 끝은 어디쯤일까
  사람들은 수평선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수평선은 어디 있는가
  갈수록 아득하게 깊어지는 수평선

  섬말나리꽃 향보다 더 깊은
  괭이갈매기 울음보다 더 투명한

울릉도5―대풍령 절벽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휭!
  대풍령으로 빨려 올라갔다
  사방에서 바람들이 모노레일을 타고
  휭!
  바람을 만나다니
  휭!
  낯선 섬을 만나다니
  옛날처럼 가슴은 뛰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절벽 끝
  수평선을 보고 또 보았다

  도동 쪽에서 오징어 갯바람이 오고
  독도 쪽에서 모노레일 수평선을 타고
  젊은 고래와
  섬초롱꽃 일행이 막 도착했다

귀밑 사마귀

  ―침 넘기지 마세요 갑상선 좌엽 세포 뜯습니다
  목 밑 깊숙한 곳, 뜨거운 바늘 꽂힌다
  7월 20일
  별것 아닌 초음파로 나를 검색하는 날
  갑자기 목월 시인의
  ‘귀밑 사마귀’ 시가 왜 떠올랐을까

  어느 강을 건너서 다시 너를 만나랴
  울음 우는 사람……

  갑자기
  왜‘ 귀밑 사마귀’가 초음파로 내 몸을 훑고 갔을까

  어머니
  그리움의 나무 침상에 누워
  ‘귀밑 사마귀’ 초음파로 지나가는 그 사이
  ―끝났습니다
  바늘 목소리

  뜨겁게 귀에 꽂힌다

  7월 20일 나의 헤드라인
  귀밑 사마귀!

별의 탄생

  세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이 세계의 극히
  미세한 무엇엔가 숨어 있다.
  ―월트 휘트먼

  아버지, 나는 별이 오는 길 보았습니다
  가을 밤 0시 50분, 우주의 첫별 하나 탄생했습니다
  몇 백 광년의 은하를 건너
  수술실 아내의 얼굴은 또 다른 별의 심연이었습니다
  심연 너머 광막한 우주의
  오리온좌 카시오페아좌 별 무리들 사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간절히 간절히 기도만 했습니다
  그 막막한 우주의 시간을 건너뛰어
  정말 찰나였습니다. 별이 오는 길은
  지상에 도착한 시퍼런 별의 몸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경이의 별, 그 손과 발,
  꼬물거리는 손과 발 사이로 스쳐가는 아득한 은하의 강물
  내 손에 가만히 번져 왔습니다
  아버지, 아내는 가을 밤 0시 50분
  몇 개의 은하수 건너
  나와 함께 첫별 마중을 나갑니다

이슬―병실에서

  나 기꺼이 돌아가리

  바람 한줄기 따라

  내게 남은 짧은 시간

  둥글게 깨어지며 껴안으리

  사방으로 세상은 둥글게 열려 있고

  며칠 사이

  이토록 너를 가까이 느낀 적은 없다

  구름밭과 가시장미 넝쿨로 뒤엉킨 길

  저무는 풀잎 끝에

  흰 뼈의 네 몸 만져진다

  나 기꺼이 돌아가리

  바람 한줄기 따라

  내게 남은 짧은 시간

  저무는 이승…… 아, 둥글고 눈부시다!

울링간* 성당에서―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1

  슬픔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한밤중 무너지는 산사태처럼
  정상 가까이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 오지의 울링간 성당
  오래 된 나무가 새벽에 추락했다
  순간, 하느님도 보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박쥐 떼들이 야자나무 벼랑에 가파르게 달려 소리치고 있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마구 뒤엉켰다
  오래된 숲과 숲 사이로

  지금까지 내 몸이 끌고 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

  슬픔은 예고 없이
  피투성이
  맨
  얼굴로 찾아왔다

  ✽울링간 : 파푸아 뉴기니의 ‘MADANG' 마당에서 들어간 오지의 마을 이름, 언덕 위에 100년 전에지었다는 아름다운 성당이 있음.

시커먼 입―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 

  운명이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오래 된
  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원주민의 새벽에
  숲은 달처럼 고요했다

  숲은 알 수 없는 밀어로 수런거리고
  오래된 나무는 오래된 숲만큼 아름다웠다
  박쥐들이 대낮에도 하늘 가득 날고 오래된 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쓰러진 나무의 발바닥은
  그가 걸어온 길 만큼
  갈라 터져 있었다.
  참 많이도 헛디딘 길, 갈라 터져 있었다
  숲으로 가는 길은 사방으로 뚫렸고

  삶과 죽음의 입구는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내 앞에
  단 하나

은빛 변기―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 3

  언제 우리 눈부신 숲 지나왔던가
  강물은 또 그 숲 기억하고 있던가

  숲속에서 내가 길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아내는
  변…… 기!…… 변…… 기!…… 찾았다
  절벽 바위 틈을 기어 나오는 듯한
  가느다란 은빛 물소리
  봄비에 새 잎 돋아나는 듯,

  고통 속에 길은 다시 열리고
  나는 깨달았다
  고통속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새벽의 등뒤에서 푸들거리는 지나온 나의 길들
  치명적인 슬픔 비켜선
  내 안의 길들을

물소 떼, 드라마―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 

  드라마는 언제나 극적이다
  구름 군단이 몰려 오고 있었다. 물소 떼들 같은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야생의 들판을 달려온 물소 떼들
  검은 입 벌린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속사포처럼 뛰어들고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었고
  내 몸에서 끌려 나온 길이 또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생사의 출구는 단 하나
  구름 군단 사이로 물소 떼들이 피를 흘리고
  내 몸에서 흘러 나온 길들이
  마구
  헝클어진 숲 사이로
  물소 떼처럼 뛰어다니고

구름의 행방―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5

  구름의 행방은 늘 묘연하다
  달려도
  달려도
  하느님도, 천상의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은 원주민의 얼굴처럼 검은 절벽뿐

  파나돌, 안티바이오티……
  파나돌…… 안티바이오티……*
  흰 구름 한덩이가 검은 구름의 행방을 쫓는다

  ‘울링간 성당’→119천사→ 파푸 뉴기니 비행장→ →
  포트모르즈비 쪽 해발 4000미터 산맥을 넘는 구름 떼→ →119천사
  →인터내셔널 응급실, 낭자한 구름의 뼈.

  폭풍속의 행방, 늘 묘연하다

  ✽진정제, 항생제 이름
  ✽✽ 파푸아뉴기니 수도의 병원

미카엘 K 신부께―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 6

  나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그
  처음 가는 길
  나의 길에 빠진 나
  당신의 집에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아침마다 침묵의 경전 몇 구절 힘들게 꺼내 보여준 당신

  당신 숲의 그 처음 듣는 새소리 날갯짓 소리
  내 귀에 아주 선명했습니다
  어제의 바다보다 더 날카롭고 깊고 깊게

노을의 무게―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7

  포트모르즈비, 패시픽 2층 병실

  아내가 서쪽 창가에 누워 있다. 찢어진 흰 구름보처럼
  끙끙대며 타는 저녁놀, 아내의 오줌빨 서쪽 못물에 비친다
  아내는 자주 변기!를 찾았다. 애인을 찾듯
  아내가 변기를 찾으면
  황급히 나는,
  서쪽 가랭이를 열고 붉은 못 속으로 들어간다
  무덤 같은 불두덩이 노을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어찌 알리
  아내의
  두렵고 깊은 저 노을의 무게!
  은빛 변기보다 더 눈부신 사랑의 무게를

맨발 천사―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길이 아니었다8

  ……꽃이면서 꽃의 그림자이고 나무이면서 나무 잎새의 그늘이고
  햇빛이면서 햇빛의 맨발이고, 시냇물이면서 또한 바닥에 깔린 흰 몽돌의,

  이를테면
  그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진 않습니다.
  가녀린 날개는 지상에 딱 붙어
  맹렬하게 파닥이는 벌새
  벌새 얼굴의 프시케입니다
  히말라야 산의 눈 덮인 가파른 산길을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오르는
  지하도 어두운 계단을 시시각각 오르고 있는
  맨발

  세상의 어떤 짐승 내장보다 더 시뻘건
  노을이 마구 뒤엉킨
  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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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천사

김성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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