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철도 9 9 9

한국현

반구대 암각화

 낙서를 했다 염소에 대고 염소가 뜯어먹다 가버렸다 나는 여섯 살 낙서를 했다 구름에 대고 구름이 엄마 구름 품속으로 밥 먹으러 가버렸다 나는 일곱 살 나는 여덟 살 늦은 엄마를 기다리며 담에 대고 낙서를 했다 내려놓은 보퉁이처럼 고개 수그린 엄마에게 주인집 아저씨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나이를 먹었다 나는 마흔 살 낙서를 했다 족보에 대고 늘 집을 비웠던 아버지가 나타나 나를 집어던졌다 울면서 세어보니 나는 백 아흔여덟 살 집을 나가 낙서를 했다 여자의 등에 대고 함께 낙서하던 여자가 낙서를 지운 등을 보이며 가 버렸다 나는 육백 일곱 살 심심해서 몸에다 낙서를 했다 그들이 옷을 벗기더니 낙서를 했다고 마구 때렸다 쓰러져 계속 누워만 있었는데도 나이는 이천 스무 살 낙서를 했다 밖에서는 악어가 내 남은 한쪽 다리를 기다리고 동굴 벽에 고래 한 마리, 고래 두 마리, 고래 열 마리를 그리는 동안 나는 만 이천 살 낙서를 했다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더 이상 헤아리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별은 진다. 지는 별빛은
  오랜 울음보다 먼저 사라진다
  별이 지는 쪽으로 길이
  긴 허리를 구부린다

  누구나 가슴을 가로지르고
  굽어 사라진 길을 두고 산다
  나 또한, 너무 돌아왔거나
  다만 어긋났을 뿐인 길에서
  둥지에서 떨어져 가는 별을 본다

  왜 새들은 가장 부드러운
  가슴 깃털을 깔아 집을 짓고
  바람을 낳아 날려 보내는가, 왜 달은

  가슴을 뜯어내고 살얼음 낀 강가에서 뒹굴고 있는가

  밀물처럼 오고
  썰물처럼 가는 길, 저기

  달이 지나간다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나비가 날았다

  삼만 년 만에 내려와 바다를 
  따라 걷던 오솔길이
  숲의 안부가 궁금해져 
  젖은 발목을 말리며 
  서둘러 돌아가는 때,

  동티모르 사메시 로뚜뚜마을
  초경을 한 아이가 
  고양이가 반쯤 떠 있는 개천 물로 
  샅을 씻으며 울고 있을 때,

  이번 생을 싣고 사라져 가는
  비행운의 궤적에서 
  너의 이름을 볼 때, 

  부처도 침묵하고
  네루다도 침묵하는 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골목에서 
  예수를 닮은 소년이 
  곧 터질 공으로 축구를 할 때,

  공중에서 문득 
  탄착지를 깨달은 포탄이 
  꽁꽁 뭉친 몸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

서랍

  동물들은 필요 없는 것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이것을 만들어낸 인간은 당장에 처치 곤란한 것은 무조건 이 안에 넣고 본다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온갖 것들이 이 안에 있다 캄보디아 어디에선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포개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대개의 서랍들이 겉으로는 평온하다

  부싯돌보다도 더 유용한 발명품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열리는 순간 이것은 애초부터 누구를 골탕 먹이자고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이 속을 뒤지느라 반평생을 허비하지만

  조만간 마술처럼 튀어나오는 것들은 쥐라기나 백악기 때부터 쉬쉬 묻어두었던 검은 이야기 잃어버린 만년필이 은밀히 흘려서 엉겨 붙은 유전이나 만들어내고,

  자물쇠가 달린 것일수록 빨리 열린다 전문가는 상대가 쌀쌀할수록 쉽게 여는 열쇠를 만들어낸다 오우, 가방 참 예쁘시네요 어떤 전문가에게도 한사코 열리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남은 일생을 메아리가 울리는 긴 복도를 주춤주춤 걸으며 중얼거린다

  사랑이 온갖 잡동사니와 잡동사니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한쪽을 닫으면 한쪽이 열리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의 관계 주저하다 가지런히 벗어둔 신발을 하나씩 나눠 담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지만

  어느 날 가슴 철렁한 편지도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

  어쨌든 이것은 계속해서 열리고 닫히는 것 뻑뻑하고, 가끔은 쑥 빠지고, 남의 것은 유혹적이고, 누군가의 서랍이 엎어지면 산지사방 흩어진 일생을 보면서 쯧쯧쯧 혀도 차면서

  ✽400여 년 전 경북 안동에 묻힌 미라와 함께 발견된 아내의 편지 중

비디오를 거꾸로 틀었다

  ……활짝 열린 아파트 베란다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초점 없이 바라보던 사내가 대낮에도 침침한 거실로 들어가 어항의 물을 갈아준다 비늘이 떨어져 나간 금붕어 서너 마리 수면에 대고 주둥이를 뻐끔댄다 ……벽에 붙은 거울 속에서 언뜻언뜻 일렁이던 지루한 시간의 물결들 얼어붙자 불 꺼진 방은 고분 같다 부장품들이 눈에 익다…… 동쪽으로 기우는 태양 아래 노란 택시가 지나간다 뭉개진 피 반죽의 덩어리 척척 붙어 개 한 마리 일어서 두리번거리다 혀를 축 늘이고 느릿느릿 도로를 건너간다 구름이 지나간다……짓무른 꽃들이 부풀어 나무 위로 사뿐히 뛰어 오른다 연분홍 복숭아 꽃구름 아래 울고 있던 아이는 집으로 들어간다 함석지붕 처마 밑 빈 제비집에 어둠이 흥건히 고여 있다……구름이 한결같이 흘러간다……산파가 다라이에서 핏덩어리를 꺼내 탯줄을 잇는다 여자의 샅 속에 집어넣고 치마를 여며준다 귀밑에 희끗한 새치가 몇 올 돋은 여자가 몸을 뒤틀다 앉아 있다 배가 무덤처럼 부풀어있다……무덤도 이내 사라진다…… 

구름처럼 가벼운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뻐꾸기가 우는 카페
  이층 테라스 밑으로 
  구름들이 흘러간다 
  언뜻 보기에는 다를 것 없어도 
  조각구름 하나라도 같은 구름은 없다
  이층까지 올라와 마주 앉은 구름이 
  오늘따라 굳어있다 멈칫 멈칫 더듬는 
  그의 말 사이로 빠끔히 열린 문
  나도 구름이므로
  살짝, 계단 아래로 내려가 본다
 
  지하실 안에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잡동사니들, 멈춰 선 시계 옆
  쌓인 먼지에도 눈감지 않은 인형이 응시하는 
  더 깊이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참으로 어둡고 깊기도 해라!)
  뻐꾸기가 뻐꾹 우는 소리에 서둘러 올라오니
  텅! 문이 닫힌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고
  가방을 만지던 구름이 말한다
  가끔씩 빠끔히 열리는 허술한 문을 
  단속하러 가는 모양이다

  덜그럭 덜그럭 걸어간 구름을
  기다리며 바깥에서 흐르는 구름을 내다보는 구름

  한때도 구름이었던, 
  이내 구름이 될,
  이미 구름인,
  서로 스미어 한 몸이 되려거나 
  겉도는 구름들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뻐꾸기가 우는 사이,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사만 팔천 십이 년이 흐른다.

맨발의 이사도라

  너무 무거운 뼈의 집들
  보초처럼 서 있는 가로수들
  늑골처럼 손잡이가 매달려 흔들리는 
  버스 복도를 비틀거리며 지나와 
  가위질하는 시곗바늘이 재단하는 저녁 속에는
  이제 구겨진 발자국들이나 살게 하겠어요
  다 알고 있는 거리와 퇴근
  휴일과 약속 시간에 나누는 식은 악수들

  밑 빠진 시간의 계단 위에서
  자꾸만 헛디딤 질하던 신발도 벗어던지고
  강처럼 흐르는 발바닥으로 춤을 추면
  갇힌 피가 쿵쿵 화염병처럼 터져요

  머리가 환해져요 멈추지 않겠어요
  애인의 머리칼 속에도 실눈 뜨고 기어들던 찬바람을
  다시는 서서 생각하지 않겠어요
  죽었던 발자국들도 화들짝 깨어나

  발길질하게 하겠어요
  싸락눈 내려 새치가 돋던 세상
  화덕같이 달아오르던 다리를 주무르며
  황홀하게 지쳐서 쓰러져 노곤히 잠들 때까지

  피 속을 흐르던 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는 날 
  당신의 지도에 점 하나 찍은 흔적

한 입의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아이스크림 한 입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입의 여자를 사랑했네. 
  아이스크림 그 한 입의 매혹, 
  그 한 입의 하늘거림, 
  그 한 입의 칼날,
  그 한 입의 갈증, 
  그리고 혀에 닿는 순간
  이내 사라질 듯 사라질 듯한 
  그 한 입의 여운과 배신을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그러나 아무 용기에나 마구 담기는 여자,
  안개 같은 여자, 갯벌 같은 여자,
  잠꼬대로만 웅얼웅얼 제대로 불러보는 여자, 
  이 빌어먹을 낙서 속에서 뒹굴다 

  체모만 흘려놓고 가버리는 여자, 
  나 혼자 품으려면 가슴을 꽝꽝 얼려야 하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소문처럼, 혀들을 떠돌다 사라져 가는 여자,
  불타는 오후의 아이스크림 같은 슬픈 여자. 

  ✽오규원의〈한 잎의 여자〉를 오마쥬 무드로 패러디함.

오징어

  당신이 배 갈라 뒤집은 것,
  당신이 여기저기 널어놓은 것,
  이미 납작해진 발자국들

  당신이 쫙쫙 찢어발긴 것,
  당신이 하품하며 씹어대는 것,
  이미 딱딱해진 빈 허물

  몸에 새겨진 파도의 지장指章과,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을 떼어내고 굳어있는 산호초와,
  아직도, 아직도 발길이 머무는 해협을
  거슬러 오르는

  먹물을 뿜어내며
  중력을 벗어던지고
  별들을 좇아 헤엄치는

  나는,

봄날은 간다

  처음엔, 사소한 일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곁가지 끝에서 어렴풋이 어른거리던, 뇌수가 
  느닷없이 폭발한다
  철문이 벌겋게 녹슨 집
  그늘 깊은 안마당에서
  담장 밖을 내다보는 목련은
  활짝 피어 무엇을 기억하려는 것일까?

  모두가 꽃구경을 떠나기라도 한 듯
  집들은 빈 것 같은데
  늘 집을 비운 아버지
  맥고모자를 쓰고, 나보다 젊은 그도
  윤곽 흐린 사진 속에서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진작에 돌아와
  마당 안을 그늘처럼 서성대다
  봄이라고 한번
  바깥을 내다보는 것일까?

  하기는 나도 꽃구경을 가 사진을 찍고
  더 이상 무엇을 기억하지 않겠다는 듯
  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꽃 소식은 북상하고
  관광열차도 연이어 지나가고
  몸 위에 새겨진 빈 껍질의 이름을 달고
  목련은 남아 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인지
  새로 찾아오는 것인지, 모든 봄이
  한 번의 피었다 지는 봄인데
  이쪽 골목이 저쪽 골목에 슬며시 길을 터줄 때
  목련은 짓무르기 시작하고

  골목길을 돌아 나오면
  어느새 비루먹은 개처럼 지는
  목련,

  봄날은 간다 

까마귀를 안고 있는 여인*

  알잖아요, 저 눈빛
  가지 부러져 떨어지던 새도 
  올무를 비껴가던 오소리도
  자취마저 스러진 들녘
  날 선 바람에 살갗이 벗겨져도
  머리칼 죄다 뜯겨도 
  뿌리 가득, 손아귀 한가득
  버티는 풀포기를 봐요
  땅을 기던 벌레들의 숨소리까지  
  낱낱이 기억하는 눈빛을 봐요
  발목까지 베인 벼들을 거느리고,
  축제의 폭죽처럼 놀이 타는 저녁에도
  쉽사리 몸을 빼 달려가지 않는
  언젠가 한 번의 허수아비를 봐요
  하늘의 내부까지 뻗친
  깜빡이지도 않는 눈빛을 봐요
  호기심도 아니고 발버둥도 아닌
  알잖아요, 저 눈빛
  쌓이는 먼지 속에서
  곰팡이 스며드는 영정 속에서도
  은밀한 사방이
  눈빛을 갈고 있어요

  ✽<Woman with a crow>, 피카소, 1904, 파스텔

목걸이ㅡ영진에게

  늪으로 들어선 듯
  겨우 걷는 걸음으로 다가와
  몸짓으로, 
  몸짓으로 졸라대는 아가야 
  
  어쩔 수 없구나,
  가는 목을 내밀으렴

  아빠 목에 걸렸던
  우스꽝스럽고, 뻔뻔한
  터무니없이 빛나는
                
  칼날같이 차갑던
  이, 은 목걸이

  걸어줄게, 아가야
  묵묵히 고개를 수그리렴

비 내리는 날

  보이지 않는 그림자
  어디다 두고 왔는지
  등 뒤가 허전해진다
   
  마침표가, 툭, 툭, 
  애써 이은 생각을 끊어 놓는다
  빗방울 끝에 실려와
  두서없이 찍어대는 지문들

  당, 딩, 동, 댕, 둥……
  (너의 이름이 뭐였더라?)

  어떤 지문은 문지를수록 또렷해진다
   
  비 내리는 날,
  내가 한때 이끼처럼 깃들었던
  고인돌도 침수되고  
  구석구석

  숨겼던 잡동사니들, 
  둥둥 떠오른다

  맴돌다 
  떠내려간다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
  비 내리는 날

안개

  안개 속을 걸었지요. 기다린다고 마음의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둔 것은 아니지만 새삼 눈썹이 하얗게 샙니다. 걸음마다 불쑥 열리는 새로운 길. 내부를 밝게 비추는 안개의 등불 속을 새 울음이 날아갑니다……그렇구나, 날개 달린 소리는 메아리가 없구나. 사람은 왜 부딪히고 메아리를 울리는지? 소리의 거울에 비치는 당신은 누구인지? 점점 짙어져, 내게 몸 비벼오던 생각의 입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리 먼저 지워지고, 몸통도 지워지고, 온갖 경계 다 지워지면 당신마저 지우고 문득 깨어나고 싶습니다. 세월을 핑계로 어슴푸레한 웃음으로만 남긴 당신. 이제 번개처럼 지나가시지요. 쓰러지면서 혹처럼 얼얼하게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 와서 나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

  내게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때에 따라 블루, 혹은 핀 꽂힌 나비의 꿈이라고 부른다. 구름이라고 부른적도 있다. 컴퓨터 모니터 안에서는 MISTY라는 이름으로 불려 가 안개처럼 지상에 없는 나라로 스며든다. 가명으로 숙박계를 적어 내고, 가발을 벗어두고 떠난 여자의 뒤에 남아 길을 잃고 두리번거린다.

  눈 뜨면 뒤집힌 주머니처럼 널브러진 사막. 꿈에선 듯 들은 이름을 기억해 내려하면 수 천 장 바람소리만 들리고 그중 한 장 속에는 틀림없이 쓰여 있을 것이라고 집어 올리면 휘-ㄱ 하고 이마를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한여름 비 오는 밤 번개 번쩍였을 때 그 이름 잠시 들릴 듯도 했지만 곧 캄캄함에 울기도 했다. 차라리 귀를 잘라 번개 속에 던져 버리고도 싶었다.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빨리 끝장내고 싶었던 어금니의 통증도, 간빙기도 쉽게 저물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가발도, 가을도 서둘러 떠나갔다. 

  밤이 왔다. 지금은 이제 막 오르트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혜성이 내 이름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만나면 부를 것이다. 불러서 세워두고 물을 것이다. 이제 와서 나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

바다철도를 탔다

  유폐된 방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빗소리를 듣다가

  자다깨다자다깨다자다
  빗소리가 내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누가 내 꿈을 꾸고 있구나

  설핏 든 낮 꿈에서 여보, 당신 부르면서
  한평생을 같이 산 듯한 어떤 낯선 복식의 얼굴을 기억하려다 

  나도 빗소리로 이름을 중얼거린 적이 있다

  들킨 빗소리는 철도를 타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지만
  다음 열차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바다에 갔을 때 
  나 이미 바다철도에서 내린 적이 있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출발역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한평생 어간을 떠나지 못하던 사람에 대한 소문도 있었지만

  인생은 어디에 적어놓기도 전에 잊는 파도의 기억 방식
  날개의 방식 그냥 기척으로 지나는 방식

  철새도 지나다

  지치면 무리에서 떨어져 바다철도를 타고 간다
  날개는 팔이 되어 손을 흔들고

  손을 흔들고

  대청도가 종착역인 바다철도 693호선을
  시인들은 동백철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이하랴, 
  봄날은 너무도 짧으니
  마지막 열차가 소청도 당산을 채 지나기도 전 
  하행해, 내려온 바다열차가 지날 때
  댕강 댕강 목을 분지르며 철도를 타는 동백들

  바람과 달의 속사정이지만, 어느 날 
  유난히도 바다철도에 붐비는 그들이 
  동백나무에겐 슬프지 않은 슬픔의 눈물

  가슴 아래로 가라앉는 배에서 흘러나와 
  말줄임표로 떠다니는 아이들의 신발을 보면서 
  흘리던 바다의 눈물이 그렇듯이.

  수평선로를 타고 바다열차는 오가지만
  그것은 제각각 다른 이의 수평선

  누구도 죽음과 태양과 나에게로 오는 바다열차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누구나 바다에 이르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얼굴모를 그리움을 
  수평선에 두고 바라보고

  나의 바다철도는 누군가의 그리움의 행로이므로

  수평선 상에 서 있는 당신 앞에 
  방금 파도가 기억하고 떠난 기척에 대해 경배를!

  아아, 혹시 그이였나?
  빗소리로 중얼거리다 내게 들킨 당신

  빗소리를 들으며 
  물의 유전자를 나눠 가진 우리는
  바다를 그리워한다

  유폐된 방의 진흙 같은 신발을 지나 빗소리는
 
  빗소리를 타고 간다
  바다철도를 타고 간다
 

타이타닉 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바람이 대신 듣고
  바람이 부르는 소리, 그냥 내가 다 듣는다
                                  
  푹신한 양탄자에 발이 잠기던
  불침선不沈船의 갑판 밑 
  이어지는 파티의 불빛 아래
  공기는 나른하고 시선은 은밀하다
  잔을 부딪치는 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투명하게 부르는 소리,
  빙산 속에 얼어 있다
  
  부딪혀 불꽃 튀는 날
  불의 얼음을 쩡, 쩡, 울리는 날
  기꺼이 침몰하리라!

한밤의 트로트―속도의 사회학

  꿈과 헤어지는 데는 어떠한 결심도 필요치 않았다
  묵묵히 그저 잊히는 것
  지하철 공사로 열 길 가슴이 파헤쳐져도
  답답한 듯 말을 더듬는 전파상 앞을 지나기도 하면서
  그동안 헤어지는 만큼의 새롭거나
  낡은 유행가를 부르며 살았다 철들자
  곳곳에서 영문도 모를 해머를 맞아 집들은
  허물어졌고 집 떠나 흘러 다니는 곳마다
  민방위 날 사이렌은 어김없이 을러댔다
  시간 약속 잘 지키는 가상 적이 물러가기를
  가까운 대피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는
  세월은, 소화불량, 참으로…더, 디, 게…갔다
  통일호, 군용 열차, 새마을호를 타고
  어느새 다짐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남은 것도 미지근한 맥주에 눅눅한 오징어처럼 씹다가 뱉었다
  마지막 연차 예비군 훈련장에서 빠져나와 쥐처럼 낮술을 마실 때
  세월은 별안간, 빨리 갔다 띄엄띄엄
  추석에 TV에 나와 고향역을 부르던 나훈아도
  KTX가 개통되면서 순식간에 잊히고
  재단이 팔아먹은 모교의 추억을 재건축한 상가의 대형 횟집에서는
  동창회장의 선거 승리를 기원하는 교가가 4비트에서 8비트로
  8비트에서 16비트로 불렸다
  중풍 걸린 스승을
  입만 살았다고 욕을 하면서 입가심 맥주를 마시던 통닭집에서
  퇴화된 닭의 날개를 뜯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그것도 날개라고 그동안 언제 한번
  훌쩍 날아볼 꿈이라도 키웠던 것처럼
  가끔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꿈과 헤어지는 데는 어떠한 결심도 필요치 않았다
  묵묵히 그저 잊히는 것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비몽사몽 목이 말라 머리맡을 더듬다
  느닷없이 술이 깨는 지금은
  아아, 누가 틀었는가?
  트로트같이 늘어지는 한밤이다

1984, 공단도시, 성탄전야―기쁘다 구주救主는 오셨는데‘ 나’의 주소로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 구주를 찾아 나섰다

1
 
  텔레비전을 끄면 어떤 복음도 없었던 그날, 세상의 거죽은 술렁거렸고, 피는 흘리겠지만 채 구주가 되지 못할 태아를 담으며 몸 버린 마리아들로 여관은 가득 찼다. (그 해 4월 10일 자 신문은 호주 의료진이 사상 처음으로 냉동 수정아 출산에 성공했다는 외신을 보도했다.) 시멘트 거푸집처럼 혼자서 두려운 젊은‘ 나’들은 일찍부터 숙소를 빠져나왔지만 역시 동시 상영관으로 하나 둘 밀려갔고 극장 구석에서 얼굴을 가리고 담뱃불을 그어대 외롭게 다문 이빨들만 반딧불처럼 환하게 떠다녔다. 세상의 안쪽에서 기어 나온 쥐새끼가 구두를 꽉 물고 달아났다.

  드디어 밤이 돼, 1984년은 어떤 연유로 저물어 갔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태어났다던 나라 인도 보팔 시에서는 12월 초 끔찍한 사고가 있었지만 곧 잊혔다.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새어 나온 유독가스로 수천 명이 죽었는데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고타마 싯다르타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소문 무성한 빅 브라더 대신 백화점 옥상에서 대형 산타클로스가 흐뭇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거리, 땅위에는 별처럼 많은 불들이 켜지고 불 안 켜진‘ 나’들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걸음으로 포장마차를 찾아 소주를 마셨지만 가시밭 길은 부르튼 우동처럼 금방 꼬였다. 하느님의 은총도 희미한 등 깨진 전봇대 밑에서 죄의 고백 대신 낮술부터 밤술까지 죄다 토해 놓았을 때 그것도 물의 속성을 가졌다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느님 그곳에도 임하실까 흔들흔들 생각했다.

2

  어머니,‘ 나’ 낳을 때 혹시 세 사람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기억해 보세요. 한 사람씩 왔을 수도 있고, 예수님 나신 후 이천 년 가까운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구태의연하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갖고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전기세 용지나. 이름에만 쌀가마가 쌓인 만석동萬石洞의 됫박 같은 무허가 건물 철거 명령서, 혹은 한 이십 년 미리 나온 징집영장을 들고 왔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어머니, 그때 우리 집 위에 별 하나 머물고 있지 않던가요. 그때는 초롱했을 내 눈동자를 닮은 별 하나, 밝지는 않았다 해도 오래도록 떠 있지 않았던가요,잘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3

  가물가물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땅위의 사람들과 희미한 교신을 하느니
  하늘의 별 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어서 가 경배하세*
  어서 가 경배하세

  ✽가톨릭 성가,〈 글로리아 높으신 이의 탄생〉 중

가짜 하루

  가짜 하루가 밝았다
  가짜 희망을 노래하는 가짜 방송을 틀고
  가짜 유통 기간을 확인하고 가짜 상을 차린다
  가짜 신문을 보며 가짜 식사를 하다
  가짜 교회 가짜 목사들이 가짜 신도들을 동원해
  가짜 재산 다툼을 한다는 가짜 기사에 가짜 혀를 찬다
  앞에 서면 가짜가 되는 거울을 보며
  가짜 미소를 싱긋 지어보고
  가짜 일을 하러 가짜 길을 나선다
  가짜로 따르는 가짜 상사가 보이면
  가짜 시계를 흘끔 봐
  지각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가짜 사람들과 가짜로 궁금한 안부를 나눈다
  가짜 오늘까지 가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피곤하다 때려치우고 가짜 꿈을 펼치고 싶지만
  가짜 사회는 만만치 않다
  가짜 오후에 가짜 애인에게 전화해
  가짜 주말에 가짜 야외로 나갈 가짜 약속을 하니
  가짜 힘이 가운데로 몰려 불끈 솟는다
  가짜 서류는 가짜 결재가 끝났다 가짜 건물은 또 무너질 것이다
  가짜 퇴근까지는 가짜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가짜 애인은 가짜 시인을 좋아한다
  가짜 화제를 위해 가짜로 아픈 가짜 시집을 슬쩍 읽는다
  가짜 절망이여,
  요즘 갈수록 가짜 퇴근길도 밀린다

  시도 때도 없이 끼는 가짜 안개 속을
  가짜 한강 다리 위로 가짜 차들이 흘러간다, 이렇게 많이
  이렇게 많은 가짜 사람들을 가짜 죽음이 파멸시켰으리라
  가짜 나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짧은 한숨을 이따금 내쉬며
  몇몇은 가짜 창밖으로 가짜 고개를 내밀고 멍하니
  바라보면서*

  가짜 산은 가짜 산이요
  가짜 물은 가짜 물이로다

  ✽T. S. Eliot의 <황무지>에서 차용

봉봉 관광

  봉봉 관광의 통통한 바퀴는 세상의 모든 길을 감아온다
  (물론, 구석이나 샛길은 지워진다)

  봉봉 관광을 타는 동안은 길이 꼬이거나 끊기지 않는다
  봉봉 관광에서 불행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주마간산의 경쾌함이여!)

  도중에 내린 사람은 불은 우동처럼
  툭, 끊기는 길로 갈 수도 있다. 22층 아파트 옥상까지
  걸어 올라간 그도, 한때는 봉봉 관광을 탔다

  봉봉 관광으로 정상까지 오른 남해 금산 보리암에는부처가
  없다. 인도印度로 간 사람은 다시는 봉봉 관광을 타지않는다

  여왕벌처럼 알을 낳는 봉봉 관광. 버스에 탯줄을 이은사람들이
  멀리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바다를 오려 간다

  얇게 저민 시간의 살들이 회 접시 위에서 푸들푸들 떨고 있다

  관광 소주에 취해 바다에 대고 오줌을 갈기다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면
  별은 이마 위에 떠 있다

  봉봉 관광을 타고 배꼽별이 뜬 곳으로는 갈 수 없다!

  당신도 타본 봉봉 관광. 나날이 번창하는 봉봉 관광

까치 울던 날

  십자가와 TV 안테나 위로
  지나는 고압선
  정맥처럼 불거져 있다
  링거 주사를 맞고 있다
  송전탑 우듬지에 종양처럼 맺힌 것이
  가만히 보니 까치집이다
  철사와 전선 도막으로 
  얼기설기 집을 짓고
  깍, 깍, 
  까치가 울었다 

  커튼을 내리고, 
  손아귀 가득 쥐고
  텅 빈 수음을 했다

유리, 묵시록

  나 전생에 모래였노라. 세상의 모든 길들 다다른 끝에서 한때의 사랑도, 그림자 길던 고통도, 뼈로 남아 사막을 걸으며 이 악물던 원망도 허물어져 바람 한 줄 거스르지 않는 몸 없는 몸, 마음 없는 마음이었다. 힘겹게 끌려와 아직도 쩔그럭대는 길들 바닷가에서 서성거릴 때, 고단한 마음의 무게, 그대로 받아주고만 있었으니, 어지럽게 찍고 떠난 발자국들, 바람과 함께 조용히 지워주며 누워있었다.  

  어느 날 욕망의 크기대로 손만 부푼 포클레인이 가슴 하염없이 퍼 갈 때도 그저 모래였으나, 뜨거운 열에 녹을 때 나 홀연 눈 떠, 이글거리는 마음으로 흘러 다녔다. 순식간에 비린내 나는 세월들 다 일어서고, 롤러가 내 몸을 납작하게 누를 때, 기억의 무게 차마 견디기 힘들었노라.

  나 이제 싸늘히 식어 내장 다 보이며 세워져 있다. 고개 돌려도 그 수모 견디기 힘들었으나, 간간이 어여쁜 시선 만나면 잠시 내 몸 하늘에 포갤 수도 있었노라.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이나 되겠느냐.* 내 몸 위로 지나간 아수라장의 모습들, 처음엔 웃으며 달래다 나직이 위협하고, 가소로운 문명의 주먹을 휘두르고 있으니 

  용서치 않으리라. 인내의 이빨들 마침내 날카롭게 세워 물어뜯으리라. 오래돼 녹슨 황혼이 깔리고 있다. 곤봉에서 튀던 피와, 어린 피에 어리던 무지개와, 어머니의 눈물까지 머금었던 허무의 힘으로 번쩍이는 노여움으로 동맥을 찢어 놓으리라, 심장을 찢으리라. 세상의 모든 유리들 일제히 깨지리라.

  ✽ 《구약성서》, <창세기> 19

어리벙벙

  별안간 줄 끊어져 땅에 떨어진 거미 웅크렸다가 길을 헤매는 거미 계단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면 오르다 넘어졌는지 내려오다 넘어졌는지 어리벙벙 무엇인가 길의 가닥들을 갑자기 끊어간다 성 밖에서 겉도는 K처럼 주민등록번호를 도용당해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트에서 첫사랑의 여인이 애인을 기다린다며 가랑이를 벌리고 팝업 창에서 하염없이 누워있다 갑자기 검은 안경 쓴 군인이 왕이 되고 밤사이 총 맞아 죽고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이 비행기를 몰고 와 바벨탑을 폭삭 무너뜨린다 별안간 아이들은 @ &*^$∂?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다 입을 꾹 닫고 다림질을 하다 전화가 오면 다리미를 귀에 갖다 대다가 비명을 지른다 아아악 이 길들 이 거미줄처럼 끈적끈적 온몸에 한꺼번에 달라붙어 엉켜버린 길들 이 길은 또 어디로 가는 길인지 저 차들은 어디에서 온 바퀴들을 저리도 열심히 굴리고 있는 것인지 도로 한가운데서 갑자기 달려드는 자동차 불빛에 눈이 부시다아아악

봉봉 노래방

  봉봉 노래방이 어디 있지?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당연한 일. 그러나 책상 밑 오래 웅크린 침침한 시간의 냄새 실눈 뜨고 풍겨오면, 일순 머리는 텅 비고, 부르르 몸서리쳐지고, 여기가 어디야? 무언가 두려운 듯 고개를 털어보다가 허겁지겁 전화를 눌러 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마지못해 함께 일어선 그림자, 길―게 늘어지다 따라가지 않고 슬그머니 어둠에 묻히는 수상한 저녁에.

  몇 차례 장소를 바꾸어도 대화는 지루해 스티로폼 조각들처럼 부서져 떨어진다. 쓰러진 맥주잔이 바닥에 남은 몇 마디를 중얼거리다 침을 질질 흘린다. 5초, 8초, 13초의 침묵이 우우웅 소리들을 빨아들일 때, 누군가 주저하다 마침내 봉봉 노래방 가자― 한다. 일순, 얼굴을 쳐다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체념하고 고개 수그려 담배를 챙겨 넣고 서로 뒤서면서 이동을 한다. 

  네온사인 꺼진 거리는 화장 지운 여자처럼 갑자기 늙는다. 목 밑 주름같이 카펫이 늘어진 계단을 내려가, 문 열면 왈칵 쏟아지는 소리가 신생아실의 울음인지, 교성인지, 부흥회의 광신 기도 소리 같기도 하다. 복도 카운터에는 밤잠을 자지 않아 나이 먹기를 그만둔 듯 하얀 얼굴이 취중 속을 둥둥 떠다니며 안내를 한다. 봉봉 노래방에는 없는 노래가 없다. 

  노래를 부르세요, 언젠가 바람의 노래를*
  노래를 부르세요, 흘러가는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한 다발의 노래를**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지요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요***
  그러니 이제 누구에게도 말 걸지 말고
  노래를 부르세요
  땅 위의 산목숨, 이것이 정말일까?
  땅 위에 영원한 건 없어라, 지금 한순간 뿐****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걷지도 말고
  담배 연기처럼 풀어지면서
  제 길을 찾아가세요
  노래를 부르세요

  비 내리지 않아도 남행열차는 떠날 때***** 누군가 화장실을 찾는다. 간혹 미로 같은 복도에서 돌아 나오다 엉뚱한 방문을 열어 흠칫 놀라는 수도 있지만, 사소한 다툼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노래방에도 껄껄 웃으며 얘기하는 인자한 아저씨는 있다. 괜찮아요, 우리 모두 문을 잘못 열고 세상에 들어온 것 아니겠소? 

  봉봉 노래방이 어디 있지? 당신은 물을 필요가 없다. 궁금해졌는가? 궁금해졌다면 봉봉 노래방의 마이크 줄은 이미 당신에게 닿아 있다. 남근처럼 생긴 징그러운 마이크를 입에 대고 노래를 부르든 부르지 않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 그러나 단언컨대, 당신은 망설이다, 도리질하다, 이내, 웅얼웅얼,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이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중 
  ✽✽이상은의〈 언젠가는〉 중 
  ✽✽✽혜은이의〈 열정〉 중 
  ✽✽✽✽〈아메리카 아즈텍 인디언의 노래〉 중 
  ✽✽✽✽✽김수희의〈 남행열차〉 중

무화과

  불쌍하구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니
  (제기랄, 요즘 나는 꿈속에서도 철들었다)

  그들 말대로 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볼거리 많은 눈이 흥건히 담기에는,
  탄력 좋은 차바퀴가 가속도를 줄이기에는,
  자본주의의 길은 나아갈 뿐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꽃은, 길이 흘리고 가 헤매는 사람 앞에서나
  심심하게 피어 있을 뿐
  물어 보라, 그들이 건넨 것은
  들큰한 저녁에 피어오른 한 다발 욕망의 빛깔이거나
  장례식장이나 신장개업 문 앞에 줄 세워져 
  지전처럼 꽂힌 페이퍼플라워일 따름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계절도 없이 어리벙벙 온상에서 피었다가

  뚱뚱한 공기, 아파트 거실 벽에 거꾸로 매달려
  피 모두 빨린 마른 꽃은 
  이제 그만 지고 싶다

  시큼털털하구나
  꽃 지는 서늘함도 없이
  맺힌 열매는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Pete Seeger의 노래

봉봉 모텔

  멀리서 보면, 박공 창에 첨탑 지붕 
  놀이공원의 성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저기 놀러 가자 
  딸아이가 팔을 잡아끌어 
  세상의 아빠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곳 
  간혹 여행객이 들어 밤을 지내고도 가지만
  새로 우뚝 선 봉봉 모텔, 며칠씩 묵거나
  허물어진 유서 깊은 여관에서처럼
  마음 편히 목매달만한 곳은 아니다 
  차일이 내리쳐진 주차장에서
  짙게 선팅 한 차가 스르르 나가고
  막 들어선 차에서 내려 맥반석 자갈을 
  자박자박 밟으며 앞서가는 남자를 
  짐짓 머리띠를 고쳐 매며 뒤쳐진 여자가 따른다
  때때로 방이 다 찼다고 냉정하게 돌려보내는 프런트에서 
  나지막이 지령을 전달받고  
  은밀히 모여들었다가 흩어지는 결사단원들 
  호기심 많은 그 누구도, 모두 몇 개인지 
  세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황망히 방으로 들어서게 하는
  이 정적의 성, 주인은 누구인가?
  자신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저마다 방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을
  몰래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누군가, 혁명을 
  모의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퍼져
  어느 날, 몰래카메라를 좋아하는 당신은
  인터넷에서 은밀히 떠다니는 파일을 
  클릭한다. 봉봉 모텔? 
  모니터에 바짝 붙어, 
  먼저 옷 벗은 남자의 배 나온 
  몸을 키득거리며 보던 당신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 저, 저, 저게 누구야?

고향의 푸른 잔디

  빈 옷들도 스스로 춤을 추는 
  그대의 나라가 있다면
  사물事物들이 제 키 높이의 음과
  보폭만큼의 박자들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휘파람을 실어 보내는 
  그대의 나라가 아직 있다면
  그곳에선 아주 사라져
  한 점, 숨표가 되도 좋으리
  기차를 타면 돌아갈 곳이
  아직 있다는 듯
  대합실 벤치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의 얼굴에 잠시 머무는 
  벙긋, 웃음 속에서
  아픈 몸과, 아프지 않은
  꿈의 음을 이어주며
  동굴이 되어 열려 있는 
  오랜 기다림의 귀를 향하며
 

봉봉 25시 편의점

  24시 지남철의 시간
  테이프로 쩍 달라붙어 있는 
  1+1 
  이건 행사상품 있어요

  얼어 있는 그녀를 위해
  뜨거운 물을 붓는다
  차라리 우리, 방 합치자
  왕뚜껑 밑에서 
  인스턴트 목련이 활짝 핀다
 
  목련꽃 문양의 네이처 화이트 천정 아래서 사랑을 

  백야의 아침
  도시의 등대 방파제에서 
  깡통과 페트병을 싣고 왔던
  두 파도가 섞였다가
  페트병과 깡통을 바꿔서

  싣고 가며 헤어진다

  어찌 되든 살아지겠지 머
  이제 가야겠어
  그래도 국물 엎은 옷은 갈아입고 
  출근해야지 

  나침반의 시간
  너는 남극으로 
  나는 북극으로
  얼기 위하여
  더 꽝꽝 얼기 위하여

봉봉 휴먼팰리스

  팬트하우스 몰라요?  
  팬티가 아니고, 팬트. 최고층
  뭐라구요? 지금 장난쳐요?
  어따 대고, 우리 주인아저씨가 누군 줄 알고 
  당신 택배 처음이야? 너 이름이 뭐야, 어머, 어머, 어머머머
  개 짖는 소리라뇨?
  우리 윌리암은 진작에 수술했어요 
  아 글쎄 우리 집에는 아이도 없다니까요 
  피아노나 치지 마세요 
  일 년 내내 똑같은 곡, 박자도 틀리면서 어휴
  아저씨 이러면 안 되죠, 우리 아파트
  금방 똥값 돼. 부동산 영업 그만할래요?
  미친 사람들 아냐, 휴먼팰리스가
  어디라고 그 가격에 내놔
  아이 시팔 저 새끼들을 그냥 확
  무슨 새끼들이 밤이 되면 더 뛰고 지랄이야
  전세 아무나 줘서 그래요 
  요즘은 글쎄, 개나 소나 다 말을 걸어오고
  심지어 술집 년들도 들어와서 
  물 버려 놓는다니까
  다음 소식입니다. 4대 강 살리기 사업은 “한국 정부 가 세계적 기후 변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 등 재해에 대비하고 새로운 대한민국 창조를 향한 창의적인 녹색 도전”이라며“ 반드시 성공시켜 국제사회에서 기후 변화와 물 부족에 선도적으로 대비하고, 11월 한국에 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등을 통해 선진적인 물 관리 기술과 노하우를 국제사회와 공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어쨌든 내 차 긁고 도망간 놈 못 찾아내면 
  당신들, 다 모가지야 싹 갈아버려
  미치겠어, 끙끙대는 윗집 새끼,
  뭐하는 놈인지 밤낮없이 그 짓하며 내 꿈속을 들락거리는데 
  너, 나 남자라면 치 떠는 거 알지 자궁도 없잖아 
  그런데 요즘 헛구역질이 자꾸 나는 게 
  상상 임신했나봐, 윗집새끼 꺼 
  잠깐, 잠깐, 끊지 마!

하혈

  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
  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
  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

  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
  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피빨간빨간피빨간피

  분홍피분홍피분홍피분홍피분홍피분홍피

  아따마 오늘 햇살 봐라 날씨 직이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
  피검은피검은피검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은피검

  ✽일베(일간베스트)에 올라온 518광주민주화운동 조롱 게시물

복날

  코는 코의 길을 더듬고
  눈은 눈의 길을 더듬을 뿐
  귀의 길을 더듬는 사람 곁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꼬리를 말아 넣은 채
  개 한 마리가 엉거주춤, 
  네거리에서

봉봉랜드 가는 길

  저 남자의 표정, 어디서 본 듯하다
  일곱 난장이가 아장아장 지나갈 때
  신나서 손뼉 치는 아이를 바라보는 저 흐뭇한 미소
  장미축제가 열리는 6월의 주말에 
  봉봉랜드 위로 펼쳐진 하늘에선, 구름도 
  퍼레이드와 함께 발맞춰 흘러간다

  마법의 나라를 거쳐, 모험과 스릴의
  아마존 탐험을 지나, 사파리 버스에서 보면 
  동물들도 인간을 닮은 표정을 짓는다
  심드렁하니 사자가 하품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저기 호랑이가 간다! 

  아, 생각났다 그 흐뭇한 미소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CF 속 멋진 남자가 신용 카드로 
  결재를 하며 아내에게 짓던 미소―
  봉봉 랜드의 영토인 경마장에서 카드빚을 탕진하고
    내 말아, 내 말아
    조금만 더 속도를 내 달려가거라! *
  한강 다리 아래로 아이들을 내던진 아빠도
  그 미소를 짓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정말로 봉봉랜드로 가는 길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면
  정신없이 내달리던 비룡열차도 멈추고
  쩔그럭대는 잡동사니 일상들 슬그머니 살아나는 시간
    다시 또 만나요~ 
  로고송이 울려 퍼지는
  봉봉랜드에서 비롯되는 길은 
  어둠이 스산하게 깔려 있는 길

  그러고 보면 세상의 길은 
  봉봉랜드 가는 길과
  봉봉랜드에서 돌아오는 길뿐인데
  결국에는 봉봉랜드 바로 가는 길과
  에둘러 가는 길뿐

  주중에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차 안에 혼자 앉은 사람은
  살 비린내 나는 시간의 정적을 잠시도 견디지 못해
  주말에 달려갈 저마다의 봉봉랜드를 떠올리며
  코를 후비거나 백미러를 보며 눈곱을 뗀다

  어떻든 세상의 차들은 줄지어 서 있고
  누군가 봉봉랜드에서 컨베이어 벨트 같은 길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
  신호가 바뀌어 서둘러 출발 기어를 넣는 

  나도,
  봉봉랜드 가는 길 위에 있다.

  ✽슈베르트 가곡 <마왕>

아이스맨의 탄생

  진정, 우는 사람은 아무리 위로해줘도 결국은 혼자 남았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 시렁 아래 웅크려앉아 가슴을 두드려 봐도, 가시처럼 목에 걸린 울음을 울지 못하는 사람까지, 세상에는 함께 울어줘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인들 우는 일이 즐거워서 그랬겠는가.

  가슴을 부여안고 뒹굴던 여자는, 마침내 양수처럼 터지는 울음을 쏟아냈다. 한나절을 흐느끼다 말갛게 잦아드는 울음 끝에서 여윈 팔로 이마에 묻은 거미줄을 걷어내면서 어두워져 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늘하고 잔잔해진 마음은 곁에서 함께 울어 준, 애타던 어떤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아이스맨은 울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얼음덩어리로, 울음이 그친 곳에서는 스르르 사라져 어느새 다른 곳에서 울면서 서 있었다.

  자신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어느날 문득 눈 떠보니 이미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울고 있었다. 바오밥 나무 아래에서, 골목 굴뚝 옆에서, 영안실 병풍 뒤에서, 혼자서도 입을 막고 울었던 사람들의 눈물, 모진 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울지 않다가 어느 날 주르륵 내리던 눈물까지 흘러든 바다가 낳은 결정체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바다가 마를 때까지 함께 울었고 그 울음이 새 바다로 흘러서 또 다른 울음들과 출렁이고 있었다

아아아 아이스맨

  언제부턴가 당혹스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아이스맨은 몸이 개운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리, 울 이유도 없을 터의 사람이었다. 아이 잃고도, 남은 자식의 생계를 구걸하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하던 여자의 울음 체증을 풀어주러 다녀온 동안, 고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사흘 밤낮을 힘들게 울어주다가 그래도 도무지 울지 않는 그의 곁을 잠시 비운 사이였다. 오랜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울었던 아이스맨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요즘 들어 부쩍 벌어지고 있었다. 감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널브러진 주검 앞에서 그는 자괴감으로 스스로의 울음을 울면서 그곳을 떠났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슬픈 영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던, 온몸이 눈인 그에게 백태처럼 티끌들이 나타났다.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하자 그 많은 아비규환의 신음들 곁을 제 때에 닿을 수 없었다. 아아, 피곤하다. 과로로 스러지기 직전의 아이스맨은 피로를 풀기 위해 참숯가마 방을 찾았다. 고열의 숯가마 속에 누운 아이스맨은 흘러내리는 물기가, 늘 그렇듯 눈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짚불 꺼지듯 잦아드는 의식에 아무리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해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 울음이 되지 못한 그 많은 신음들이 주마등처럼 한꺼번에 지나며 들리는 가운데, 아아아 아이스맨은 ……

고양이가 돌아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양이에게 어떤 길이었는지는 몰랐다

  도망치는 고양이는 아니었고
  먹이 구하는 고양이도 아니었다

  두세 번 나를 돌아보았다
  스스로 그리 돌아볼만 한 삶은 아니라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생각할 무렵이어서
  처음 보는 고양이였고, 이상했지만
  그래도 알아봐 주나 싶어 고마웠다

  작은 산자락의 아파트로 이사 온 날에는 
  밤새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에 잠을 설치면서 
  불길한 꿈을 꾸기도 했다

  재수 없다고 고양이 박멸을 주장하면서 
  곳곳에 쥐약을 뿌린 사람도 있었다
  인간에게는 별의별 역사가 다 있다

  한겨울 절규하는 울음소리에
  고양이 길가에 
  몇 덩이 하룻밤의 양식을 던져둔 적도 있었지만
 
  이 혹성의 문제가
  한두 인간의 문제가 아니듯
  한두 고양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길고양이를 대면하기는 어려운 일
  가끔씩 고양이와 나는 비껴보았다
  부푼 고양이, 꼬리 잘린 고양이,
  잠깐의 따듯한 볕에서도 거만한 고양이,
  손톱만 한 혀로 몸단장하는 새끼 고양이,
  살얼음 낀 도로에서 
  누추하고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훌쩍, 바람의 옷으로 갈아입은 고양이,

  방금 돌아본 고양이는 털실 공처럼 
  통통, 튀듯 경쾌하게 걸었고,

  머지않아 공이 다 풀리면 
  고양이도, 나도, 누울 테지만
  털실과 탯줄의 원천은 
  아마도 같은 곳이 아닐까
  고양이처럼 걸으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휴일 저녁은 
  문제를 풀기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
  고양이도 나도, 
  그저 털실이나 풀면서 잠기어드는
  기분 좋은 어느 어스름 무렵이었다

엘 콘도르 파사

  하늘에 채찍 자국 남기고
  철새는 날아간다
  달이 그려주는 지도에
  잠시 내려앉을 뿐 
  집은 어디에도 없다, 빈 하늘에 
  쫘악 금이 그어지는 데까지
  또 다른 철새가 날아오르는 데까지

9월

  오랜 날들을 돌아오지 못하리라
  유원지 언저리를 서성이다
  덧없이 저무는 여름
  한 장씩 벗겨져 원망처럼
  허공에 한 번 발길질하고 떠나는
  식은 발자국들도, 헤프던 웃음들도
  오랜 날들을 돌아오지 못하리라
  기차표 한 장씩 손에 쥔 채
  자욱이 기적처럼 멀어지는 흐린 추억
  등 돌린 채로 못 박힌 어깨 너머
  빈 깡통으로 떠다니다
  방파제에 머리를 부딪치며 흐느끼는
  조각난 한여름 밤의 달도,
  다시 초승달이 눈을 떠도
  쿵쿵대던 가슴, 시대도 사랑의 밀어도
  오랜 날들을 돌아오지 못하리라
  오랜 날들을 돌아오지 못하리라

연가戀歌

  나, 귀 떼어 당신 가슴 속 고인
  벙어리 물 한 바가지 퍼 오고 싶네
  (너무 오래 버석한 모래 눈물만 흘렸지)

  나, 두 눈 빼 당신 심심한 손안에서
  빠각 빠각 호두알 소리라도 굴려주고 싶네
  (당신도 비룡열차를 타겠지!)

  사람들은 시치미 떼고 지나다니네 
  신기루는 너무도 견고하네
  오늘도 나는 눈 찔끔거리며
  또 하루 양파 껍질을 벗겼네
  (마음은 내가 살지 않는 빈 집, 좌변기가
  먼저 들어와 허공을 완벽하게 걸터앉는 곳
  엉덩이가 잡탕의 말을 구시렁구시렁 중얼대는 곳)

  나, 먼지로 남아서 빈 하늘 떠다니다
  당신 속눈썹에 잠시 앉아 세상을 흐려놓겠네

  검은 개가 베어 먹고 베어 먹고, 마지막 띄운 달
  둥글어지다 둥글어지다 둥글어지다
  주르륵 흘러내리도록 
  나, 당신 만나지 못한다면, 못한다면
  하얀 이빨들 끝까지 남아
  바드득 바드득 이를 갈겠네

첼로처럼

  풍경을 버리고 떠나서
  머뭇대다 
  마침내 구부러지는 길처럼
  저마다의 생각에만 
  골똘히 빠져있는 
  도로 표지판처럼
  문 닫은 겨울의 해수욕장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 찡그린 낮달처럼 
  더듬더듬 몇 마디 말마저도 삼켜버리는
  흐린 밤의 별들처럼
  차창 가에서 서성대다, 두드리다 
  울다가 돌아서는 비처럼
  가슴 안 컴컴하게 고여 오는 말들이 긁어대는
  절망에서 노래 사이
  아슬아슬 걸쳐있는
  너라는 이름의 현들처럼

초승달

  멀리 왔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다시, 그 언저리

  시간은 우두커니 서 있고
  사람만 허적허적 걸어가는

  아니, 아니

  사람이 물끄러미 서면
  부메랑처럼, 부메랑처럼

  시간이 다시 떠오르는
  거기, 그 자리

하모니카

  들숨에, 들숨에 아카시아,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꽃 
  날숨에, 셋집 아이 더 반겨주던 주인집 검둥개, 날숨에
  뒷동산 고사목에 이상하게 맺혀서 흔들리네,* 들숨에 
  들숨에, 울던 얼굴 핥아주던 혀, 길게 늘어지고
  날숨에, 담배 피우며 낄낄대던 수상한 어른들, 날숨에
  들숨에, 그렇게 사랑은 끌려서 떠나가네
  날숨에, 버들치와 유리구슬, 깨꽃 밭과 제비무덤, 패, 경, 옥**
  짚불 속 감자도, 들숨에 
  들숨에, 식은 기찻길 저 너머로 사라져 가네, 들숨에
  날숨에, 안개의 장막 너머 날아오던 최루탄에 
  날숨에, 날숨에, 엎어지고, 흩어진 세월들, 들숨에
  날숨에, 다락 속 책갈피에서 떨어진 삐라는 
  죽은 자가 쓴 격문을 희미하게 중얼거리고, 날숨에
  날숨에, 사랑의 추억 덧없어 녹슨 달이 떠오르고
  허공에 사리처럼 남은 감은사 석탑, 들숨에 
  날숨에, 바람이 오가며 
  하모니카를 부네, 들숨에, 들숨
  날숨에,

  ✽〈Strange fruit〉, Billie Holiday의 노래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차용

기림사에서 길이 엇갈리다

  달 보러 가자 했습니다. 단단히 여미고 앉은 함월산含月山이, 어두워지면 슬쩍 치마를 들쳐 쟁반만 하게 떠올리는 달. 경내를 가로질러 와, 바위처럼 푹 익은 스님들도 마음 밑자락에 낀 이끼, 고샅고샅 헤집혀 한 번씩 환장한다는 절경의 보름달빛 보러 가자 했습니다. 
 
  전날 경주에는 십수 년 만에 본다는 큰 눈이 내렸습니다. 주말, 어스름이 깔릴 무렵 절 입구 식당에서 먼저 도착한 서너 명은 일행을 기다리며 산채정식을 느릿느릿 먹었습니다. 곡차는 조금씩 자주 마셨고요. 큰 눈 끝에 날이 흐려, 달 보기는 글렀다고 경망스럽게 투덜대고 있을 때, 신라시대에 흠뻑 빠지신 선생님이 제각기 차를 몰고 지나온 기림사 드는 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석궁의 복숭아 향기 피어있는 방을 나와 누더기 옷을 다시 걸친 중년의 원효가 걸어 들어왔다는 길. 아슴푸레한 이야기를 듣는 도중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아왔습니다. 조금 전 앞질러 기림사 경내 어둠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던 뒷모습의 그이가 원효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지스님의 배려로 두 칸이 비워진 요사채 방에 일박의 짐을 부려놓고 일행은 달도 뜨지 않아 무르익은 경내의 정적을 자그락자그락 밟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렸습니다. 촛불 은은히 흘러나오는 대적광전의 꽃 창살 문양을 살피다 요의가 느껴져 홀로 화장실을 들러 돌아오다 매월당 사당 앞을 지날 때, 아아, 나지막한 언덕마루에 다섯 걸음쯤 사이를 두고 세워진 한 쌍의 눈사람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갓 출가해 채 소년의 마음을 벗지 못한 어느 스님이 장난스레 세웠다 싶기도 했지만, 한 쌍이라니요? 그것도 한 분은 귀를 달고 계시고! 귀 단 눈사람은 그 밤에 처음 보았습니다. 세상 소리를 다 헤아려 듣는다는 관세음보살의 귀였을까요? 하지만 다른 눈사람 쪽으로 몸을 약간 틀고 세워진 귀 다신 눈사람은 건너편에 있는 눈사람의 기척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걸음의 거리는 또 어떤 거리였을까요? 토함산이 함월산을 애틋해하는 그만큼의 거리였을까요?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 그만큼의 거리였을까요? 요사채 방에서 정적을 만지작거리며 헤아리다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예불과 아침 공양 후, 출가 전 시를 쓰셨다는 학승께서 주시는 향 맑은 차를 마셨습니다. 시 쓰는 일과 구도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시는 스님의 잔잔한 눈을 바라보다 문득 묻고 싶어 졌습니다. 길은, 어디서, 엇갈리는가? 하지만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곡차의 냄새가 차향을 흩어 놓을까 망설이다, 결국 나 혼자 풀어야 할 화두로 남겨놓고 머금던 차와 함께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아직 기림사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두어 분은 남고, 단출해진 일행은 절 입구 주차장에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늘 그렇듯 혼자서 가야 할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석궁 쪽을 향해 가속기를 미지근히 밟았습니다. 몇 모퉁이 지나다 헛갈려 차를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가늠할 때, 뒤늦게 저편에 떠 있는 낮달을 보았습니다. 희끄무레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바다로 가는 버스에선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다 
  개펄이 보이자 멀미가 났다 
  술 취해 처박혀 잠들어 있는 배들
  포승에 묶인 속수무책의 삶들
  헛구역질 해대며 
  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개펄은 끝이 없었고 미끄러웠고
  바다는 너무도 멀리 있었다
  저런 것이 바다냐고 침을 뱉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맥 빠졌다
  다시는 바다에 가지 말자 
  친구도 자기 집으로 가고
  어머니가 없는 집, 배고픈 집
  찬장 속에서 개펄 냄새가 났다
  기미 번진 달이 떴다

  어느 곳에 속할 수 없고
  고일 수 없을 때마다, 길은 
  바다로 갔다
  마음을 스윽 베고 지나간 초승달이 
  부풀고 있었고
  흐린 하늘에, 곧 끊어질 수평선을 배경으로
  모래 위에 뒹군 자리를 남기고
  떠나는 연인들이 있었다

  선창 그물에 부리 엉켜 죽은 새가
  다리를 모으고 있었고

  방파제에서 생선을 널다 담배를 피우는 
  꾸들꾸들 말라가는 여인이 바라보는
  희끄무레한 낮달이 있었다

  태풍이 지나자
  해초와 비닐봉지, 녹슨 빈 깡통을 싣고 와 
  흉금을 모두 털어놓고
  이제는 지쳤다는 듯 하나씩 쓰러지는
  파도가 있었다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바다나
  차를 몰고 단숨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살면서
  이제 달의 저쪽으로 가는 길 말고는
  더 이상 집 떠나 멀리 간다거나
  맥 빠져 돌아오는 길은 없으리라 
  이제 삶은, 그저 
  계절이 바뀌면 다시 꺼내 입는 옷처럼 
  시시하다고 생각할 때
  시간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피우던 아파트 소공원에서
  불현듯 바다에 홀로 서고
  가슴 밑바닥에서는 
  언젠가의 바닷가,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여행

  어째서 그들은 저리도 아름다울까
  어째서 그들은 저리도 활짝 피어 있을까
  방마다 세워진 영정들이 
  녹음에 우거지는 매미소리를 듣는
  복도 가 긴, 8월의 장례식장
  사진기 든 사람의 어깨너머
  내리기 시작하는
  첫눈을 바라보던 표정일까
  아니면, 풀어져 오르는 향연香煙 너머
  봄날 아지랑이를 바라보던 시선이었을까
  어떤 이는, 사진 속 여행보다 
  더 먼 여행을 조만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단풍잎 구르는 대적광전 앞 3층 석탑 옆에 서서
  잊은 듯 숨겨두었던 얼굴처럼 떠오른 
  낮달을 바라보던 시선일까
  스스로 준비하지 못한 사진에서는
  확대한 얼굴만, 일생처럼
  가까이서 보면 흐릿하다가
  멀어질수록 또렷해져 
  잔잔한 웃음이 되살아난다 
  문상 후 돌아 나와
  널린 신발들 사이, 엉거주춤한 발을 보면서
  어떤 신을 신어도 괜찮다는 듯
  어떤 길을 걸어도 괜찮다는 듯

복숭아가 살짝 미안한 내력

  복사꽃이, 복사꽃복사꽃복사꽃이
  물살처럼 반짝이며 흘러내리던 과수원 
  꽃 그림자 묵직하게 드리워진 나무 아래는
  어느 결에 깃들어 스멀거리던 내 사랑도 
  마침내 피어나던 곳
  먼저 부푼 여자아이의 입술을 베어 물었네
  복숭아 단물이 입 안 가득 고여 왔네

  복사꽃 지고, 복사꽃, 복사꽃, 복사…꽃
  지고, 복숭아 따라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끝물의 복숭아마저 드문드문 사라져 버리면
  마음은 영 먼 곳에서 
  터벅거리는 길들을 걸으며 살아야 하네
  그래도, 한번 든 입맛은 오래간다네

  마지막 버스비 털어
  해 지도록 걸으며 입에 물던 복숭아
  악몽에서 깨어난 그믐의 자취방

  몸을 말고 잠 다시 청할 때
  달덩이처럼 떠올라 
  환하게 향기를 풍겨주던 복숭아

  또 한참 지난 어느 여름
  지친 하루는 지나도 숙취는 남아 
  만신창이로 구르다 졸라대면
  복숭아, 둥실둥실 담겨온다네
  허겁지겁 먹노라면
  땀 흘리며 다녀온 아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묻는다네
  당신 왜 오늘따라 소년처럼 해맑게 웃고 있어요?

  언덕을 거슬러 올라 
  복사꽃 나무 아래 앉은 것은 아니라지만
  말 못 할 바도 아니지만
  왠지, 복숭아가 살짝 미안해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둘러댄다네

  복슝아, 물이
  너무, 달아셔!

지구는 둥글다

  허공에 매달려 잠을 자다 악몽에 시달린다. 형체 불명의 공포가 입 밖으로 터졌는지, 아내가 흔들어 깨우고는 걱정스레 바라보다 품에 안아준다. 달이 뜨는지 어둠이 둥글어지며 견딜 만하다. 어떤 파도가 잠 속으로 몰아쳐오는지 아내의 숨결이 거세다. 나 또한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거려 잠을 재운다.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해일은 없다. 

  폭풍이 지나간 주전 바다 몽돌 해변. 물결마다 뿌리내린 눈부신 빛들이 바람 따라 꽃송이처럼 뒤척거린다. 저쪽에서 아이들은 바짓가랑이까지 적시며 만만한 자갈을 더 멀리 바다에 던지고, 아내는 웃으며 연초록 양산을 기울여 준다. 그 큰 바다가 어디 간지러운데도 없다는 듯 맨몸을 다 보여주며 편안하게 누워있고, 끊어졌던 수평선이 매끈하게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니…… 저 먼데서 수평선이 완만하게 굽어있다. 심심한 신이 한 번씩 굴리는 굴렁쇠처럼. 그렇다, 지구는 둥글다. 

가려움에 대하여

  길 끝 민박집에 잠시 고여 있습니다
  가슴에 자욱했던 그림자 어른거려 창문을 여니 
  어지러운 달빛이 
  추억의 돌부리 몇 개 파내면서 흐르고, 
  지난날들의 머리칼 냄새에
  잠자던 피톨들 마구 뛰어다닙니다
  문을 닫고 재우려 해도, 가려운 
  내 마음은 뭐랄까 
  우왕좌왕 갈피 없는 철길 같았습니다
  눈감아도 형체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 먼저 닿아야 나를 타고 지나가리라
  이제 와서 생각하면
  발길대로 깔아 놓은 늑골 같은 침목枕木이
  앙상한 그리움으로 징징 울고
  산지사방 흩어진 기억은 꽃으로 피어나
  하늘하늘 온몸을 간질입니다
  인기척을 잘 내던 그때, 
  들판의 초록 메뚜기처럼
  툭툭 튀어 올라 몸 가득, 흩어집니다
  이제는 뒤집혀 내가 되고
  내가 뒤집혀 그 몸이 되는……파문?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

  ……지나갔다. 반신마비의 사내가 엉킨 길들을 질질 끌며 지나갔고, 얼굴 잘린 달이 허름한 옷차림으로 방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지나갔다. 새벽에 쓰레기차가 눈을 부라리다 적재함에서 누런 물을 뚝뚝 흘리며 떠나갔다. 흘레붙었던 개들이 힘없이 떨어져 자신의 샅을 핥다가 눈을 두어 번 꿈적거리고 뿔뿔이 제 갈 길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녹슨 태양이 유리에 달라붙은 얼룩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다 심드렁 지나갔다. 저녁에 더 엉킨 길들을 질질 끌며 반신마비의 사내가 다시 지나갔고, 토끼는 한번도 지나가지 않았다. 벚꽃 잎들이 살 비늘처럼 떨어져 흩날리며 스쳐갔다. 이미 죽은 바다가 안개가 돼, 방 보러 온 노인처럼 초점 없이 쳐다보다 지나갔고, 폭설이 다 녹은 진창길 위로, 남은 말 몇 마디를 다시 한번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진눈깨비도 금방 녹아서 사라져 갔다. (눈 부릅뜨고 앉아서 보는 자리) 더 이상 기다리는 것도 없이 그저 입 다문 창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이……지나가고 ……지나가고……

바다에 이를수록 강은 서서히 몸을 풀고

  몸의 체적은 얼마일까?
  사계절이 오가는 곳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불어오는 
  한기에 떨다가

  구토가 잦아들 무렵
  봄이 올까?
  봄이 올까?
  이번에는 성욕이 허기처럼 피는가 보다
  몸속으로 달리던 기차가 사라지자
  아내는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시든 사과 옆, 벗어놓은 가발만
  종양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텅 빈 방안을
  달빛처럼 하얗게 채우다
  잦아드는 정액 냄새

  바다에 이를수록 강은 서서히 몸을 풀고

  강 따라 계절을 오가는 동해남부선

  양산 원동리 매화 밭에
  뭉게구름처럼 잠시 머물던 시간이

  기차가 지날 때마다
  진눈깨비 날리듯
  언저리부터 조금씩 풀려나간다

월인천강지곡

  지난봄, 복사꽃 구경 자리
  취중에 대금 소리도 잠시 들리더니
  어느덧 아삼삼, 깨어나니 꽃 지고,
  설핏 든 낮잠 속
  한바탕 그림자만 다녀온 듯하다

  손가락 세워 가리키지 않아도
  우리 한때, 저 쪽에 뜬 달을 
  함께 바라본 적 있었으니
  누가 있어 세월에 언덕을 함부로 세웠겠느냐마는
  너는 저만치 털레털레 내려가
  어느 뒤안길을 한참 거쳐
  저수지가 느릿느릿 내다보이는 곳에서
  한 가지 복숭아처럼 맺힌 가솔과 함께 
  숨 고르며 살고 있구나
  그러던 어느 날, 낚싯대를 메고 나가 
  딱히 잡을 고기도 없이 저수지 둑 가에 앉아 
  대책 없이 엎어져 흘러가고 있는 
  길들의 가닥을 잡아보다가
  즈믄 강 지나도록 따라와, 이제 막 
  물 위로 돋는 달에 대고
  앉을자리 만든다고 치워 놓았던 
  만만한 돌멩이를 던진 적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만치서
  길이 길임을, 발바닥에 받쳐지는
  단단함으로 디디며 살아가다가 
  어느 초가을, 모래 빠져나가듯
  밑 빠진 시간에 허방다리 짚어
  강물에 풍덩 빠져, 흘러가다가
  겨우 겨우 기어 올라와 앉아 있으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혼비백산 함께 시늉해주던 달이
  이제는 너에게 맡긴다는 듯
  조용히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몸에 돋은 소름을 잠재우고 있다면
  뉘라서 저 달을 그저 
  그림자라 하겠느냐

  그러면 달이
  웅크려 앉아 달을 보는 모습을
  다시금 제 몸 위로 비쳐주는데
  달 속에 들어앉아
  달을 보는 나나,
  빈 어구漁具를 둘러메고 
  이제 막 논둑길로 접어들어
  달 속에 떴다 지는 너나,
  뉘라서 
  그림자가 아니라 하겠느냐

경 읽는 바다

  철썩, 처얼썩, 하얗게 넘겨져 부서지는 파도. 바다는 오늘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를 읽는다. 소리 속에서만 되살아난다는 말씀을 읽는 바다. 파도소리가 오늘따라 드높다. 하긴 그 경전, 수십억 년 허탕으로 읽다가, 좌절과 분노로 폭풍우 치던 날들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들어 스스로 몸에 새겨지던 그 얼룩을, 갈가리 찢어 흩어놓는다.

  그러나 저기서, 달 또한 그 문자를 몸에 새긴 채 떠오르지 않는가. 달 너머를 응시하던 시선을 내리며 미간에 모였던 주름을 지우자 다시금 낯설어진 달빛이 경전을 비춘다. 바다는 잔잔히 마음을 모으며 책장을 넘긴다. 철썩, 처얼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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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철도 9 9 9

한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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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낭송시 듣기

  • 반구대 암각화

    15

  •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낭송시

    16

  • 나비가 날았다

    18

  • 서랍

    20

  • 비디오를 거꾸로 틀었다

    23

  • 구름처럼 가벼운

    24

  • 맨발의 이사도라

    26

  • 28

  • 한 입의 여자*

    29

  • 오징어

    31

  • 봄날은 간다

    33

  • 까마귀를 안고 있는 여인*

    36

  • 목걸이

    38

  • 비 내리는 날

    39

  • 안개

    41

  • 이제 와서 나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

    42

  • 바다철도를 탔다

    44

  • 타이타닉 호에서

    51

  • 한밤의 트로트

    52

  • 1984, 공단도시, 성탄전야

    55

  • 가짜 하루

    58

  • 봉봉 관광

    61

  • 까치 울던 날

    63

  • 유리, 묵시록

    64

  • 어리벙벙

    66

  • 봉봉 노래방

    67

  • 무화과

    70

  • 봉봉 모텔

    72

  • 고향의 푸른 잔디

    74

  • 봉봉 25시 편의점

    75

  • 봉봉 휴먼팰리스

    77

  • 하혈

    79

  • 복날

    81

  • 봉봉랜드 가는 길

    82

  • 아이스맨의 탄생

    낭송시

    86

  • 아아아 아이스맨

    88

  • 고양이가 돌아보다

    90

  • 엘 콘도르 파사

    95

  • 9월

    낭송시

    96

  • 연가戀歌

    97

  • 첼로처럼

    99

  • 초승달

    100

  • 하모니카

    101

  • 기림사에서 길이 엇갈리다

    103

  •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107

  • 여행

    110

  • 복숭아가 살짝 미안한 내력

    112

  • 지구는 둥글다

    115

  • 가려움에 대하여

    116

  •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

    118

  • 바다에 이를수록 강은 서서히 몸을 풀고

    119

  • 월인천강지곡

    121

  • 경 읽는 바다

    124

책장,착갈피

시집(시)을 책장,책갈피에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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