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벽에 잠든 바다

임석

개운포 사설 1

  회색빛 하늘 아래 사나운 바다가 운다
  버려진 목선 두엇 발목이 붙잡힌 채
  개운포 고래 울음이 처용을 기다리는.

  이제 세죽 마을엔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그물코를 꿰매던 어부의 손놀림도
  찢어진 삼색 깃발도 수장되고 없었다.

  폐허를 쓰다듬는 허름한 주막 한 채
  아직 떠나지 못한 삐걱이는 소리들이
  갈매기 울음 삭이며 해초 되어 자라난다.

  헐린 벽돌 틈새 썰물 떼로 덮친 일몰
  처용의 빛바랜 넋이 철석철석 몸을 풀 때
  실연한 달빛을 불러 별신굿이 곡을 한다.

개운포 사설 2

  새벽길 열어가며가슴패기 치던 바다
  만선의 부푼 꿈에 짠내도 헹궈가며
  그 험한 물이랑 이랑 기가 죽지 않았다.

  찢긴 폐비닐로 바람막이 공한지空閑地
  채 벗지 못한 가면 허겁지겁 달려가서
  내 아닌 네 속이 되어 춤사위 하는 하루.

  그물로 끌어올린 수장된 세월 앞에
  오염된 신음들이 발목을 잡아끈다
  급제동 쏠린 등짐이 야적장에 쌓인다.

  단순한 흑백 세상 바다에 함몰되고
  천년의 긴긴 설화 마음자락 붙잡지만
  처용은 고개 저으며 세상 끝으로 가고 있다.

개운포 사설 3

  공단 하늘 물들이고 밤을 앓는 기계음들
  볼트와 나사못이 붉은 울음 토하는 사이
  빈혈증 아침 햇살은 깃들 자리가 없었다.

  갈 곳이 마땅찮은 새떼들의 겨운 날개짓
  야무진 믿음 하나 키워낼 겨를 없이
  우리네 흩어진 삶은 또 어디로 향해 가나.

  추적추적 빗소리가 지친 세월 다독일 때
  풀씨로 돋아나는 키 작은 희망 하나
  그래도 추스러야 할 여백이 있는 걸까.

  수시로 불어닥친 눈 못 뜨는 황사 바람
  어줍잖은 명분 앞에 바다는 스러지고
  문명의 역신을 불러 살풀이 하는 포구.

개운포 사설 4

  별빛도 조심스레 밤을 잃고 조여 댄다
  냉기 앓는 연장들 덕지덕지 녹이 쓸고
  활기찬 아침 햇살은 방향표시 잃어갔다.

  무시로 흔들고 가는 맹수 같은 바람소리
  찢겨진 납빛 하늘 장막 쳐 둘러놓고
  술잔에 혼령 붙들고 실언을 토해낸다.

  시간을 밟는 빗소리가 지친 세상 잠재우고
  숨죽인 실뿌리에 새 움으로 돋아날 때
  수평의 저 먼 바다가 물새 날려 보냈다.

  큰 파도, 거친 함성, 깃발을 앞세운 채
  걷어 올린 무쇠팔뚝 달려 나간 군상들이
  암벽에 머리 부딪쳐 포효하고 있었다.

개운포 사설 5

  그 험한 파도 헤쳐 마침내 닿은 저택
  등대처럼 유리창은 환하게 불을 켜고
  피곤은 어둠 속 깊이 닻을 내려 보낸다.

  소금 맛 세상 틈새
  가까스로 잡은 밧줄
  삐걱하면 놓치고 말
  위태한 모험 앞에
  급제동
  버거운 등짐
  발목 삐어 절고 있다.

  저 높은 공단 굴뚝 식솔들 희망사항
  공룡이 불을 품듯 동화로 그려봐도
  단순한 흑백만으론 구도 잡기 어렵다.

개운포 사설 6

  파도는 거센 물살 싣고 모퉁이를 휘감는다
  지난 흔적 마디마다 갈기갈기 찢겨놓고
  간밤에 마신 취기에 길을 잃고 말았다.

  삭아진 그물더미
  갈길 먼 우리네 삶
  위태한 모험들을
  포구 깃에 걸쳐놓고
  피곤은
  수초가 되어
  일렁임을 더한다.

  햇살에 그을린 얼굴 목탄 화필로 그려 본다
  서녘에 남은 색상 산문 밖에 떨어지면
  투명한 높은음자리 자막 되어 반짝인다.

개운포 사설 7

  납덩이 내려앉아 인적 끊긴 세죽마을
  헐벗은 건목들은 등껍질을 마저 벗고
  폐선에
  수장된 깃발
  갯바람에 울어댄다.

  수은 먹고 등 뒤틀려
  하늘 베고 누운 고기떼
  갈대만이 서걱서걱
  머리결 쓸어 넘기고
  노을에
  몸 씻고 나온
  낮달 하나 숙연하다.

  어디로 떠났는가
  터주들의 삶들은
  공단의 빛무리 야경 이상세계 밝혀든다
  여기는 동해의 남단 최첨단 공화국.

판화 작업 1

  내 한 점 살덩이에
  무늬 놓는 조각도

  눈빛 시린
  칼끝에서
  백두대간
  솟아나고

  또 다시
  군마를 몰아
  설산을 넘고 있다.

판화 작업 2

  원근법遠近法
  구도를 펼친 돋을새김 산수화여.

  말고삐 몰아 쥐고 물웅덩이 늪을 지나 길 없는 길 만들며 힘들게 산등성이 넘어간다. 아, 눈 아래 밟히는 저 티끌세상, 먼지 소음 오수로 뒤범벅된 아황산이 배출되는 공해의 바다. 들끓고 또 끓어 넘치는 그 바다에 쪽빛물감 그득 풀어놓는다. 잠시 멈췄던 조각도 다시 들고 사흘 밤 낮 준령을 넘어 예각銳角의 금을 그어 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 노고단이 바로 저기로구나. 앙상한 뼈마디 나무들 녹색 옷 입히고 산물 소리 콸콸 쏟아내는계곡, 웅숭깊은 저 계곡까지 숨결소리로 들리는구나.

  그 아래 둥지를 틀고 살고 싶어 떠는 칼날.

판화 작업 3

  퍼렇게 날[刃]을 세운 감성의 결정체가.

  여백을 잘라 내어 결 고운 화폭 위에 몇 개의 가는 선을 그어 나간다. 그렇지, 굳게 잠긴 공장 문도 열어 주고 꺼진 불씨를 살려 1호기, 2호기, 3호기 원자로에 불을 지펴야지. 포신처럼 솟은 저 녹슨 굴뚝에 회생의 연기자락 피어내야지. 공장 인근 벽돌 틈에 질경이처럼 질긴 푸른 목숨들, 그 목숨의 경이로움으로 저녁 불빛 내비칠 주거도 마련하고 멀지 않은 곳에 노동의 힘겨움 삭혀줄 강 한줄기 흘러내린다. 그 강물소리 듣는 들풀들도 흔들리게 해야지. 배경 처리로 공단지대 저편, 달도 휘영청올려야지.

  징징징
  징을 울려라
  어허 둥둥 북을 쳐라.

판화 작업 4

  수시로 변화하는
  하늘의 저 오묘함 속

  수묵 담채가 좋을까. 유색의 부드러운 물감이 좋을까. 아니야, 해뜨는 밝은 빛으로 아침을 일구어야지. 푸른 바탕에 장밋빛 붉은 웃음을 채색해야지. 시들어 가는 들꽃의 괴로움도 겹칠로 바꿔도 주고. 사포질도 해대면서깎아 보자. 여름날 소나기가 오면 좋겠다. 소나기가 다녀가면 무지개 다리도 놓아 줘야지. 창문틀을 만들어 그 사이로 아직 변하지 않은 황토 냄새 풍겨 내고 내비친 불빛들은 제몫을 하려는 듯 어둠도 밀어낸다. 시작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일련지. 내가 찾는 그 무엇이 신기루처럼 다가올 그 날까지 연약한 무릎을 세워 작업대 앞에 선다.

  허허한 이 땅을 위해 춤을 추는 조각도.

판화 작업 5

  새벽의 독한 한기
  골다공증 앓는
  뼈
  마디마디
  부시시 눈을 뜨고
  걸어나온 노숙자는
  어디서 더운 한 끼를 무료급식 받게 될까.

  궂은 비 쏟아져서 슬픔의 강을 이룬
  구겨진 팔다리 펴 살아갈 그들 위해
  새 세상 환한 신도시 조각도로 일궈야지.

판화 작업 6

  이 땅 구석구석은 아직 꿈틀대고 있었다
  세기의 뼈대를 세운 시뻘건 철 구조물들
  크레인 더딘 행보가 납골당을 앉힌다.

  산기슭 휘감아 도는
  계곡 옆 반석 위에
  벽돌을 쌓아올려
  정자 지어 조망하고
  그 속에 풍류를 불러
  잠시 나를 즐긴다.

  시선에 무게 싣고 잠든 혼을 불러내듯
  척박한 삶의 땅에 개울 하나 열어놓고
  조각도 시린 칼날에 갈아 업는 세상사.

판화작업 7

  롤러가 시동을 걸고 속살 무늬를 따라간다
  조용한 한길 위에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날 세운
  푸른 조각도
  속도를 내고 있다

  허공을 빠져나온 외로운 넝쿨장미
  고독한 침묵으로 대칭 없이 물들인다
  파괴된
  계곡 속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예각의 눈금들은 살이 되어 살아나고
  그 형태 들어앉아 백두대간 일어섰다
  장미는
  울만 남기고
  목판 속에 빠졌다

판화작업 8

  조각도 쟁기질로
  불모지를 갈아엎는다

  이랑이랑 눈을 뜨는
  초록의 숨결소리

  공한지 사포질하고
  도랑 물길 내어주고

표구 작업

  무명씨의 그림 한 장 물안개 가득하다
  눈을 닦고 가만 보면 저만치 나앉은 산
  봄빛이 흥건한 갈 숲 낚싯배도 삼삼하다.

  뒤집은 화지를 분무기로 주름 편다
  난 시대 잠을 재워 새 세상 여는 접지接紙
  도원에 꽃과 벌 나비 벗이 되어 정답다.

  한 치 오차도 허락 않는 사각 모서리
  들을 적신 삶의 단비 강도 한껏 부풀었다
  비단 폭 하얀 이음새 물비늘로 반짝이고.

  어느 신혼의 아늑한 거실 벽면에
  다듬어진 옷매무시로 내 걸릴 운명 같은
  별천지 도원의 아침 물안개를 피운다.

山蘭

  거친
  벼랑 끝에
  겨울 딛고
  섰는 산란山蘭

  눈보라
  매운바람
  칼춤으로
  물리치고

  촘촘한
  봄볕 한 자락
  꽃대궁에
  앉힌다.

비홍산방

  마실 나온 산바람이
  기웃대는 여름나절
  시원한 탈색 음률
  녹색으로 배회하고
  개울에
  발 담근 물소리
  행인 불러들인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지난 삶의 흥얼거림
  파장된 비홍산방
  갇힌 시간 풀어내면
  나 또한
  무위로 앉아
  찻잔 속을 맴돈다.

  물비늘 흩어지는
  잎새들의 작은 손짓

  지순한 작가의 방
  적막처럼 가라앉고
  그 속에
  남은 기척도
  또 하루를 마감한다.

갯바위 일기

  흐느낌 추스르며 파도가 절망한다
  이마에 부딪히는 밤안개 헤쳐가며
  아슴한
  세상 밖에서
  기웃대는 불빛들.

  소금끼 절인 바람 세상인심 간 맞출 때
  잡생각 불러 모아 캔버스에 주워담고
  남겨진
  몇 점 기억은
  배낭 속에 채운다

  구름에 꽂아 논 찌 갈매기가 입질한다
  마실 물 바닥난 채 비명조차 삼켜가며
  갯바위
  베게 삼아서
  숨 고르는 해삼 멍게

  왔다 간 조류의 흔적 또 어디로 흘러가나
  기다림의 밀물 썰물, 인생도 저런 걸까
  절정의
  순간순간이
  전율로 와 닿는다

강가에서

  산그늘 내리는 개울 물소리 살아나면
  물때 앉은 한 생각 조약돌로 잠긴다
  밤 내내 귀 열어놓은 내출혈內出血의 저 급류.

  바위에 부딪친 이마 깨어나는 하얀 영혼
  아, 이게 아니라며 되돌아 멈추려 해도
  앞서간 손짓에 끌려 또 어디론가 떠내려갈.

  무념無念처럼 몸을 누인 고요의 저문 강가
  투명한 음계들이 자막으로 반짝일 때
  피묻은 서녘 노을이 하구에서 몸을 푼다.

해돋이

  변화 무상의 하늘 천이며 만인 빛깔
  일상의 내 하루는 무색에서 시작된다.
  둥둥둥 지평 깨우며 귀를 찢는 북소리.

  소멸하듯 몇 개 섬이
  피를 토해 쓰러진다
  장막 친 산맥들
  불길에 휩싸이고
  하늘 품
  열어젖히면
  빨려드는 불기둥.

  희망 문 수평선에 대기하는 고깃배들
  조심조심 옥동자를 밧줄로 당겨내면
  퍼지는 무구한 빛살 눈부신 아침이다.

정자 소묘

  후광처럼 비쳐오는 일출을 뒤로하고
  남산의 마애불은 아침 예불 올린다
  향불을 피어 문 해무海霧 강동마을 드러낸다.

  무룡산은 멀찌감치 하늘 한 폭 틀어쥐고
  어딘가로 떠났다가 되돌아 온 천년햇살
  돌고래 텃세부리듯 물줄기 품어댄다.

  유포성 빗살무늬 씨를 뿌린 발자국들
  수비하던 덮게돌이 먼 동해 껴안으면
  산까치 흰빛 죽지가 햇살처럼 고왔다.

  만파식적 다스리던 아늑한 요람의 땅
  잠을 깬 해안 도로 산 배암으로 일어서면
  드러낸 알몸의 바다 젖은 고독 씹어댄다.

육교 위에서

  둑 터진 봇물처럼 확 쏟아진 차량 행렬
  시작도 끝도 없는 금속성 이기 앞에
  병목의 정체 구간은 가는 길을 잃었다.

  어디론가 흘러만 가는 표정 잃은 얼굴들
  구겨진 양심 한쪽 휴지로 나뒹굴듯
  절단된 시간 밖에서 침을 뱉고 돌아섰다.

  마른기침 쿨룩 이며 폐혈증 앓는 가로수
  잎마다 도진 반점 녹물을 흘리고 있다
  생태를 진단할 명의名醫 병원문은 닫혀있다.

  흰 거품 입에 문 큰 역류를 보았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불혹의 썰물 밀물
  예상된 일기예보가 망가지고 있었다.

새벽시장

  재첩국 한 사발로
  간밤 취기 떨쳐내고

  껄쭉한 목청 돋궈
  바삐 움직이는 저 손놀림

  호명된
  활어 상자가
  불뚝불뜩 일어선다.

변두리 소묘

  한바탕 낙엽비가 늦가을을 쓸고 갔다
  어깨뼈가 드러난 나무들의 침묵 앞에
  객혈의 단풍 흥건히 가슴팍 적셔댔다.

  다리 밑 고수부지 홍등 켜는 포장마차
  통 성명 필요 없는 군상들이 모여있다
  부딪는 소주잔 속에 녹슨 세상 비틀댄다.

  돌아갈 주소를 잃은 사십대의 머리맡에
  고향행 완행열차가 자주 기침을 해댄다
  레일의 버팀목 속에 필름인양 도는 궤적.

천전리 풍경

  선사의 일대기가 물소리로 일어서는
  바위 틈 서리마다 연꽃이 눈부시다
  태초의 비경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일까.

  마른모 물결무늬 그 의문을 풀어 가면
  기하학 숫자들이 4차원을 꿈꿀 때
  살과 뼈 타는 불길로 무한세월 지펴간다.

  공룡의 발자국이 낙관 찍어 남긴 자리
  그리움의 붉은 울음 산과 골을 다 울려서
  외로운 천년 기다림 화석으로 앉혔다.

  암벽을 성큼 베어 누대위 정자 짓고
  주술을 불러 모아 그림인 양 앉힌 풍광
  휘둘린 세필의 운치 손댈 곳 다시없다.

청동검 푸른 날에

  듬직한 돌덩이가
  천년 가람 지켜 선 자리

  오늘은
  어느 대처
  별자리 돋아나나
  갈대밭 핏빛 함성이
  군마처럼 달려온다.

  청동검 푸른 한(限)이
  달빛 속에 날을 세워

  무수한
  세월 자락
  한 칼 한칼 베어 내면

  돌 속에 잠든 영혼이

  이끼 앉아 더 푸르르다.

남산에서

  오는 봄 초록빛은 피는 걸까 물드는 걸까
  긴 세월 한줌 가난 태화강을 바라보면
  꽃 지고
  새 우는 것도
  울산사람 뜻이려니

  황용연 머리 위엔 그날 누각 간 데 없고
  새로운 삶의 터전 빌딩만 솟아남아
  강물에
  낼 앉은 노을
  벌레처럼 꿈틀대네

  갈댓잎 배를 띄운 한가로운 백로 떼
  달 뜨는 은을봉에 수국 수국 수국이 울면
  그 사연
  십리대밭에
  빛빛으로 부서지네

고분

  돌부처 작은 손에 움켜쥔 천년 세월
  반석에 귀를 대고 범종 소리 엿들을 때
  아득한
  선사의 자취
  숨결 되어 다가온다

  손 삽에 무게 실어 퇴적층 파고든다
  땅 속에 묻힌 증언 파편들이 일어서고
  돌쩌귀
  환한 이음새
  그 원시도 빛난다

  옹관에 잠든 영혼 눈물 도는 사금파리
  왕조의 도읍지를 지표로 남긴 연당蓮塘
  쓰다만
  국사 편찬서
  다시 붓을 잡는다

해돋이

  변화무쌍의 하늘 천이며 만인 빛깔
  일상의 장생포는 무색에서 시작 된다
  패혈증
  앓는 발동선
  수평 지평 깨워댄다

  소멸하듯 몇 개 섬이 피를 토해 쓰러진다
  장막 친 산맥들이 불길에 휩싸이고
  하늘 품
  열어젖히며
  불기둥에 빨려든다

  이윽고 하늘과 바다 성교는 끝이 났다
  옥동자 조심스레 두 손에 받쳐 들면
  퍼지는
  무구한 빛살
  새 아침이 밝아온다

대곡정大谷亭풍경

  구곡九曲이 흘러가는
  천전리 공룡마을

  백악기 주인발자국
  뚜벅뚜벅 걸어오고

  경부선
  고속전철은
  생― 하며 달려간다

극, 귀신고래회유해면

  장생포 앞바다에 쇠고래가 살았다
  끝내 회유해면에 극경克鯨은 오지 않고
  바다는
  까닭 모른 채
  지느러미 세운다

  반구대를 뛰쳐나온 허기진 귀신 고래
  단속의 눈길 피해 온종일 내달리다
  드디어
  고래 한 마리
  전 해역에 수배된다

  눈길 끈 전단지마다 배가 하얀 얼룩무늬
  게 해삼 바다새우 청어알로 배 채우고
  어둠 속
  암초를 피해
  무대 위로 출몰한다

  동해를 쏘다니며 거대한 신화를 만든
  심연마다 길들여져 조각조각 꿈을 쪼며
  허공에
  분수 꽃 피워
  오호츠크해 항해 중

돌에 새긴 원시

  천전리 너럭바위 연꽃 띄운 너럭바위
  돌에 새긴 원시 자취 그 행간行間 헤쳐 보면
  누 천 년
  잠든 세월이
  눈 비비고 일어선다

  동심원 마름모꼴 기하학 물결무늬
  백악기 주인 발자국 뚜벅뚜벅 걸어와서
  암각화
  요철凹凸을 더듬어
  혈맥처럼 돋아난다

  거북이 산을 넘다 멈춰선 반구자락
  범 사슴 뛰어놀다 바위벽에 몸 숨기고
  지금도
  가만 다가와
  세상소리 엿듣는다

포경 이야기

  장생포 앞바다에 귀신고래가 살았지
  물 밑에 들어갔다 쑤욱 올라 왔을 때
  고래다!
  바로 그 찰나
  방아쇠를 당겼지

  급소에 작살 맞고 그 큰 덩치 움찔했지
  되래 내가 고래 되어 푸르르 떨기도 하고
  지금도
  꿈속 언저리
  그 놈한테 빚졌지

  내 이제 산다 해도 얼마나 살겠느냐만
  그래도 그 한 시절 되돌리고 싶어진다
  작살을
  날리던 투혼
  젊은 날의 기백으로

고래 할매집

  자욱한 연기 솔솔 공주댁 고래 할매
  석쇠도 걸치지 않고 곱창들은 달아오르고
  쟁그랑
  잔 부딪는 소리
  고기 한 점 우물거린다

  작살에 맞았을까 포경선을 바라본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불법포획 이야기
  새벽은
  바다를 끌고 와
  탁자 위에 앉힌다

  지친 몸 허적대며 새벽까지 떠는 허풍
  저 외로운 고래 불빛 고향 찾아 떠날지라도
  할매집
  씽씽 스크루
  으음 저 고래냄새

연잎 저울

  내가 감당할 무게는 얼마나 될까
  연잎에 빗방울 고여 한동안 일렁이며
  유심히 생각하다가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얼마나 고여야 또 다시 뱉어 낼까
  생각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자신이 감당할 무게
  등짐 졌다 쏟고 있다

호박꽃

  우리 집 담벼락에
  호박꽃 불 밝힌다

  사립문 없는 산장
  제 집 인양 드나들고

  울 너머
  등줄을 감고
  우주 향해 가고 있다

통화권 이탈

  아직도 단절이 된 산마을이 저기 있다
  집 몇 채 안개 속에 차분히 가라앉고
  처마 끝
  낙숫물 소리
  삶의 시차 알리고

  푸른색 형광불빛 액정판을 열었다
  ‘통화권 이탈’이란 익숙지 않은 문자 앞에
  깃을 편
  나뭇가지가
  추가 되어 흔들린다

  소낙비 북을 치는 허름한 양철지붕
  적소에 멈춘 초침 혈을 찔러 대는가
  거품 문
  하얀 역류가
  타임머신 돌려댄다

신불산 억새평원

  은빛 억새 머리칼을 햇살로 빗는 산정
  아쉬운 해거름이 비단옷 갈아입고
  이승의
  마지막 길에
  손 흔들고 있었다

  능선을 타고 넘는 수묵빛 산 그림자
  푸드득 철새 몇 마리 놓쳐버린 농담 속
  밤은 또
  달을 불러와
  춤사위를 하고 있다

  쳐라! 한 점 살이 다 찢어지고 터지도록
  담금질 오랜 세월 불을 먹고 자란 영혼
  첫 울음
  토한 자리에
  무늬결이 새겨진다

  드러누운 강이 울어 산빛 물빛 살아나고
  백두대간 땅도 울어 바람소리 일으킨다
  신명난
  손끝에서는
  푸른 잡귀 휘날린다

  한지창 첫새벽이 영토마다 깨어나서
  덩더쿵 춤사위가 지신을 밟는 시간
  땅 끝에
  쓸리는 육신
  피멍 드는 아픔을

  구름으로 나부끼던 무명천 휘휘 감아
  울림판 채찍질로 허욕을 다스리고
  빈 겨울
  트인 하늘가
  소지 솟아오른다

항아리―2010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

  반죽한 흙의 삶을 물레로 돌린 세월
  외고산 물과 불이 하늘 맥박 깨우더니
  입 벌린
  고요 속으로
  구름 한 점 드리운다

  지구촌 아픔과 슬픔 넉넉히 둥글게 빚어
  이념의 불협화음 땔감 삼아 불 지피면
  흙가마
  불기둥 타고
  강강술래 달이 뜬다

  덩더쿵 춤사위로 土神을 불러내자
  얼쑤얼쑤 한마당 굿판 山神 水神도 불러내자
  밤하늘
  활활 태우며
  첫 새벽이 오도록

남창장날

  한바탕 낙엽비가 늦가을을 쓸고 갔다
  어깨뼈가 드러난 나무들의 침묵 앞에
  객혈의 단풍 흥건히
  가슴팍을 적셔댔다

  어둠 깔린 남창장날 홍등 켜는 포장마차
  통성명 필요 없는 군상들이 모여 있다
  부딪는 소주잔 속에
  녹슨 세상 비틀댄다

  돌아갈 주소를 잃은 사오정 머리맡에
  고향행 완행열차가 자주 기침을 해댄다
  레일의 버팀목 속에
  필름인양 도는 궤적

대왕암에서

  기어이 불빛 하나 바다 끝을 끌고 왔다
  송림 사이 현수막에 문무왕비 새겨놓고
  전설이
  깃들은 곳에
  노래 한곡 심는다

  소나무 기암괴석 탁 트인 동해바다
  삶을 실은 통통배는 잠시 뱃길 멈추고
  최남단
  울산을 지킨
  대왕바위 바라본다

  일산지 푸른 달빛 문무대왕 넋 그린다
  볼륨을 올려놓고 왔다 가는 오카리나
  어느덧
  열기 식히는
  바닷바람 불어온다

늪지에 핀 꽃―포은선생의 유배지에서

  끙끙댄 일상 벗고 요도寥島* 찾은 서울손님
  유배지 밝힌다며 탈도 많고 말도 많다
  등 매단 자목련 뚝뚝 소리 없이 지던 봄

  살풍경 풀어놓은 찌그러진 비알자락
  작괘천 물소리가 푸른 새 빛 앉혀가고
  포은의 눈물인 듯한 샘물 퐁퐁 솟구친다

  반구대 가는 길섶 잠시 걸음 멈춰 선다
  집청마루 걸터앉아 한 입술 적신 단소
  산마루 넘는 그믐달 무슨 말을 건네는 듯

  원시림 돌아 나온 구곡의 큰 나무람
  몰인정 도시 향해 좔 좔 좔 달려간다
  한 시대 목마른 늪지 꽃을 피워 안기는

  ✽요도寥島: 포은 정몽주선생의 유배지

관기官妓의 그리움―전화앵

  흰 천에 한을 실어 밤하늘 아우르네
  날을 듯 너울대는 무명수건 한 자락
  열박제
  휘감아 도는
  강강술래 내 사랑

  설익은 불빛덩이 치마폭에 감쌌다가
  불새 되어 훨훨 나는 기녀의 속앓이로
  달빛에
  쓰러진 고요
  활천리에 흐르네

  목숨 빛 정조 절개 머리맡에 내려놓고
  해어화解語花 봄을 안고 나 이곳에 왔노라
  아득한
  시공의 불꽃
  그리움을 안고 돈다

  붉은 설매 다북다북 피어나는 한 겨울밤
  내면의 채찍질로 그림자를 띄워놓고
  고통과
  절망 접어서
  다가서는 전화앵

  ✽전화앵巓花鶯 : 신라말 관기官妓, 서, 화뿐만 아니라 춤에도 뛰어나 그 명성이 자자했다고 함.

바람에 시간을 묻다―흥려* 박윤웅

  저 신라 천년 국운 기울던 그 어느 날
  우레 같은 함성 함께 빗줄기는 더 세찼고
  서라벌 낯선 명맥은
  흔적들을 지워갔다

  왕건과 손을 잡고 대야성 공격 할 때
  당황한 성주 견원 황급히 도망 쳤고
  바람에 시간을 묻는
  공훈기린 흥려백

  고려의 개국공신 왕업을 떠받들어
  정자항 남쪽 아래 이름 얽힌 미역바위
  흥려부 하사받은 땅
  왜구들도 탐냈고

  바다에 잠겼다가 나타난 큰불개안**
  계변천신 달천제철 소금 미역 해상무역
  대호족 고려 흥려부
  울산 땅 주인되다

  ✽흥려興麗 : 高麗를 興하게 했다는 뜻
  ✽✽큰불개안 : 길고 넓은 큰 벌 해안

작천정 풍경

작괘천에 가 봐라 정자가 반듯하다
묵객들 붙잡았던 넓적한 백포반석
일제히 밝힌 꽃등에 무릉도원 새겼다

누가 이 계곡에 절경을 그리다 말고
잠시 새소리를 빌려와 도처에 풀어 놓았나
나무와 물과 돌이끼 주객이 따로 없다

유맥 의 길을 닦은“ 포은”이 다시 올 듯
긴 세월 마애 석각은 공신들 껴 앉은 채
거목은 한을 새기며 또 천년을 버틴다

문득 벗을 생각하다 소주잔에 비친 노을
산그늘도 뒤 따라와 수묵을 치고 있다
쉼 없이 흐르는 물에 목욕재계 하는 시심詩心

언양 아리랑

  천황산 내화토耐火土를 빚어 구운 요지군에
  구름 덮인 단조봉이 연일 비를 뿌린다
  골 안에 정치는 소리 쌀바위가 잠을 깬다.
  
  백악기 큰 발소리 뚜벅뚜벅 들려 온다
  물고 튼 고래 떼는 한 끼 식사도 거른 채
  바위벽 암각화 속에서 물을 품어 올린다.

  광활한 억새평원 유황온천 김이 나고
  살아있는 단조 늪 파래소는 그대론데
  꽐꽐꽐 계곡을 열면 멀어지는 물소리.

  간절곶 일출 안고 가지산 눈을 뜨면
  해룡海龍이 여의주 물고 문무대왕 알현한다
  대동맥 태백산맥이 근육질로 일어선다.

치술령에서

  가슴 저민 기다림에
  다 무너진 동해 하늘
  맺힌 한 응어리만
  바위 되어 남아 있다
  행여나 님이 오실까
  굽어보는 먼 바다.

  동해여! 님 앗아간
  풍랑 거친 동해여
  역신 같은 바람 일면
  산도 바다도 통곡하고
  그 애원 삭히지 못해
  망부석이 되었다.

  비운에 묻힌 슬픔
  전설 되어 흐른 오늘
  살아 그리움은
  망망대해 꽃으로 피고

  못다 핀 그리움 하나는
  은을암에 묻혔다.

흙의 둥지

  거기에는 이슬 맞고 잘 다진 흙이 있었지
  투영된 잔잔한 물빛 불의 바람 스쳐가고
  옹기의 곧은 그림자 물은 그를 덮쳤지

  그 때 뒤 안에서 바람이 나를 불렀지
  자연에 순응하며 바람처럼 따르라던
  버거운 가슴을 열며 삶의 호흡 해댔지

  누구의 것도 아닌 흙 물 불 바람으로
  행복을 묽게 이게 온갖 형상 빚은 세월
  한 세상 함께 살아갈 나의 둥지 옹기는

신화의 바다―반구대

  원시림 바위벽에 바다가 잠들었다
  깃털의 온기처럼 신화 속 영혼들이
  콸콸콸 대곡천 따라 문명 독을 씻는다

  심해를 빠져나온 암각화 고래들은
  어둠 깃든 별자리로 바둑판 매김하고
  거북등 갑골문자로 돌쩌귀를 꿰맞춘다

  한 점 예각을 그어 만물과 교감하는
  우주로 전파 쏘는 풀벌레 동심원들
  별과 달 바람의 시를 물소리가 흥얼댄다

김장을 하다

  생소금 더미 속에
  맨살로 부대끼며
  켜켜이 익어가는
  김장독을 바라본다
  밥상 위
  맛깔 한 접시
  한겨울이 후끈하다

  군침 도는 포기마다
  맘 저려 쳐다본다
  얼마나 생이 짰으면
  소금 없이 살았겠냐
  기 꺾고
  결이 삭으면
  지나 내나 마찬가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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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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