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오후

김혜원

선명한 편집 1ㅡ괜찮으냐?

  먼 쌕쌕이 소리에도 등짐 떨어지는
  소리에도 행렬들 길 옆으로 구른다
  엄마도 업은 나를 재빨리 돌려 안고 할머니 치마폭에 죽은 듯 엎드린다
  “엄마 빠앙 엄마 빠앙” 세 살 박이 오빠의 작은 입을 큰엄마의 손이 급히 틀어막는다.
  콩 볶듯 볶아대던 총소리 멎고 쌕쌕이도 사라지자 
  사람들 하나 둘 고개 들어 서로를 확인한다
  “괜찮으냐?”
  땅만 보고 걷는 두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물으신다
  “예” 공손히 대답한 큰아버지가 조금씩
  뒤처진다
  “괜찮으냐?” 할아버지 돌아보시며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 다시 물은신다
  “예……,(괜찮지 않아요)”
  대신 답을 하는 손녀의 말뜻을 이미 아신 듯
  할아버지, 신발 두 켤레 신선처럼 나르신다
  행렬에 짓이겨진 엉겅퀴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한낮, 허기는 염치도 없다

논고동과 탱자 가시

  해거름에 깡통 두 개를 들고 논고동을 잡으러 간다. 물고랑을 건너뛰자 개구리가 놀라 튄다. 고랑을 타고 들어간 오빠가 멀어지자 논바닥에 박힌 오빠의 검정고무신을 씻어 논두렁에 가지런히 엎어 놓는다.
  “가시나야, 안 들어오고 머하노!” 또 시작이다. “여게 기양 있을란다” 선 머시마 같아도 논에는 선뜻 못 들어간다.
  “가시나가 머라카노 팍! 직이뿔라! 거머리는 내가 띠 주마 댈 꺼 아이가!” 멀리서도 눈을 부라리는 게 보이는 듯하다. 고무신을 벗고 들어가는 척 하다 다시 나온다.
  “가시나야 퍼뜩 안 들오나!” 빽 소리 지른다. 입을 삐죽 내밀며 ‘맨날 이름 나 뚜고 가시나라 캐!“ 하기 무섭게, ”가시나야, 빨리 들와 바라! 꼬디가 천지빠까리다“ 찔끔해서 들어가 드문드문 고동을 줍는데 어데서 기척이 난다. 고개 들어 보니 먼 논두렁 끝에 사람이 보인다.
  “오빠야! 인자 고마 나온나! 크일 났다!” 신발만 들고 신작로까지 뛰다보니 등 뒤가 조용하다. ‘우야마 존노, 오빠가 재핀는 갑다!’ 엎어지고 자빠진 꼴이 집에 혼자 들어갈 수도 없어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있는데 양손에 깡통을 들고 씩씩거리며 오빠가 온다.
  “오빠 니 재피뜨나? 마잤나?” 는 내 말에 어른 같이 씩 웃더니
  “니 머라 캤노! 내가 누고? 우쨌든가 가시나 니 감 지리는 소리 땜에 옷만 배릿다 아이가, 그란데 니 머때매 내뺐드노?” 하며 내미는 작은 깡통 두 개에 고동이 소봇하다. 미리 따둔 탱자 가시 두 개도 새파랗게 얹혀 있다. 집에 들어갈 걱정 대신 이마를 내민다. 깡통을 두고 온 벌로 꿀밤 한 대를 맞는다. 당연하다. 오빠는 대장이니까.
  ‘……대장이 잘몬하마 그땐 우야지? 할배한테는 말도 몬 할낀데?’

먼 길 1ㅡ텅 빈 신작로

  ‘엄마는 와 이래 먼데로 이사 왔노, 멀어 죽겠구마는’ 그래도 버스비를 타는 날은 뛰다시피 걸어 학교 정문 못미처의 만화방에 먼저 들린다, 아직 이 십 분 남았다 고무줄을 허리에 매고 벽에 줄 늘어 선 만화 중에 표지만 봐도 가슴 설레는 ‘라이파이’ 가 있다 오늘은 속편이다
  “아저씨예, 여덟시 오십 분 되거등 갈쳐 주시이소”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놓인 나지막하고 긴 나무의자에 앉아 날틀을 타고 태백산맥을 누비는 라이파이에 푹 빠진다
  그동안은 내가 라이파이의 짝이 되어 날틀도 조종하고 적도 이긴다
  다섯 권을 보고 나니 그제야 아저씨가 등을 떠민다 하이야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텅 빈 신작로를 지나간다
  문방구도 조용하고 매일 보던 뻥튀기 아저씨도 뻔데기 아저씨도 논고동 아저씨와 포또 아저씨도 다 있는데 없는 것 같다 아지 못할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돈다. 학교 가지 말까?
  대청소 때 하도 열심히 닦아 안이 더 잘 보이는 6학년 8반 교실 창문을 기웃거리다 선생님 안경과 눈이 딱 마주친다
  “빨리 들온나! 하기사 집이 좀_ 머나, 앉아 숨 좀 돌리거래이!”
  깜장 치마에 길에서부터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먼 길 4ㅡ문이 없는 집

  내가 우겨 그 여자중학교에 원서를 넣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놈의 당치도 않은 춘추복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 모두 내가 그 학교에 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 학교는 그해 커트라인을 두 번이나 치는 고무줄놀이를 했지만 누구도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말해 주지도, 묻는 이도 없었다. 그 깜깜한 귀퉁이에 나는 낙천적이고 철없는 사람이 살 집의 초석을 놓았다.
  방을 붙이던 시절, 체육관 높은 벽에 두 번이나 붙은 방을 두 번이나 가서 본 내 이름으로 기둥도 세웠다. 입학 때가 되어도 갈 수 없는 학교의 영광스러운(그해 지역에서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으므로) 합격증을 들고 찾아간 4월의 시골 여자중학교는 철없고 속없는 내가 다니기엔 그만이었다.
  눈치도 없어 그곳이 아주 멀리 돌아갈 내 길의 출발점인 것도 알 리 없었다.
  그 철없음으로 얹은 대들보로 집은 가끔 통째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조차 얹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 기약 없이 살았을 거고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 됐을 거였다. 그 확신 하나로 덜렁 얹은 양철지붕이 내는 환상의 소리를 나는 아직 듣고 있다. 하지만 그때 함께 붙었던 내 단짝 영자와 헤어진 게 슬프고 외로워 철없는 집에는 문이 없다. 내 얼굴 얼른 알아보고 달려오라고. 제 집처럼 드나드는 바람이 소식 물어 올까봐. 영자야! 어디있니?

  찾습니다! 남산초등학교(25회 졸업)와 제일여중을 졸업하고 신명여고를 들어갔다는 소문 까지 알고 있는 이영자, 김종달이라는 문패가 걸린 집에 살았던 둥근 얼굴의 친구를.

월정역ㅡ아버지의 나라

  오지마라! 오지마라!
  거기
  땅 속에 붉은 징검다리 숨은 걸
  어찌 아는지
  고라니 한 마리 잘도 피해 다닌다

  비틀거리는 하늘과
  녹슨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쓸쓸히 찍고 돌아오는 길
  하늘은 낮고 길은 멀다

  바람에 쥐어 준 편지 한 장
  그새 배달됐는지
  사진 속 배경 멀리
  할머니를 닮은 낯선 얼굴이
  비를 맞고 서 있다

어머니와 그림자

  해질녘 얼음 박힌 손으로
  남포알의 그을음을 닦아내던 어머니
  말갛게 닦은 남포에
  희망 조금 돋우시는 어머니를 흉내 내던
  그림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것이었다.
  그 그림자,
  삯바느질로 밤을 새는 어머니의 등뼈를
  소리 없이 휘어 놓더니
  물 먹듯 먹어치운 빛에 체해 금방
  죽을 것 같더니
  내던지면 개도 안 돌아볼 것이 살아나
  어머니를 자꾸 쓰러뜨린다
  어머니의 한 생애를 거의 다 먹어치운
  그림자가 사라지길 기도하다
  소스라친다
  한 평 무덤에서야 떨어져나갈 그림자
  아직 있어 축복인 것을
  이제 돋울 심지조차 잊어버린 어머니
  그림자의 키도 점점 작아진다

갓등이 있는 골목

  하늘에 두레박을 내린다
  언덕 위의 집보다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내린 날은
  밤새 빈 지게로 언덕을 오르거나
  까만 하늘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날
  소금 한 줌 우물에 던졌다
  그렇게 내려 온 큰 길은 벌 나비 없이도
  입가에 꽈리꽃을 피웠고
  꽃 진 자리마다
  부스럼 자국을 열매처럼 남겼다

  휘황한 거리에
  골목의 어둠 한 줌 확! 뿌리고 싶은 밤
  희미한 갓등이 그리운 밤이면
  떨어진 불빛에
  그날처럼 왕소금 훌훌 뿌린다

서설입니까?ㅡ목장일기

  마지막 기둥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뼈처럼 쌓인 폐허에 이십년 목장이야기가 묻힌다
  밤새 생긴 빙벽에 매달린 로봇의 귀에
  익숙한 전파가 잡힌다
  이명인가? 지금도 눈은 밥 퍼붓듯 하는데
  온 나라가 무너지고 내려 앉아
  아우성인데, 서설*이라니?
  적과 동지의 경계를 넘나들던 두
  밀랍 인형의 은근하고 낮은 목소리가
  직선으로 와 꽂히며 로봇의 어깨가 들썩인다
  ‘로봇도 죽을 수 있을까?’ 찌르륵_!
  멀리 있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
  바닥난 축전지를 눈치 채는 이 없어
  로봇이 하늘을 본다
  기진한 내게 마지막 신호를 보낸다

반전에 대한 작은 생각ㅡ목장일기

  누군가 소리친다
  “맨손으로 빙벽을 오르는 건 위험해!”
  아니, 몇 군데 어긋난 관절 꿰어 맞추고
  다시 일어서면 되지, 그러니
  빙벽이 높아도
  크레바스가 깊어도 겁날 게 없지
  로봇이 좋은 건 그 때문이지!
  죽지 않고 일어서는 바로 그거지!

  추락이 겁나는 건
  바닥에 깔려 있는 초록의 융단이다
  그 안에 숨은 것의 보호색이다
  쓰러짐의 반전이 꼭 일어남이 아니듯
  추락하는 것의 꿈도 상승이 아니다
  아주 가끔 사람으로 착각하는
  신경 줄을 스스로 자르는 거다

송아지를 받으며ㅡ목장일기

  아가야, 너는 지금 어디만큼 와 있니?
  뭐이 그리 걱정 되니?
  걱정 말고 앞발을 쪽 곧게 펴거라
  다리 위에 턱을 꼭꼭 붙이렴
  서두르면 안 돼
  그렇게 있다가 엄마가 밀어내면
  힘차게 나오너라
  그래야 네 엄마의 고통도 줄어든단다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네가 보는 세상은
  엄마의 뱃속보다 백배나 어둡지만
  걱정 없다, 아가야!

  이 엄마가 먹여 주는
  네 엄마의 첫 양식을 안심하고 먹어주렴
  그러면 세상도 밝아지고
  네 엄마의 얼굴도 환하게 보인단다
  아가야!
  엄마보다 사랑스런 내 아가야

비 개인 오후

  비 잠깐 그친 사이
  어느 햇살로 피웠는지 넝쿨마다 한창인
  뒤란 호박꽃 깊숙이 든
  나비 한 마리

  순식간에 비 다시 쏟아지고
  모로 누워 잠든 나비,
  양철 지붕이 왁살스레 흔들어도
  기척이 없다

  한 뼘 땅을 파고 묻은 화관花棺에
  호박잎 몇 닢 따 덮은
  비 개인 오후
  무엇에 찔렸는지
  저녁 내 손이 따갑다

참새 이야기

  이른 아침 사슴 장에 날아 든
  참새 한 마리
  물통 언저리에 앉아 제 키보다 내려 간
  물에 대고 연신
  마른 부리 짓을 해 댄다
  녀석이 안쓰러워 물을 채워 주어도
  쪼르르 내려 앉아
  세 모금 마시고 떠난다
  한참 만에 쪼르르
  아기 참새 앞세우고 돌아온 참새 가족
  밥상처럼 둘러 앉아
  엄마의 말귀 쫑긋 하더니
  물 두 세 모금 찍고 오르르 날아간다
  저들이 불러내 준
  내 아이 그만하던 젊은 날
  부끄러운 얼굴
  떠오르는 오늘은 기분 좋은 날!

노란 기억 푸른 소식

  이 날은 아침부터 설레었지요
  내 딸아이 손이 단풍잎 만할 때
  덕수궁 국화 전시회 다녀온 뒤
  첫 나들이었습니다
  어느새 엄마보다 커버린 아이 곁을 걸으며
  그때와 사뭇 다른 감회를
  아이 손을 잡았을 때는 몰랐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지,
  어른이 된 아이 곁에서 아이가 된
  엄마 홀로 추억을 만들고 돌아와 생각하니
  내내 잡고 다닌 아이 손의 체온과
  용문사 은행나무 내음만
  기억의 끄나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식탁의 빈자리에 끼워 놓은
  그날의 입장권 두 장
  노오랗게 엄마의 기억을 물들이는데
  아이는 지구 저편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푸른 소식을 전합니다

미완성을 위하여

  눈이 오려는지
  허공의 부피 팽창하는 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날을 꺼내어
  다리미질을 한다
  선반 한쪽에 밀어 둔 날을 내려
  먼지를 턴다
  그 날의 앞에 저 날을 붙여 만든
  그림책 한 권
  눈 내리는 밤 홀로 축배를 든다
  미완성을 위하여!

어떤 날

  몇 날을 
  하루로 묶어 버리고 싶을 때는
  단 한 사람의 손님이 되어
  차창도 
  바퀴도 없는 열차를 타고 싶다 
  하얀 어둠이 내린
  천년이 하루 같은 그 역의 
  차표 한 장 들고

어미거미의 외출

  달무리 지는 밤 외출을 한
  어미거미
  허이허이 줄을 뽑아내며
  고갯마루에 오르면
  잡목 사이를 헤집던 바람
  이슬 몇 점 두고 온 집 문을 흔든다
  기다리는 이 없는 약속
  길가에 세워두고
  동아줄 같은 길을 따라
  돌아오는 어미거미
  집 한 귀퉁이에
  제 빈 몸 부적처럼 걸어두고
  훨훨 산을 넘는 꿈을 꾼다

아이야

  잊지 마라!
  날선 보습으로 뒤집은 묵밭 내음이
  하도 좋아 한참을 서서 맡던
  엄마의 달디 단 추억을
  매끄러운 물 떼는 바람일지니
  등줄기의 푸른 땀과 바꾸면 안 돼
  그래도 네 이마의 소금기 짜지 않거든
  내일을 염려한 적 없던 때를
  잠시 다녀와
  먼 바다일 필요는 정녕 없단다
  네 마음에 보이는 게 다 네 거야
  너는 아직
  키 큰 낙엽송이니
  아카시아 뿌리처럼 깊고 옹골지게
  발로 땅을 움켜 봐

뽑혔기 때문이지

  어느 밭이든 뿌린 씨알들 웬만히 자라면 싱 박히기 전에 사정없이 뽑힌다. 그래, 뽑히는 건 좋은 거지, 품었던 흙 속속들이 털어낼 때 아무리 아파도 참아야 하는 건 뽑혔기 때문이지. 흙이 털리는 순간 숨이 막히고 속도 쓰리지. 왕소금 뿌려지면 켜켜이 물고 있는 이물질 뱉어내며 서서히 죽어가도 참아야 하는 건 뽑혔기 때문이지.
  삶을 결박하는 굴레에 발효라는 말이 있다. 우적우적 저항의 소리 낼 때마다 왕소금 지르기 위해 있는 말이지. 설죽어 생소리 냈다가 한 번 더 지르는 왕소금에 두 번 죽어서는 안 돼. 그러니 마지막 돌을 지를 때까지 숨죽이고 있겠다고. 잘 죽을진 나도 몰라, 잘 죽기도 어려운 세상인 거 너도 알잖아.

나비는 알았을까

  풀잎 스치는 소리에도
  출렁이는 햇살에 대고도
  “야! 이놈들아! 난 아직 살아 있어!”
  외치던 빠삐용
  부걱부걱 소리 나는 무릎 일으켜 세우고
  몸을 던진 순간에도
  “야! 이놈들아! 난 아직 살아 있어!”
  그날의 외침
  파도 위에 살아 넘실대는데
  바다를 건넌 빠삐용은 알았을까
  그 바다가 꽃이었던 것을
  절벽과 바다 사이
  거기가 제
  유일한 하늘이었던 것을

하늘의 심장

  제 등날을 사르며 올라오는
  하늘의 심장에
  저기 바다다 자지러지는 것 좀 보아

  우와! 기름 부은 듯,
  순식간에 제 살을 녹이고 빠져나오는
  저 불의 뼈 좀 보아

바다 사리舍利ㅡ염전에서

  어디에 저토록 
  빛나는 뼈가 숨어 있었을까 
  더는 태울 수 없는
  극점極點에서 
  스스로의 다비를 멈추는 바다 
  무한정의 
  생명을 쏟아내는 저
  금빛의 자궁

진주조개

  괭이갈매기 억센 부리로도
  물어낸 수 없는 순수의 고름주머니를
  하얗게 물고 있는
  바다여!
  밤새 토해도 끄덕 않는
  뭍에서 전이된 뿌리 깊은 종양을 물고 있는
  너 바다여, 기다려라!
  섬이 된 진주조개 슬프게 입을 여는
  첫새벽
  푸른 달빛 한 줄기
  비수처럼 품고 내게 달려가리니, 너는
  비밀스레
  가슴만 내 놓아라!
  달빛에 벼린 비수 너를 벨까 두려우니.

섬 집 아기

  뭍으로 간 마지막 아기가 살던 집
  노래만 남은 그 섬에 가
  망사리 가득 굴을 따야지
  터질 듯 불은 가슴 움켜 안고
  모래밭 달려
  바다가 품은 아기 받아 안고
  젖 물려야지
  잘 생긴 소라 하나 꺼내어
  물질로 갇힌 숨, 길게 뽑아 뭍을
  불러내야지
  이 섬에 우리 있다는 신호
  보내 봐야지
  호롱불 심지 올려
  섬 그늘 돌아오는 발걸음 들어봐야지
  그래도 기억 못 하오시면
  우리가 낳은 아기
  여기 있다! 나팔 크게 불어야지

물고기 시계

  청태 낀 바위에 미끄러져
  금이 간 낡은 시계 큰물에 놓아주고
  어망에 걸린
  기울어진 달의 남은 조각과
  희미한 별 몇 개 거두어 돌아가는
  낚시꾼의 손목에 흔들리는
  금빛 지느러미,
  멈춘 시계바늘을 돌린다

노랑나비

  아가의 앞니에 꼭꼭 물려
  피가 베인 앞섶을 수줍게 감추던
  아낙의 다섯 번째 계절은
  궂은 날에도 솔내음이 났다

  장터에서 걸음마를 배운
  민들레를 닮은 아기,
  아기가 잠이 들던
  검정우산 속 등 굽은 아낙의
  가슴이 비었다

  찢어진 유산 틈으로 든
  햇살 한 조각
  나비처럼 아낙의 등에 앉아
  노다 가는 저물 녘, 아낙의
  마지막 계절에서 쑥내음이 난다

그 곳에 가고 싶다*

  천둥소리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 구비마다 드러내는 태안사 길은 누구나 고개 숙여지겠다.

  이끼 낀 부도탑에 조심스레 손 내밀면 천년의 시간이 덥썩! 손도 잡아 줄 것 같다. 손가락을 소신공양한 스님이 행자에게 주는 말씀 어깨 너머 들으니, 출가하지 않고도 소신공양 없이도 평안으로 가는 길 찾을 수도 있겠다. 억새와 조릿대 흐드러진 달마산 가파른 길이 혹 그 길일지도 몰라.

  도솔암 약수로 마음 해우고 정좌한 섬을 보면 소매 안에 감춰 둔 저승꽃도 내보일 수 있겠다. 구만리 장천 떠돌던 바람기도 손바닥 안이었음을 알겠다.
  그리하여 남은 날을 바람처럼 살아도 문제없겠다.

  허나 중생이 즉심즉불卽心卽佛 깨닫기가 그리 쉬우면…….

겨울나무에 접붙이기

  봄을 위해 훌훌 옷을 벗는 너와 달리
  나의 옷은 한짐이다
  꺾이고 부러진 몸 당당히 드러내는
  너와 달리 나는 아직도
  칸막이 안에서 생각 중이다
  겨울나무야,
  이제 막 시작된 네 단전호흡 속에
  타다 만 내 시간의 생솔가지
  밀어 넣어도 좋으냐
  일정한 맥이 뛰는 너의 사타구니에
  사선으로 자른 내 손목 접붙여도 좋겠는가
  봄이 오면
  내게도 너의 맥박 뛰게 하리라는 약속
  나 믿어도 좋은가?
  다시 한 번 묻노니, 내게 들면
  나 진정 적멸에 들 수가 있겠는가?

冬柏

  새로 입주한 그곳의
  주민이 되어
  신명나는 춤을 추고 싶었다
  눈물로 지핀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밥도 짓고 싶었다
  머슴처럼 비질도 하려고 했다
  허나 숲도 바람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군데군데 복병이 숨어 있는
  전장이었나 보다
  작은 방에서 새어나는 큰기침 소리,
  이제와 생각하니
  전기밥솥 무수한 그곳은 거대한
  구내식당이었나 보다
  주민 없는 자치구였나 보다

  툭툭 털고 일어나
  등에 박힌 눈총 살며시 뽑아
  가마솥 터에 넣고 감사히 사른다
  올올한 잿더미에
  거짓말처럼 동백이 붉다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또 신호*가 온다
  오늘은 어디서 무슨 일인가
  이일 저일 떠올려도 짚이는 게 없다
  그럼, 어제 그 일이 오늘까진가?
  저와 나 무슨 긴한 사이라고 손께서는
  이리도 자분이 정표를 남기시나
  정말이지 숱한 손 중 이 손이 집요하게 고이적다

  이런 날은 손이 앉은 자리 쓱_각 베어
  밥상 밑에 껌처럼 붙였다가
  심사가 편한 날 찰지게 다시 씹어
  귀신도 모를 외진 곳에 아주 붙여버리고 싶다

  손 자리를 영영 없애버리는 거다
  하기사 이 손마저 없었으면 세상은 또
  얼마나 고적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소리 없이 베인 상처는
  누가 알고 달려와 싸매 줄 건가, 그러니 손이여,
  오려거든 욱신욱신 화끈하게 오라!

뽀데미장원

  간판보다 미닫이의 꽃무늬 가리개가 더 익숙한 뽀데미장원, 오가는 이가 맡긴 보퉁이나 공손님에 장날이 따로 없는 뽀데미장원이 겨울 전에 문을 닫는다는 소문이다.
  오늘은 마샬 미장원의 미스 맹이 건너 와 뽀데 원장의 머리를 정성스레 말며 지난 밤 드라마를 실감나게 풀고, 한쪽 싱크대에서는 방앗간 집 여자가 발에 감기는 고양이를 연신 밀어내며 국수를 만다. 뽀데 원장이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멸치국물에 양념장만 얹은 국수대접을 들고 난전으로 간다. 검게 탄 얼굴로 박꽃처럼 웃어주던 아낙 대신 아낙의 자리를 차고앉은 이가 국수대접을 받아 든다. ‘나비 에미는 안 올 모양인 게야’
  나비가 떠난 후 거짓말처럼 늙어버린 뽀데 원장이 딸처럼 품어주던 성 찮은 아낙과 아기 생각을 또 한다. 등 굽은 어미 대신 틈만 나면 업어주던 아기, 장터에서 나고 자라 난전 사람들 서로 돌보던 아기, 노란 나비 핀을 사 꽂아 준 아기가 뽀데 원장이 “나비야!” 부른 뒤 꽃밭으로 아주 가버린 나비, 뽀데 원장은 박복한 자기 탓이라며 오래 어둡고 말이 없었다. 뽀데미장원에서 마지막 파마를 한다. 홀로 키운 아들이 개업 때 지어 준 이름이 촌스럽고얄궂어도, 벌이가 시원찮아도, 명절이나 군에 간 아들 면회 말고는 삼십년을 문 닫은 적 없는 뽀데미장원, ‘오늘은 작별 인사라도 하리라‘ 면서 시간 반을 입만 달싹거리다 파마가 끝났다. 뽀데 원장이 먼저 손을 잡고 흔든다. 육십이 넘도록 아들 바라지로 핏줄이 불거진 손이다. 눈도 못맞춘 채 손을 놓고 나와 차가운 머리를 쥐어박는다. 화가 나 참을 수가 없다.
  1998년 마지막 달력을 넘기는 창밖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린다. 파마할 때가 되었다. 여적 떼지 않은 뽀데미장원 간판이 멀리 보인다. 빛바랜 가리개도 그 냥 있다. 뽀데미장원 앞에 서니 갑자기 갈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 어디로 가지?

아프리카와 시계

  그의 선물을 받고 문득 떠오른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걸핏하면 강으로 뛰어드는 결벽의 그가
  거기 서 있다.
  살아 있는 채로 건네 준 그의 선물은
  마지막 정착지로 가거나 머물기에 충분했지만
  아프리카는 무인도가 아니었고
  세계지도를 허리에 달고 뛰어들기에 강은
  어둡고 단단했다.

  들숨만 쉬는 그것은 죽어서도 숨소리를 냈다
  킨케이드-그는 킨케이드를 닮았다는 말을 싫어한다-의 선물이
  처음 죽었을 때 시골병원을 전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카라가 절정인 겨울
  아주 죽은 그의 선물에서 숨소리 대신
  아프리카로 떠난 그가 아열대를 지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도시로 달려가 살려 낸 킨게이드의 선물을 들고
  찾은 우체국
  주소를 묻는 직원 앞에서 쩔쩔매는 여자가
  반대편 거울에 초라하다
  세계지도가 그려진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진다

  꽃은 놓아두고 꽃의 이름만 가져 간
  그는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시베리아가 다르지 않다는 걸

DSLR

  두꺼운 옷을 적신 것이 꼭 눈 비 만이겠는가
  솜옷을 입고도 추운 것이 한기 때문이랴 싶어
  한 번 더 미쳐보기로 한다
  내 두 번째 애인은 제 눈에 드는 것의 영혼을 빼내어
  살빛 알약 두 세알로 자고 깨는
  심장을 둘러매고 사냥을 나가는 떠돌이다
  때로 초점 없는 눈빛이 불안하지만, 이 바닥에
  쳐 주지도 않는 관념을 주워 담는 솜씨는
  그럴 듯하다
  제가 내게 내가 제게 미치지 못해
  무한대로 떠나보낸 첫사랑이 길을 잃었다
  그의 검지를 놓지 못해 목 놓아 부르지도 못 하는
  첫사랑을 그가 줌 인 해 불러들이지만
  첫사랑은 바깥에서 완고하다
  오늘은 내가 가끔 들어가는 원심분리기에
  그의 손을 잡고 들어가기로 한다
  말갛게 분리된 것보다 찌꺼기들의 결합은 편안하다
  기계적인 이분법이 불안하지만, 이 넓은
  별천지에 내 눈에만 보이는 별이 어디 있을까

노을댕기

  내 손에 땀 그만하면
  한세월 소리 없이 흐른 그대 강물
  창포물인 양 머리 감고
  붉은 그대 옷 한 자락 베어 내
  곱게 빗은 백발에
  댕기들이면 안 되나요
  나 먼저 강 하구로 달려 가
  핏빛 그대 강물에
  문수 작은 내 발 밀어 넣으면
  안 되나요

  산까치 떼로 우는 날
  평생을 잠잠했던
  그대 가슴에 귀를 대고
  강바닥에 흐르는 그대 숨소리
  들으면 안 되나요
  그때도 말없이
  가슴만 열어 보일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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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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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아지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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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 개인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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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란 기억 푸른 소식

    31

  • 미완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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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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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뽑혔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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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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