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타

안민

눈사람

  그대가 건네준
  파란


                    목도리를 
          두른 채 술을 마시는데 
     겨울이 왔다 백 년 후의 십이월 
     진눈깨비 같은, 그즈음 독재국가 
    에선 어린 여자를 사랑한 남자 먼 
     길을 떠났고 안녕하지 못한 어느 
      시인이 본적을 파냈고 매혹적인 
       유부녀는 이혼을 모색하였다 
        낙타는 제 눈물을 마시며 
                  저녁 사막을 
            횡단하였고 난 이유도 
        없이 어두웠고 …입이 있지만 
      말 없음을 용서 바랍니다 목이 참 
 따뜻하여 사랑하지 않아도 되어 슬펐고 
슬픔이 아득하게 차가워 쉽게 녹지 않을
거라 여겨 불행하지 않았다 목이 포근하
였으므로 비윤리적이었고 몰락에 집중
하였고 내 유성만 바라보았다 겨울은 깊
어 그대 건네준 목도리 빛깔처럼 본향 
카시오피아는 푸른 바람펄럭였고 난 좀
체 녹지 않았고 …아, 눈이 있지만 바라
보지 못함을 용서 바랍니다 그러니까 고
백하자면 나는 목 이외엔 모두 가난하였
다 …내가 여전히 둥글게 보입니까 자주 
질문하였고 그러면 밤하늘 카시오피아
 는 셀 수 없을 만큼 나를 낳았다 하얗
  게 흩날리던 내 영혼이 발아래를 내
   려다보면 그대 눈 안에서도 밖에서
    도 목도리 포근한 올처럼 평화로
         웠는데 나는 아무도 몰래 
            해빙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도 몰래 누군가 내 몸을 버리고 있었다


묵찌빠

  전면전을 선포했다 아름다운 네가 돌아오면서 무엇도 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며 무엇도 할 수 있는 권리를 외치며

  피할 수 없는 전쟁, 
  공격이 개시되었다 어떤 연민도 없이 

  갈등도 딜레마도 없는 너
  갈등도 딜레마도 많은 너

  그렇다 너는 애초에 번역될 문장이 아니었다 어떤 문양이든
 지문이 흘러나왔다 나는 포위되었고 

  ✽

  유리는 깨어지기 위해 만들어지고
  손은 무너지기 위해 태어난다

  백동전은 딱 하나
  너는 오빠들의 백동전을 훔쳐 피아노를 구입했다

  피아노 위를 
  횡단했던 건 손가락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주먹이었다

  쾅- 쾅- 쾅
  소리에 놀란 너 
  음률이 악보 뒤편으로 넘어가듯 너는 사춘기로
  사춘기의 문양으로 그 성격으로
  여기에 왔다

  ✽

  네가 묻는다 
  산산이 부서진다는 게 뭐죠?

  웃자란 네 애인들이 대답한다 
  피아노의 손을 찾아봐
  나무의 손금을 찾아봐
  귀 잃은 악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봐

  닮았다는 건 곧 몰락
  닮았다는 건 곧 침몰

  늙은 네 오빠들이 도끼로 피아노를 내리찍는다
  피아노의 내장들이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다
  가위를 든 네가 또 묻는다
  그럼 너희들의 어제는 뭐지
  손목을 덜렁거리며 잘린 손목을 이어 붙이며 네 애인들이 대
 답한다
  손목 없는 바위지
  몸을 버린 우직한 주먹…… 손바닥을 펴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

  전쟁에 속하지 않으려는 손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그사이 패배와 승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든다 또다시 저녁
 은 오고

  긴 평화가 시작되고 있다 숨이 막힌다 전쟁은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되는 법 규칙대로 네 애인들이 죽는다 잎사귀들도 차례대
 로 죽는다 

  죽은 네 애인들이 내 몸을 정탐한다 귀퉁이에서 패배의 눈물
 을 마신다 어둠의 보자기를 펼치면 그 사이로 가위 같은 비가
 내린다 

  비는 누가 버린 눈물입니까? 

  ✽

  간첩은 밖에도 안에도 거주한다 
  자주 갈등한다
  자주 망설인다

  그리움도 유통 기한이 있습니까 

  가위바위보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이 다른 지대입니다

  그럼 난 누가 버린 폐기물입니까 

  영혼을 꺼내 말려야 한다고 간첩이 자주 속삭인다 정말이지
  세상은 네 손처럼 의아하고 다수이며 나는 한 번도 다수에 속
  하지 않았다 

  룰을 배운다는 건 자기를 지우는 여정이라며 네 애인들이 울
  먹거린다 화분 잎사귀에서도 안개가 흐르고
  서랍 속엔 길 잃은 손들이 그득하다 

마지막 편지— 칸나에게

  우리가 경험했던 공간에서 너와 나를 표절한 남녀들이 가끔
방영된다. 더러는 그들도 편집될 것이다. 기억 앓는 심장을 껴
안고 풍문이 던지는 문법을 피해 너에게 향하다가 나는 이십
대에 갇혀 있다. 가난한 손톱이 그렇듯 창백한 관계는 쉽게 깨
어진다. 그러나 허기진 손바닥 무늬는 선명하다. 어제의 내 문
장은 날개 꺾인 새의 빛깔이고 오늘 내 그림자는 꾸겨져 있다.
내가 너를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 하고 입을 벌려 내 안에
수몰된 너의 처녀를 꺼내줘야 한다. 때때로 새가 작곡한 음률
을 삼키고 심장에 붉은 행성이 떠오르도록 바람 속에서 전류를
일으킨다.

  바람과 일치하기 위해 경전을 찢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보내곤 했다. 외경과 세상의 경계를 계산하며 불온과 애증을
횡단하여 내 영혼이 바람 틈에서 펄럭이는 것을 바라보면 행복
하다. 네 숨결이 내 몸의 오지를 다 돌고 빠져나왔을 무렵 나
는 꽤 낡아 있었다. 그즈음 바람이 스스로 뼈를 드러냈고 내 몸
깊은 내륙에서 강진이 일었다. 바람이 제 호흡을 네 동공에 집
어넣는 지대는 세상 밖 계절이 쓰러지는 때일 것이다. 

  너를 호명하면 나뭇잎들은 편곡을 하고 음률은 나를 해체시
킨다. 새가 바라본 허공에선 병든 고래나 길 잃은 목마가 생성
되거나 지워진다. 이 순간 어떤 물상이 영혼을 버리고 공중에서
추락한다. 그리고 어느 별 후면에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죽이
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망각하는 것이 목격된다. 그렇지만 시
간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실도 흔적에 불과하다. 흔적은 표현되
는 것이지만 착오이거나 순간이다. 나는 미완성된 채 죽어간
다. 그 사실이 두렵지만 공포도 흔적이다. 다만 통제되지 않을
뿐이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귀향할 수 없기에 악보를 잃어간
다. 안 된 일이지만 추억은 불편한 장르이다. 상징은 청춘의 제
물이며 그것은 불화 속에서 더욱 활기를 지닌다. 젊음이란 것
도 사실은 음각된 상징이다. 지금, 불편과 상징이 경계 위에서
뒤엉킨 채 서성이며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못한다. 사랑해서 미
안했다는 내 입술은 진부한 색깔이다. 네가 내 심장에 침을 뱉
었을 때 그때 이미 청춘은 죽었다. 짐승이 질주하는 구간과 바
람이 맴도는 구간 사이에서 내 심장은 힘겹게 깜박인다. 죽어
가는 짐승에게 네가 호흡을 보내더라도 이제 더는 편지가 배달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진실로 나는 죽었기에

침대가 있는 무대

  입이 없다. 입이 없지만 때로는 운다. 나는 겨울이거나 낙엽.
밤이 오는 게 두렵다는 듯 아프게 우는 새에게 경의를 표한다.
새의 울음은 독백이거나 문학. 당신의 문학은 불온했습니까.
최소한 나의 구간은 눅눅하고 음습합니다. 몰락의 바닥이 어
디쯤인지 알 수 없다. 몰락은 홀로 하는 전위예술. 깨어진 선인
장 화분이거나 찢어진 명태. 

  복수複數 혹은 복합인 적이 없다. 나는 오리알이거나 소녀의
잃어버린 한쪽 귀걸이. 몸을 사각 끝에 걸치고 있을 때 가장 위
험하다. 사각은 감옥이거나 그믐. 어깨를 면에 기대고 있을 때
도 위태하다. 그건 불면이거나 몽유. 무용하지 않지만 용이함
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졸다가 나를 놓치게 되면 영혼이 출렁
대거나 영혼이 얼굴을 놓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눈이 내린다. 나무와 개와 불빛과 차량이 우르르 쏟아져 나
온다. 검은 승용차와 위태한 인간이 쾅 부딪힌다. 떠나가고 떠
나오는 눈송이들. 밖은 혼란스럽고 입 없는 물상은 어떤 동요
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 친근하면서도 무서운 짐승이다. 입이
없다는 건, 의자이거나 젖가슴. 아무리 가슴을 더듬어도 꽃이
필 기미는 없다. 꽃을 아무리 더듬어도 가슴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에는 흥분과 발화를 모색하지 않을 거다. 

  가면증은 유전이다. 나무가 바다로 향하고 있다. 바다를 마
신 사내가 나무를 끌어안고 운다. 가면증은 추상이거나 연극.
빗새가 향하고 있는 곳은 심장이거나 노을. 내 얼굴에 더는 걸
칠 여분의 가면이 없다. 동공에서 자라는 건 원뿔이거나 얼음.
오독이 밤을 메우고 닿을 수 없는 곳에선 애인이 나를 위해 가
면을 낳고 있다. 하나, 둘, 셋… 마흔다섯.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생각이 가시밭에서 자란다. 누가 가
시를 엮어 침대를 조립하는가. 가시밭은 전생이거나 후생의 오
늘 밤. 내가 누운 곳은 한 뼘 지도일 수도 다쉬테 사막일 수도
있다. 수음을 설계하다 그만두는 밤이면 모래 먼지 뿌옇게 들
이친다. 나도 침대도 더는 키가 자랄 수 없다는 걸 생각할 때
면 눈 안에서 붉은 선인장이 피어난다. 

  그녀는 어느 별에서 폭발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죽은 개 때
문일 수도 있고 미술 때문일 수도 있다. 추억엔 왜 꼭 배경이 필
요한 걸까. 미술은 새의 울음이거나 푸른 독백. 매주 금요일에
새의 울음을 두 편씩 그리기로 했던가. 내가 분리수거될 수 있
음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기도 또한 전위 예술이거나 선인장.
후생에선 찢어진 명태이거나 조화. 매일 밤 독거인 채로 낡아
가거나 액자가 된다. 

  화면 속에선 언제나 하나 이상이 펼쳐진다. 드물게 셋일 때
도 있다. 둘 혹은 셋이란 건 섹스이거나 분쟁. 섹스이든 분쟁이
든 고독에 대해 나무의 심장이 운다. 그것은 질투이거나 질색.
침대의 입장에선 얼마나 무기력할까. 나는 다리가 두 개, 침대
는 다리가 네 개, 침대는 최소한 네 개 이상을 지탱할 수 있다며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 여섯 개의 다리는 어떨까. 그건
이사移徙이거나 영화.

  누구도 의도하고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의도를 품
고 절벽 아래로 낙하한다는 건 겨울새이거나 빗물. 자살을 위
장한 무의식이 위통을 앓는다. 꿈이 너무나 선명한 것에 위통
을 앓는다. 위통이 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해석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노래를 짓는 식물과의 동침을 갈망하곤 했다. 혹, 그날이 오
면 체위는 나의 형태일까, 아니면 식물의 형태일까, 생각에 잠기
면 회색 졸음이 목 근처에 도달한다.

  오늘은 입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다. 말없이 삐걱
삐걱 울기만 한다. 내가 잠을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잠이 침대
를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침대가 여자를 꿈
꾼 것인지, 왜 불면인지 도무지 말이 없다. 어쩌면 머지않아 침
대가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슬픔을 함께했으니 서로의 수
음을 관찰한다는 건, 달빛에 젖은 안개 같은 거. 몸이 나무처
럼 딱딱해지는 것은 성욕이거나 식욕. 몸이 시트처럼 푹신한 것
은 위통이거나 나무의 심장. 사춘기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잤지. 그런데 왜 이 계절에도 눈은 식은땀을 흘리는 걸까. 침대
의 키가 자라지 않는 것은 침대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고 침대 바깥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계산하기 때문. 오늘
밤에도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잠들 것이다. 그러면 내 머리 위
로 토막잠처럼 낯선 새들이 토막토막 날 거고

증명사진

  1. 내가 그에게

  몸을 지운 채 어둠 안에서 꽤 머물렀는가 보다
  창밖엔 진눈깨비 흩날리고 얼굴은 시리다
  그가 나를 사각에 가둔다
  나는 사각에 갇혀 먼 길을 떠날 것이고 
  그는 사각 밖 겨울에서 불안스레 서성일 것이다
  그가 탁자 위에 나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별을 채비하고 있는 우리,
  그의 눈동자에 흐린 바람이 고인다
  몇 장의 나는 이미 아득한 곳으로 떠났고
  떠나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는 아직도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캄캄한 어느 봉투 속으로 들어가 
  떠나야 한다 떠나서 그를 증명해야 한다
  그에게 나의 기도를 건넨다
  밖에는 여전히 바람이 매섭게 분다

  2. 내가 너에게
  탁자 위에 너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몇몇의 너는 한 장 우표처럼 붙여진 채 먼 곳에서 행방이 묘
연한데 너는 여전히 표정 없는 표정으로 고정되어 있다

  미안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다 

  봄 여름 가을이 어둠 저편에서 왔고 어둠 저편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겨울, 회색을 배경으로 너는 눈빛마저 소실점을 잃
으며 낡아 간다 네게로 나를 보내던 그 사진관 나는 최선을 다
해 고정되었는데 

  지금은 3×4㎝ 안에서 마른 잎처럼 푸석거리는 너, 어깨는 굽
은 듯 비스듬하고 머리칼은 바래지고 있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여전히 최선을 다해 정지되어 있다 그렇게 너는
정지된 채 숱한 불면의 날들을 보냈겠지만 

  여전히 일기는 불안하고 증명될 내일은 안개처럼 흐리다

사라진 지대 혹은 금기— 단 한 번 경험한 계절이었다 선을 그었고 밟지도 넘지도 않으려 했다

  선 너머는 북국北國이었고 
  선명해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는 경계를 넘었고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흰고래 한 마리 금지를 넘고 있었다
  바닷새들 하얗게 떠다니며 울었고

  그림과 그림의 그림자를 버렸고 그림 속의 색깔마저 버리며
오로지 선과 악을 집착하며 점이 되고 싶은 날들이었습니다
  

  차가운 태양, 북국의 바다
  내 몸은 쇄빙선이 아니므로 시린 바다를 뜨겁게 받아쓰기만
했다
  문장은 적도처럼 타올랐지만 경계를 넘지 못했기에
  어느 문장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반듯하다고 했다

  넘지 않는다는 게 무덤에 더 가까운 법입니다 사랑할 수 없
어야 살 수 있습니다 들고양이는 하루에 삼천 번 선을 넘지만
희미해질 뿐입니다


  생각은 늘 경계 밖에 존재했다
  사선을 긋는 밤이면 
  선 안에 놓인 몸이 말기처럼 병을 앓았다
  쿨룩이면 얼음이 쏟아져 나왔고
  장작을 태워도 녹지 않았다

  북국을 분석하던 시인이 선에 관한 맹세를 언 비처럼 뿌리며
외롭게 죽어 가던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금지된 문장을 펼친 이는 눈이 하얗게 타들어 갔고
  금을 앓았다
  북쪽을 향한 손등은 언제나 어두웠다
  때로는 오선을 긋고는 그 위에 
  립스틱을 찍었다
  음악이 드라이아이스만큼 뜨거웠다

  음률은 두려운 선이라고 밤마다 노트에 적으며 독주를 마셨
습니다 그러면 지워진 소녀가 새벽까지 휘파람을 흘려주었습
니다


  북국을 떠나온 비가 자주 내렸다
  몸 안에서 선들이 흥건히 흘렀다
  차갑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지만
  선이 선명하다고 말해주는 입이 있었다
  하지만 절실하지는 않았다

  놓인 곳이 면인 줄 알았는데 천 길 낭떠러지 위, 선이었습니
다 오늘 저녁은 선이 바람에 마구 펄럭이고 있습니다

고립국

  바람의 습성은 늘 어둡고 허기진 곳을 향해 몰려다니는 것이
고 그 유물이 ‘나’라고 이 밤에 쓴다


  - 병증

  죽은 자들의 찢긴 영혼이 바람이란 것을 오래전부터 스스로
습득하였다 나 이전의 나, 그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바람은 검
은 기억을 실어 나르며 날카로운 신경증을 몰고 다닌다 그런
연유로 육신에 붙은 구멍은 온통 상해 있다 안구건조증으로 버
썩대는 눈, 얼음장 박혀 쩡쩡 울리는 귀, 붉게 부푼 편도 

  이태 전, 신경이 펄펄 튀어 생니를 몇 대 뽑은 적도 있다 언어
가 되지 못한 말들이 바람 속에 유폐된 탓이리라 사춘기 이후
부터 어느 구멍에선가 피가 뚝, 뚝, 떨어졌다 그때마다 외과 의
사는 시퍼렇게 날이 선 메스로 부위를 도려내곤 했는데 세 번이
나 메스를 댄 경우는 처음이라며 의사의 손이 가늘게 떨렸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습한 바람이 들락거렸기 때문이란 것을 나는
잘 안다 

  어느 명상원에 머문 적 있다 그곳은 기억을 끄집어내 죽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 속에서 끄집어낸 기억은 어쩐 일인지 죽지
않고 허옇게 흐느적거리다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곤 하였다
중생대, 물에서도 땅에서도 살 수 있었던 파충류처럼

  바람에 적셔진 기억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상원 사람들
이 한참 후에야 일러주었다


- 위험한 가계 

  아버지의 생은 야행성이었다 아버지는 밤에 태어나 밤의 빗
장을 열었다 종갓집 종손이었던 아버지는 가계의 후면을 주로
후벼 팠는데 먼 조상들의 영혼까지 흙빛으로 질려 펄럭였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몇 해에 한 번 정도 달빛 없는 야음을 틈
타 나타났다가 머잖아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갔다 

  죽은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의 메카라고 믿으므로 사람들은
적당한 시기에 경건한 예식을 올린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습관
에 불과하므로 죽은 영혼은 언제나 살아 있는 영혼을 날카롭
게 할퀴곤 한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긴 방죽을 따라 외가로 가
곤 했는데 방죽이 좁아지는 곳에선 바람이 몰려다녔다 그럴 적
마다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내 영혼을 끄집어내 시퍼런 강물 속
에 던지고 싶었다 외가에서 돌아올 때면 어머니 눈 속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고였고 할머니는 붉은 고함을 질러댔다 어느 겨울,
할머니도 싸늘하게 식은 채 바람에 실려 북편으로 떠났는데 

  비바람이 예고도 없이 들이치곤 한다 기도는 나를 믿지 않지
만 나는 기도를 한다 그것은 바람 속으로 물상을 몰아넣는 주
술이기 때문이다 비바람 부는 날, 어린아이가 우산도 없이 거
리에서 흘러가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아이는 주술을 외는 여자
로부터 잉태되었고 그 아이 또한 서서히 바람의 한 페이지가 되
어가고 있음이리라


- 본향 

  지금까지 할머니와 아버지와 주술을 풀어내는 여자를 만났
고 그들 모두는 그믐 즈음 본향으로 떠났다 나와 그들 사이에
는 늘 바람이 경계를 흐리며 술렁거린다 애초에 생의 노래는 나
의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내가 추억하는 노래에서는 무덤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추억이나 기억은 바람만큼 혹은 무덤만
큼 두려운 존재다 나는 본향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비 오는 밤
이면 본향을 향하는 음률을 G단조에 얹어 휘파람으로 날리곤
하였다 그럴 적마다 지구 밖에서 많은 할머니와 아버지와 여자
들이 상여를 타고 하강하였고 

  어젯밤, 그들의 꿈을 꾸었다
  그들은 야윌 대로 야위어 마른 장작처럼 굳어 있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흐린 동공으로 바람을 풀어내면서 

  꿈은 바람에 실려 다니는 시퍼런 칼날이다 길한 꿈이든 흉한
꿈이든 이승의 영혼은 그 칼날을 피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승
의 물상들은 점점 수상한 바람이 되어 본향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또다시 밤이 왔다
  이 지상에서 몇 번의 습한 밤을 더 맞이할지 알 수는 없는데 
  천 년 전의 바람은 사방에서 몰려오고 
  거리를 가늠키 어려운 곳에선 목쉰 울음이 빗물에 엉켜 흐르고 

출가

  「굿판 벌인 것처럼 집은 소란했고 사무실은 혼미했다.
  친구는 돈 떼먹고 줄행랑쳤고 
  애인은 나를 버리지 못하고 매일 위험했다. 
  사는 일이 팥죽 모양 끓어 넘쳤다.」

  “길바닥에 몸을 내다 버렸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도 없이 
  인도를 향해 바닥을 저어가기로 했다. 애인과의 동행은 일찌감치
  접었다.
  사랑도 지긋지긋한 業일 테고 
  인도까지 가는 길은 숱한 人道가 인도해 줄 거로 믿었다.”

  버린 내 몸, 낮에는 무거운 태양을 밤에는 젖은 어둠을 지고
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바닥을 저어가고
있다. 인도는 느리디느린 제국, 내 몸은 느림을 오관으로 느끼
며 아주 천천히 흐른다.

  베이징, 시안, 청두, 라싸, 카트만두를 거쳐 인도까지는 수만
킬로

  지금쯤 애인들은 바람난 들고양이 모양 싱싱해져 있으리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술병이랑 애인
을 수집하고 있겠지. 아빠를 쓰레기로 취급한 딸애의 귀여운
입술이 떠오른다. 얘야, 곧 깨닫게 될 거다. 누구나 쓰레기 더
미를 뒤적이다 쓰레기가 되어 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직장에선 잠시 술렁대다 내 그림자조차 치워버렸으리라. 책
상과 집기는 물론 기획실장 명패까지도 무참히 버려졌겠지. 에
스라인 비서도 폐지처럼 버려졌을 거고 직원들은 밤마다 유쾌
발랄 파티를 벌였으리라. 구조조정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던 저
승사자였으니

  시인 나부랭이였다는 흔적도 죄다 버려졌을 거다. 개나 소나
다 시인인 세상에 나 하나 어찌 된들 뭔 상관이겠는가! 

  어머니, 지금은 허공이 비를 버리는 지대입니다. 언젠가는 허
공이 눈을 펑펑 버리는 파밀 고원에도 닿겠지요. 울화병은 아
직도 어머니를 버리지 못했나요? 막되어 먹은 놈! 천하에 불효
막심한 놈! 어머니 음성이 쇠꼬챙이처럼 몸을 찌릅니다. 하지
만 저는 눈물까지 이미 다 내다 버렸습니다. 저는 원래가 엉망
으로 생겨먹은 놈이잖아요.

  버린 몸들의 낙원, 인도는 아직도 아득히 멀다. 이렇게 굼벵
이처럼 느리다 보면 우주도 버려지고 지워지리라. 나는 오늘도
바닥을 저으며 천천히 흘러간다. 이왕 버린 몸, 재가 되어서도
절대 돌아가지 않으려

무릎의 미로

  사계절이 겨울인 어느 국경에선 
  여자의 무릎을 지칭하는 말이 많다고 했다 
  눈빛, 통증, 나무, 그늘, 얼굴, 묘비, 저녁, 안개…

  뇌압을 견뎌야 한다고? 
  이것은 관계에 대한 비망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당신에 대한 굴복이다 
  미안하고 서러워라 무릎 없는 나무, 
  얼굴 없는 비문, 

  그즈음 나는 동토에 속했다 시간 변경 선을 넘다가 발을 헛
디딘 것이다 깨어진 내 무릎처럼 그녀도 금이 간 채 풀린 눈빛
으로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그녀의 무릎을 향
해 돌멩이를 던지는 게 보였다 새들의 신음이 흩어져 날렸고 통
증이 통증을 짚었는데

  그녀는 창백한 백양목 그늘을 낳았고 바람은 근처로만 몰려
들었다 나는 그녀의 무릎 안쪽이었지만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
기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늘의 얼굴은 쓸쓸한 각도로 기울어
졌고 

  조각가는 지나간 시간을 깎다가 마침내 슬픔의 그늘을 잘라
내 묘비를 조각했다 사랑이 몰락한 저녁의 공기가 그득했지만
추모객은 없었다 비문은 내 눈동자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고
 
  당신은 늘 무릎을 껴안고 있나요?
  마음이 사는 무릎과 마음을 베어낸 무릎 사이에서 기도가
흘러다닙니다

  외계의 음률 같은 신음이 들려왔고 조각가는 언 땅에 묘비를
묻었다 문득 가깝고 먼 곳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속엔
오래전 손목을 그은 소녀의 눈물 냄새가 났고

  얼굴 없는 무릎과 무릎 없는 얼굴을 경험한 적 있나요? 
  날카롭게 베였습니다 고요를 

  조각가는 그녀에게 무릎을 빌려주고는 흐느꼈는데 무릎은
섬이었다가 백 년 전 기억이었다가 푸른 안개로 번졌다 허공엔
파절된 지문이 떠다녔고 

  새의 날개가 결빙될 무렵, 

  드디어 내가 울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이명이 몸속을 돌며 끝
없이 파문을 일으켰다 무릎을 꼭 껴안았지만 깨어진 금들은 사
방을 향해 질주했고 

알레그로 55b번

  다 단조 91. 01. 어느 날
  눈 펑펑 내리는 흐린 허공에 짓눌려 나는 죽었

  다 단조 02. 00. 어느 날
  차가운 스모그 알갱이에 뒤엉켜 나는 또 죽었

  다 단조 16. 55.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새벽 공터, 음률의 삼각 날을 맞고 흰 피를 뿌리
며 나는 다시 죽어야만 했고 
  독하게 끊었던 담배를 독하게 다시 피웠
  다 아- 쿵쿵쿵 함몰하는구나 나는, 그랬
  다 난 세 번이나 죽었으므로 유령이
  다 아- 이히히히 

  당신은 유령이 웃는 걸 본 적 있는가? 웃음을 생선회 썰듯 썰
면 지난 시간이 보일 거다 이히히히 그래에, 펄럭대는구나 하양
이다 검정이다 음통이 
  다 아- 내 웃음은 고음처럼 히득거리고 히히 헉헉 히히 헉헉
거리

  다 아- 나는 퇴고도 되지 못한 
  채 모든 음표를 죄다 잃었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사막 바깥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이듯
  기억과 또 어떤 기억과 회상하기 싫은 기억과 온몸으로 떨쳐
내려는 기억의 바깥이 나의 
  내부이다 
  나는 밀려오는 기억을 태우고 또 태워버리지만 나는 이히히히
유령이기에 기억에 매몰되어 기억에 감금되어 기억을 횡단해야 
  하고
  모든 통각이 우수수 피는 곳에 던져져야
  하고
  내 
  발바닥
  은
  더 이상 그림자를 키우지 않아야 한다 
  이히히히
  흐느적거리는 내 몸은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생도 뭐도 더는 나에게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고

논술

  해운대 오피스텔 A와 톈진 오피스텔 B가 지구 표피에 꽂혀
있고 A엔 분실되고 싶은 a가 B엔 분실된 b가 거주하며 허공은
[가]에서 [다]까지 진술하고 있다. 단, 두 오피스텔 밀도는 상이
하며 심장엔 인터넷만 연결되어 깜박이고 a와 b의 구간엔 무수
한 구름과 파도가 시간 변경선에 엉켜 서로의 표정을 관찰한다.

  [가] b의 고독이 해저 인터넷 광케이블 안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해운대를 향해 질주하는데 a의 어둠은 머나먼 타밀나
두까지 흘러간다. 갈매기 몇 마리 난민의 길을 떠나는 중이며
갯바위는 흉통을 앓는 듯 퍼렇고

  [나] 톈진의 나풀대는 미디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언뜻언
뜻 비치는 속살 눈부시고 부둣가 네온사인의 낯빛 창백하다.
고적한 a의 눈동자, 엉망으로 취해가는 밤, 해운대 해변 미니스
커트들 안쪽은 황홀하고 모호하며 바다는 냉증에 시린데 센텀
시티 빌딩들, 여전히 키가 자라고 백사장 모래는 낮보다 뜨겁
고 환하다. 꾸겨진 달맞이 길에선 승용차 한 대가 실패한 사랑
처럼 전복되고

  [다] 잘못 자란 마린시티 마천루가 바다에 몸을 풍덩 빠트리
자 수십 개의 달이 출렁이며 제 얼굴을 우려내고 가을은 예고
없이 도착했다. 해변 도로는 더욱 숨 가쁘고 긴 흑발이 모니터
속 청사포에 닿을 즈음 톈진의 흐린 플라타너스, 어깨를 들썩
이고 b의 가슴은 섬이 되고


  1. 제시문 [가]의 내용을 근거로 제시문 [나]와 [다]의 테크놀
러지를 비판적으로 논하시오.

  2. 제시문 [나]와 [다]의 의미를 확장하고 a, b의 접속 여부에
대해 논하시오.

의자— 낙원에 놓였다 믿었는데 벼랑 끝이었음을

  나는 다리가 네 개인 순한 짐승입니다
  고흐나 고갱의 그림에도 등장하죠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보이지 않나요?
  여하튼 누구든 내 몸 위에선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불 꺼진 옥탑방 계단 아래 
  삐걱삐걱 신음을 흘리며 엎어져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몸속을 헤집고 들어옵니다

  나도 한때는 푸른빛이었고 
  또 한때는 단풍 숲 아름다운 구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세계는
  참으로 혼미했습니다 
  나는 기다림을 아는 그리고
  기다림 뒤 
  내 몸에 오른 이가 내 형태로 접혀 그저 편안하다면 좋을 
  한 마리 착한 짐승이고 싶었는데

  술만 처먹으면 개가 되냐, 고 울부짖던 그 저녁, 내 다리는
허공에 떠올라 계단 아래로 미친 듯 치달렸습니다 내가 사내가
되고 사내가 내가 되던 그 짐승의 시간, 여자의 두 눈이 부르르
떨리며 다시 사내와 나를 째려보고 개새끼, 짐승 같은 새끼, 붉
은 고함을 질러댔고 사람들은 무슨 불구경 난 것처럼 몰려들었
습니다 아, 아이도 겁에 질려 울었고

  그렇게 불구가 되어 
  불구의 짐승으로 엎어져 삐걱삐걱 흐느끼는 데 
  몸 위로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실낙원

  그대 어깨 위에 무거운 밤이 아직도 얹혀 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영혼을 버려두고 돌아오는 날이 많아
진다 소금밥을 삼키거나 굶는 구간도 넓어지고 

  어제의 내가 어두운 거리에서 아직도 비틀거린다 밤엔 과녁
들이 많지만 늘 내가 관통당한다 데리고 오지 못한 내가 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익명이 처량하여 그대 서 있던 낯선 전철역을 향해 두어 번 울
었고 그대가 앉았던 의자를 생각하며 코피를 흘렸다 그즈음
죽으러 가는 새들의 행렬이 심장 쪽으로 무수히 추락했고 어느
조각가가 내 후면을 판각했다 그대 얼굴은 왼쪽만 울었고 길
도 왼쪽만 캄캄했다 

  오늘은 태양이 떠오르지만 심장에선 새들이 퍼덕거려요
  당신 괜찮아요 괜찮아요 당신

  나는 이미 익명인데도 얼굴을 다시 익명 속으로 꾸겨 넣는다
가면은 시원에서부터 존재했고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다 7
일은 신이 창조했지만 7일 이후는 형체가 없으므로 외경이다 

  익명과 숫자의 상관계수를 모르는 신의 동공에 해무가 그득
하다

  내 속에 추락한 새들이 예쁜 표정으로 묻는다 
  함께 떠나지 않을래? 

  어둠과 익명이 엉켜 노래한다

  목이 연약한 식물을 살해한 누군가는 식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대는 밤을 너무 오래 만지작거렸다 

  어둠 속에 버려둔 어제의 영혼이 그대 반대편에서 펄럭인다

지붕 위에서

  어머니가 유치를 지붕 위로 던지고부터 낯선 보병이 내 손을
지붕으로 이끌었다 유년을 잃었고 이 층이었고 삼 층이었고 고
원이었다 누구도 나를 향해 총질하지 않았고 누구도 수류탄을
터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이었다 나는 포병도 공병도 아닌
지붕을 기는 전사였다 사춘기가 지붕을 타고 왔듯 겨울도 지
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로 접한 지붕은 북국 설산처럼 가
파르고 아찔했다 두려웠지만 황홀하였다 그러나 전장에 속했
으므로 찢어진 깃발처럼 너덜거렸다 폭설이 군단 병력으로 몰
려왔고 자주 눈사태를 만났다 누구도 나를 향해 무전 치지 않
았고 누구도 특공대를 파병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추락
하였고 양철 지붕 위였고 설국의 매혹이었다 전투는 끊이지 않
았고 계절은 뒷걸음쳐 가을이었다 별을 보는 일은 몹시 희귀했
고 고독해서 좋았고 전선은 밀릴 때까지 밀렸다 모든 게 위태
로웠다 전투는 지루했고 패배해서 좋았다 젖은 바람이 불규칙
적으로 불었고 파편처럼 찬비가 뿌렸다 아침이면 먼 곳의 전초
기지로 이동해 전투를 벌였다 어김없이 저녁은 왔고 나는 양철
지붕으로 회귀해야 했고 다시 또 전투를 벌였다 누구도 나를
폭파하지 않았고 누구도 사랑을 타전하지 않았다 눈 감으면
파노라마처럼 첫 번째 지붕이 펼쳐지곤 하였다 어쩌다 생경한
지붕이 흘러오기도 했다 삐걱삐걱 위험하였는데 햇살이 스미고
있었다 종종 지붕을 옮겨 탔고 아늑했지만 나는 여전히 전장
안쪽에 속했다 누구도 총질하지 않았고 누구도 수류탄을 까
지 않았고 지붕 아래는 타인의 구간이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지붕이 기울기 시작했지만 나는 일관되게 지붕 위였다 포탄 한
발 명중되지 않았지만 어떤 구원도 없던 밤 지붕은 폭삭 내려
앉았고 전투는 끝났고 모든 게 고요했다 밤마다 지붕을 타던
고양이가 몰락한 지붕 곁에서 야옹- 야옹- 울고 있었다 

조심

  바닷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뇌내腦內를 조심해야 한다고

  조심鳥心?
  문득 뇌 속에 자리 잡은 조류의 가슴을 떠올렸다

  새의 심장으로 바라다본 하늘과 해변과 그리고 지나간 자들
의 증언은 객관적이지 못했고 
  의사는 
  그저 비선형적인 손만 해체 시켰다
  손가락 끝에서 푸른 포말이 일었고
  구름자락을 쪼아 먹는 바닷새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의사는 이 모든 게 
  중독 증세라며 중독된 표정을 흘렸다

  심장을 관찰하며 뇌를 독해하고 뇌를 관찰하며 심장을 독해
하는
  검사 기계는 참으로 진부했다 내가 바람과 친밀해진 건 
  경영분석과 노동생산성과 스쳐 간 여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계는 알아채지 못했고 의사는 기계를 제 아버지로 섬겼다 

  가면을 벗는다는 건 
  고래가 강제로 내륙으로 본적을 옮겨가는 거에 불과하므로
  가면을 벗지 못한 채 아버지는 조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
겼고
  아버지와 나는 근친이므로 새의 심장을 
  조상처럼 받들다 소심한 상태로 지워질 것인데

  나는 알코올이 없으면 밤을 재우지 못한다고 진술하면서도
  중독은 이 세기에선 보편 된 문명이라 강조했고
  의사는 새의 불화에 대해 위조된 데이터를 내밀었다
  하지만 내가 계절의 이방인이란 사실을 생각할 때면 
  심장에 빗물이 새는 걸 의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슴을 절대 열어 보이지 않겠다는 견고한 각오이고
  심장은 일관되지 않으며 
  어느 날 나무가 심장 속에 들어와 살지도 모를 환자들이
  진료실 밖에서 불안스레 서성거렸고

  바닷새가 가면을 쓰고 비행한다는 명제와 비행 중엔 누구도
제 심장을 기억할 수 없다는 진실이 머릿속에서 부풀어 올랐는
데도
  나는 그저 
  의사의 중독된 동공을 따라 머리만 끄덕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며

해당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나는 
  바람이 부니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을 뿐
  통증은 190에 120 
  오래 함구하던 상처처럼
  해변에서 태어났고 해변에서 경계를 넘고 있다
  붉은 울음이 들려온다 
  울음이 혈관을 찢는다 
  내 몸의 가시가 내 눈을 찌른다 나는
  나를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말기였고 
  모래인 줄 알았는데 바위였다 
  눈물인 줄 알았는데 폭우였고 
  정말이지 뇌출혈인 줄 알았는데 우울이었다 
  모든 게 경계 넘어 악성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여기가 무덤입니까
  다음 계절 쪽으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는데 
  오늘은 흐린 허공에서 칼날이 쏟아진다
  바다는 흐느끼고

소금호수

  두 번째 여자의 아버지는 소금 창고 곁에서 죽었다 아무런
연유도 없었다 동쪽이었고 가을 냄새 쓸쓸하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다쉬테 사막 소금호수로 향하던 중이었다 서쪽이었고 k
는 그곳에 있었다 알라와 이맘의 눈을 피할 순 없었으므로 나
는 밥 대신 코란을 복용하며 용서를 빌었다 내 발바닥은 어차
피 돌과 모래 위였기에 신도 누구도 나에게 돌멩이를 던지진 못
했다 메카를 향해 하루 네 번 감사기도를 올렸다 모래 폭풍이
문상객처럼 들이치곤 하였다 그즈음 두 번째 여자의 아버지가
내 흐린 잠으로 들어와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빛은 지하
드 전사처럼 뜨겁게 끓었다 k가 두 번째 여자의 신에게 포교 당
했음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두 번째 여자도 그녀의 신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세로 내 등을
채찍으로 쳤다 소금호수에 닿은 건 가을의 후면에서였던가 설
원처럼 눈부신 곳이었다 k는 소금 처녀가 되어 나를 맞았다 그
녀는 처녀에서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모든 게 소
금 덕분이었다 그녀는 저녁이면 제 안에서 방금 건져낸 싱싱한
소금으로 밤을 열어주었다 첫 키스의 맛이었다 나는 밤새 소금
에 흐르다 태양이 떠오를 즈음 잠들었다 내가 잠든 사이 그녀
는 좋은 햇살에 소금 가슴과 소금 허벅지와 소금 잠옷을 말렸
다 그리고 소금 아기를 낳았다 별이 뜨면 그녀는 아무 일 없었
다는 듯 또다시 밤을 열었다 모든 간이 알맞게 잘 맞았다 그러
던 어느 날 기억에 없는 검푸른 비가 내렸다 그 밤엔 어떤 간도
맞출 수 없었으므로 나는 두 번째 여자 아버지의 장례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졸음 틈새 같은 순간이었다 돌아오니 k는 페
르시아 문양의 팔찌만 남겨둔 채 녹고 없었다 소금호수엔 눈물
냄새만 그득했고

해리— 기억만 그대에게 당도하는 것은 내가 몸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

  나의 세계는 몸 안의 벽면 그 어디까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나무와 새들이 추락하고 멍이 번진다 당
신과 마주했던 순간조차 나의 지점은 퍼런 멍 안쪽이었다 설계
된 형상이 사면에 갇히듯 

  귀와 눈을 앓는다
  스스로 귀를 벤, 눈동자를 파낸, 화가들과 마비된 남자에 대
해서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들은 이 밤도 중력에 갇힌 채 회전
한다 순환한 식물이 잎을 버리는 것 또한 같은 병증이다 후생
에 나로 태어날지도 모를

  식물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제 몸 밖으로 걸어 나온 적 없는 식물과 기도를 섞어 넣고 끓
인다 방언이 부옇게 끓어오른다 낡은 시간이 나를 조금씩 옮기
지만 여전히 몸속이고 소녀는 별 스티커를 제 몸에 붙이더니 내
눈에도 붙여준다

  지워진 이들이 소녀에게 다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데 왜 소녀의 눈동자 속으로 별이 수몰되는 걸까? 중대한 오류
인 채 설계된 나, 비문으로 흔들리는 손가락, 

  오늘 밤엔 물빛 외성 쪽으로 편지를 쓴다

  몸속에 별이 뜨고 마비된 절반은 안녕하신지요 그때 제가
  식물을 삼킨 것은 세계世系의 은폐 때문이었죠 예쁜 애인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어요 당신이 보낸 소리가 유계의 음률
  로 회귀할 때 고막은 경악했고

  어느 순간 애인은 낡아 있고 당신은 겨울을 내 귀 안쪽으로
옮긴다 작은 인형이 내 동공에 얼굴을 담그고 운다 나는 몸속
에 갇혀 떠돌지만 지도가 없어 눈과 귀에 닿은 적 없다

  동공을 지나 눈이 펑펑 내리는 귀 쪽으로 언제 즈음 여행을
떠나게 될지,
  그런데 어디에 저장돼 있을까? 펼쳐보지도 못한 지도

파라핀

  검은 지대를 떠나왔다 나는 여전히 딱딱하며 차갑고 뜨겁다
그리고 창백하다 오늘은 더욱 창백하게 흐른다 바닥에서 허공
으로 

  독감을 앓는다 모든 계절은 어지럽고 고체는 액체로 액체는
고체로
  기도를 하는 밤이다

  얼음처럼 빠지직 녹으며 타들어 가고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가며 연소된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다 타오르기
위해

  슬픔을 흘린다
  통점이 번진다

  녹아내리기 위해 녹아 불붙기 위해

  돌로 얼음을 두드려 기억을 부른다
  돌로 심장을 두드려 비가를 부른다 

  그러다 결국 딱딱해진다 
  점점 조그맣게 딱딱해지며 희미해질 거다

  딱딱하고 차갑고 창백한 것들이 좁은 혈관을 타고 상승한다
눈물이 끓는다 끓는 눈물 속에서 타오르는 하얀 침묵, 

  굳어간다

  불속으로 몇 줌 던져본다 
  포기하는 눈들이 보인다

  영혼이 뱀 혓바닥처럼 뾰족한 것은 어둠을 파먹기 위해서다 
  다들 어둠의 입자가 하얗게 될 때까지 녹아내린다 다시 굳어
질 줄 알면서도 

  연소된다 뼈와 치아와 무릎과 손가락이 물러지며

길 위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몸속에 묻힌 지도를 발굴하는 행위임을
알기에 그 밤에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하늘은 수억만 마리 검은 구름을 방목하였고 길 위에는 빗물
이 넘쳐흘렀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방파제 끝
에 걸린 날카로운 겨울을 만지다 영혼이 베였습니다 술은 빗물
에도 해독되지 않았습니다 성분이 같은 종족이라도 언어가 통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지도는 얼었다 녹았다 부서졌습니다 기억 경계
를 떠돌던 편린이 먼 나라까지 날려가 식물 그림자가 되었습니
다 천 년 전부터 울던 바람이 그림자는 영원히 직립하지 못할
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지도 밖에 사는 식물이 동면하지 못하
는 것에 대해 독학해 왔기에 

  나는 전복되었습니다 추락하는 순간 거대한 선인장이 몸속
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이성은 가면이므로 선인장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성명을 지웠습니다 선인장 가시가 무성하게 자라
났습니다

어떤 각성의 방식

  비밀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그대 안으로 들어가
고 싶었다

  그대 안에 들어가 새들의 저음을 들으며 
  불능인 나를 죽이고 싶었다 육신이 번뇌 위에 펼쳐진 걸 알았
을 때 지은 죄처럼 폭설이 내렸다 그즈음 

  어느 구간에 이르러서 욕망을 초월한 
  상처를 핥았으면 했다 흰빛 음계에서 
  교성은 마말리뿌람의 음률을 닮았을 것이고 흐느낌에도 닿
을 것이었다 
  비의 무성한 곳에서 그렇게 그대를 들키고 싶었다 나도 들키
고 싶었다

  자궁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으므로 어둠 안을 무겁게 떠다녔
다 해탈은 언덕 아래 묻힌 우주란宇宙卵을 데우는 거라 여겼다
퇴원하지 못하는 밤이면 가루다의 날개를 염원했고 죽어서 떠
난 악보를 애도했다
그대 안에 있었지만 그대 밖을 서성이던 
어제는 귀신처럼 펄럭이며 울었다 


  낡은 몸이 바람에 닿으면 서랍처럼 덜컹대고 
  창턱에 걸린 그림자가 푸른 음률이 
  거죽 밖에서도 안에서도 흐른다고 속삭인다 

  그대 대신 그대의 무릎을 껴안을 적마다 
  식물 흐느끼는 소리가 난다 
  그 순간에도 입술은 늙어가고 

  입맞춤을 거룩한 합장으로 믿지만 
  사도邪道라 명명한 교리에 눈동자에 얼룩이 낀다

  어둠 내리면
  내관이 투명한 손가락들이 점점 붉어지고
  손톱 아래에서는 붓다가 사리처럼 떠오른다

기도

  나는 오늘도 유랑 중이고
  끝없이 당신과 조우했습니다

  그때마다 살포시 껴안았습니다 당신의 무릎을
  그리고 그 무릎 속에 살고 있는 겨을을

  이 계절,
  무릎이 접히는 것은 결빙을 깊게 앓았기 때문입니다
  낙엽 수없이 포개지면 내 무릎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나는 유랑 중에 혈액형을 잃어버렸지만
  당신의 혈액형이 겨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술보다 독한 
  저녁의 겨울,

  당신 무릎을 껴안았던 내 손은 지금 불면입니다
  당신 혈액형이 스며든 손은 
  참으로 허약하고 쉽게 글썽입니다

  이러한 무릎과 손을 쓸쓸한 골목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골목은 우울증 앓는 그림자보다 저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손의 대사臺詞에 대해 기도한 적 없습니다
  당신의 대사를 더욱 염원하기에

  그러니 염려 없기를 
  내 손은 당신의 무릎 속에 사는 겨울만이 아니라 무릎에 얹
힌 낙엽까지 존중합니다 

  손이 언제까지 십자가에서 분리되지 않기를 염원해 주십시오

전포대 일기— 구둘 84112417 동계

  Heat ALFA 000.

  아름다운 이병을 쓰려다 내가 누군지 잊은 채 걸레 같은 아
기가 됩니다. 먼저 발 담근 자가 광자狂者이므로 연령은 통제
되고 몸은 수긍합니다. 가슴에 장약이 장전되고 폐쇄된 성대聲
帶, 뚜껑이 열리면 군가를 토해냅니다. 음률의 사거리는 155밀
리 포와 동일합니다.

  나는 겨울을 경험한 적 없는데 눈송이 속에서 미시적으로 투
시됩니다. 관측병은 동공이 무수히 많고 정말이지 눈발은 야구
공 크기로 우우 몰려듭니다. 

  각이 없어 죄송합니다.

  내게 작대기 한 개만 더 주십시오. 그럼 휜 남근을 방열하겠
습니다. 


  Heat BRAVO 001.

  추우웅성! 근무 중 이상 무!

  초침; 시침보다 더 느리게 흐릅니다. 모나리자가 안경을 착
용하고 머리칼을 박박 밀면 야간 동계에 적응되겠습니까? 내
무반에선 등단한 적 없는 말년 몇몇이 목 없는 기린과 코 없는
코끼리를 조각하고 있습니다. 어둠을 덮어쓴 올빼미 한 마리
화성이 궤도를 돌듯 연병장을 돕니다.


Heat CHARLIE 002.

  병정놀이가 평등하다는 것은 진지 밖의 일입니다. 나는 크리
스마스이브부터 동화입니다. 그러니까 까라면 까는 호두까기
인형입니다. 비상벨과 비사격非射擊; 크리스마스를 축하했고
오 분 대기조 박 일병은 오 분 후부터 개처럼 얻어터졌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성분이 실업계라 사각과 편각이 의지
와 상관없이 맘대로 엉킵니다. 


  Heat DELTA 003.

  빨간 피로 목도리를 짜는 꿈을 꿉니다. 밤마다 벙어리 소녀
의 눈빛을 그리워하다 혀도 굳어집니다. 하나, 둘, 삼, 넷, 오,
어버버버… 공, 아홉, 칠, 팔, 여섯, 오, 어버버버…

  어제는 45kg의 포탄을 둘러메고 오리가 되어 포반을 열 바
퀴 돌았습니다. 오늘 낮엔 포신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마다 고
드름이 열렸습니다. 어떻습니까? 내 모습이 참 황홀하지 않습
니까?


  Heat ECHO 004.

  여기가 어딘지 계산이 불능입니다. 전초병은 눈꽃처럼 매혹
적입니다. 눈 덮인 산꼭대기 고독한 깃발로 펄럭입니다. 그리
하여 지금은 결빙된 강가입니다. 계속 졸리는데 코피 냄새가 납
니다. 본대는 500미터, 하지만 먼 이국이고 나는 뺨으로만 암
호를 해독합니다. 

  고막이 천공된 귀가 난해한 문장을 흘립니다. 처녀막보다 더
얇은 고막이 공중에서 떠다닙니다.

  배고파 죄송합니다. 건빵을 숨기다 불붙은 장약처럼 뺨이 뜨
거워졌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몰래 닭발을 뜯었습니다. 


  Heat FOXTROT 005. 

  밤마다 작키를 뜹니다. 코끼리보다 더 우람한 포를 허공에
띄우는 퍼포먼스; 양손의 악력은 20kg입니다. 포가 히죽히죽
웃으며 떠오릅니다. 코가 백금처럼 번득입니다. 손은 병정을
대견해하는데 포신이 히죽거리며 가랑이를 벌립니다. 사각射角
이 사각死角지대를 가리킵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왔습니다. 어머니 나는 가혹하지 않습니다.
초코파이를 61kg이나 먹은 것 같습니다. 대대에선 그것을 일
지에 적어 캐비닛에 봉했다 합니다.


  Heat GOLF 006. 

  안녕하십니까. 나는 고문관입니다. 퍽 퍽 퍽 윽 윽 윽


  Heat HOTEL 007. 

  둘 포! 둘 포! 삼, 넷, 둘, 하나, 여섯… 삼, 넷, 둘, 하나, 여
섯… 가신架身의 거대한 발톱이 새처럼 푸드덕 납니다. 백색 장
약과 녹색 장약 틈새서 방황할 때 바람이 귀와 코를 물어뜯습
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색맹입니다. 

  눈동자가 남방南方일 때 물안개가 피어났습니다. 타자他者
의 철모; 총알 속도로 뒤통수를 가격합니다. 밀봉된 별들이 눈
앞까지 당도했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식물로 퇴화합니다. 내가 알던 소녀는 부재이고 편지는 계절
변경선을 넘지 못합니다. 


  Heat INDA 008.

  식물이 돼지와 분량이 같다는 거에 대해 간호장교는 신비해
합니다. 215 야전병원; 안전 혹은 불안입니다. 하얀 가운을 볼
때마다 허기가 지는 건 조건반사입니까? 구둘의 동공들 데굴
데굴 구르고 

  나는 식물에서 장난감을 거쳐 병정까지 진화를 모색합니다.
봄은 오지 않았는데 마사토 작업을 하던 병사가 매몰됐습니
다. 누군가가 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이 상병은 애인에게 무전을 친 후, 장미와 프리지어와 성기에
대해 인형에게 전도합니다.


  Heat JULIET 009.

  음어와 음어 사이를 떠다니며 절뚝입니다. 다리가 영혼을 질
질 끕니다. 총번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군번이 정렬되지 않습니
다. 수포처럼 균형을 맞춰 쓰러집니다. 포대경 반대편에서 포
대경 안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여자가 군가를 편곡합니다. 

  아버지를 환경과 과장이라 했는데 분뇨수거반 반장이란 게
들통났습니다. 작대기가 똥색으로 보입니다. 아, 아버지 용서
를 버려주십시오. 당신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떠올리면 잡식성
이 됩니다.


  Heat KILO 000.

  선임하사님, 심장이 관측되지 않습니다. 측지반 윤 상병은
어쩌다 작대기가 지워지고 측량을 멈춘 것입니까? 알파에서 챠
리의 구간까지 민낯 위에 거짓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암구호; ‘나야, 나’입니다. 

  OP에선 여전히 한파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령의 문장은 뚝
뚝 부러집니다. 그러니까 군단TOT 때 허리가 부러진 병사의
제원은 계산될 수 없는 함수입니까? 나는 작키 봉으로 두 대 적
게 맞았습니다. 대신 팔꿈치 포경이 산산이 부스러졌습니다.
근데 포 반장님, 둘 포는 견인포인데 나는 언제쯤 견인되는 것
입니까?

6079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승강장엔 내 몸보다 늘 바람이 먼저 도착한다
  내가 바람을 밀고 다니는 까닭이다
  내 몸속을 분주히 들고나는 사람들 
  표정이 창백하다 
  문명이 지하에 길을 내고 쇼핑센터를 건립한 뒤부터
  매일 이마에 목적지를 붙이고는 
  두더지처럼 땅속을 위태롭게 헤맨다
  

  빗물 냄새 땅속까지 번지던 날이었다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사자死者의 음성인 듯 흘러왔는데
  치매 앓는 노인 손을 꽉 붙잡은 채
  안전선을 넘는 여자가 보였다 
  눈동자 속엔 마른 안개꽃 자욱했다
  노인은 우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었고 
  순간 나는 끼이익- 미친 듯 울부짖으며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비명들, 넋 잃은 눈빛 속에서 
  나는 부르르 떨기만 하였다 그날 
  사람들은 사지가 풀린 내 몸을 이동시켜 
  물감 모양 끈적이는 잔해를 씻기고는 
  운항을 쉬게 하였다
  

  눈앞이 차츰 환해진다
  오늘도 수없이 캄캄한 구간을 지나온 
  지친 몸,
  마지막 승강장에 막 들어서려 하고 있다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아, 그런데 기둥 뒤 얼비치는 
  그림자, 
  모자를 얼굴 아래까지 푹 내리고는 나를 향해 
  제 그림자를 던지는,

  나는 광인처럼 몸서리치다 
  뜨거운 김을 품어내며 운다

후면도

  웅크린 채 죽어가던 아난타, 
  등을 관념의 덩어리라 고백했지만

  그것은 안으로 멍이 깊어 묵시록 코드처럼 쉽게 독해되지 않
을 뿐 이 밤도 숱한 문양의 등이 저마다의 내력을 저장하며 흘
러간다 

  병든 야크가 제 몸집보다 더 큰 짐을 등짝에 지고 천 길 낭떠
러지 위를 걷고 있다 저녁이 살의 수액을 파먹으며 검게 내리고

  쓸쓸한 등짝은 유적처럼 쉽게 갈라진다 틈새에선 눈물처럼
흐린 기억이 흘러나오는데 

  등을 토닥이는 거나 후려치는 건 등에 대한 숭배,

  새를 끌어안고 잠든 아이가 어미 등에서 흘러나온다 새는 힘
겹게 숨을 고르다 등의 맥박에 얹혀 아이와 함께 허공으로 날
아오른다 어미의 등도 공중으로 부양되고

  이 밤도 라싸의 어느 골목에선 세상에서 제외된 등을 위해 한
무리 붓다들이 예배하고 있는데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의 등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등
을 통해 해탈을 건지려 했지만 검은 새, 발톱이 자주 할퀴었고
먹구름이 지날 적마다 운구 행렬 속 라마승처럼 등이 점점 휘어
졌다

  아직도 나의 등은 구원되지 않았는데 몇 마리 등들이 나의 등
에 포개져 울고 있다

디지털 속의 가시假視

  손가락 끝이 뜨거워지도록 클릭한다
  마우스 주위로 형성되는 기류,
  화면이 달아오르고 달도 둥글게 달아오르고

  즐겨찾기 폴더 사이트에 거주하는 여자, 
  생경한 풍경 속을 떠다닌다

  언제였던가 여자의 구조를 해체하려다 내 영혼만 해체되었
던 게
  그 후 복구 파일이 파손된 채 
  나는 경계 밖으로 딸각딸각 전송되고 있다

  클릭하면 안방처럼 쉽게 열리는 문, 
  늘 고정된 계절, 
  댓글에는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다 
  최 근 4 주 간 게 시 물 이 없 습 니 다
  달과 창틀 사이에서 가루 소금 같은 눈이 내리고 

  잿빛 문장 위로 젊은 내가 액세스 된다
  한때는 그녀 눈동자가 나의 ID, 
  로그인하여 입술을 복제하다 마침내 은밀한 곳까지 복제했
다고 그녀 아버지에게 고백했는데 생각이 깨진 디스크처럼 깜
박거렸다 

  잉태된 파일을 악성코드처럼 삭제해 버린, 
  흙먼지 뿌옇게 날리던 겨울 내부,

  그날 일기엔 여전히 패스워드가 판각되어 있는데

  시간이 광속으로 흘러도 불편한 잠, 
  어떤 날은 진눈깨비 내리는 절벽 위를 걷다가 또 어떤 날은
두 번째 여자가 사체처럼 무표정하다 삭제되고 문득 부팅된 두
번째 여자가 그 여자로 떠 있고

  여전히 깜박이기만 하는 복구 파일, 
  휴지통엔 흰 그림자만 포개져 있는데

단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자커우는 그녀의 몸속에 있었다 발목
이 예쁘다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 온다는 증거였다 내가 삼킨
것은 술이 아니라 그녀의 지도였던 것, 가을 건너편에만 산다
는 음악이 지도 구석 쪽에서 출렁거렸다 지도를 안다는 것과
경험한다는 것에 대한 자막이 느리게 지나갔다 국경 도시, 길
을 잃기도 저장하기도 하면서 눈물처럼 뚝 뚝 낙엽이 졌다 유
목 앓는 심장들이 밤으로 된 계단 중간에서 비틀댔다 차가운
별빛에서 단풍잎 향기를 느끼는 건 오랫동안 길 밖을 서성였기
때문, 고향은 바다 너머였고 비가 내렸으므로 다섯 번 잠에서
깨어났고 네 번 꿈을 꿨다 장자커우 쪽으로 몽골 바람이 궤도
를 맞췄지만 눈동자는 자주 궤도를 이탈했다 당신의 망막이 무
생명체라는 걸 잘 알아요 벌판 쪽에 있는 우리는 늘 위태하죠
의도하지 않았는데 망막엔 물안개가 맺혔다 새벽이 오자 나의
이십오 세는 지워졌고 그녀 시계는 힘없이 가고 있었다 우리의
순서는 본성에만 의존했다 가을과 늦은 가을 그 사이에서 

평화

  호수엔 크리스마스트리가 떠 있었고 아기 예수는 아직 당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에는 취한 어른들과 유전자 풀을 잘못 건
너온 악마들과 비겁한 목자가 각각의 표정과 언어로 이스마엘
의 아이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다. 그즈음 어린 아우구스는
캐럴에 얹혀 고요했는데 갑자기 악마의 후예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하나, 둘, 셋… 나는 목자이면서 목격자였기에 아우구
스는 내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내 손은 구원 대신 목덜미를
낚아챘고 내 발은 카페 밖에서 발길질해댔다. 어둠 속 어디선
가 강물 냄새가 났다. 마리아의 딸이 뛰쳐나와 울었고 관망자
들도 참담한 폐허를 둘러쌌다. 밤하늘엔 물빛 은하가 흘렀고
먼 국경에선 어린 천사가 히브리군 총탄에 쓰러지고 있었다. 왜
비굴하게 맞기만 했냐고 물으니 고통이 나았다고 하였다.

기명汽鳴

  독재자는 죽었고 우린 서서히 죽어갔다 그해엔 존 래넌과 무
명의 음악가 몇몇도 본향으로 떠났다

  낡은 레코드판이 돌아가면 심장의 고동이 만져지고 어두운
몸통 어디쯤에선가 차가운 음률로 강이 흐른다 병든 새를 돌
에 묶어 물속으로 던진다 파문이 번지면서 먼 옛적 수장되었던
종소리가 수면 밖으로 날아오르고 그즈음 기차가 철둑을 통
과한다 기적 소리에 귀를 적시면 시간의 대륙 저편에 있는 도시
가 보인다 기억은 조금씩 해독되고

  간혹 레일 위에 제 그림자를 눕히는 짐승이 있었지만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운명을 앞둔 눈빛은 적막했다 땡 땡 땡 땡 어지
러운 차단기 종소리, 객차가 지날 때면 아이들은 쑥떡을 먹이
고는 헤죽헤죽 웃음을 날렸는데 

✽

  원통 기차는 검은 분진을 피어 올리며 느리게 이동했고 기찻
길 옆 슬레이트 지붕엔 새들이 흐린 음표를 쪼았다 낱장처럼 펄
럭이던 예감들, 레일 위에 얹어둔 쇠붙이는 기적소리와 함께 모
호한 기호로 변형되었고

  서로의 허기를 나누어 가지던 아이들, 
  점점 자라 가족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철길 너머 삼류대학 주변으론 전투경찰이 조금씩 늘어났고
건달들은 여자의 옆면으로 휘파람을 띄웠는데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건 불온서적 같은 것이어서 모두가 펼치길 꺼려했다 

  침목을 밟으며 계절이 몇 번이나 다녀가도 떠나간 새들은 회
귀하지 않았고 기찻길 언덕에서 습관처럼 돌단을 쌓았지만 돌
틈에도 바람이 스몄는지 쉬이 무너졌는데

  위태한 풍경 속 최루탄 뭉개 뭉개 피어났고 풀꽃들도 이승을
마감하고 있었다

포토그래프

  액자에 갇힌 궤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환하게 웃으며

  고독; 
  손가락을 데워주면 내 안의 광대를 꺼내 주려했다는 누군가
의 문장에서 강물 냄새가 난다 밖에는 겨울 같은 가을이 백색
왜성 쪽으로 흘러간다 나는 여전히 사각의 내부에 속하고 띄워
보낸 음률은 나를 찾아 유랑 중이다 배경은 충분히 미학적인
가 더러는 제 영혼을 분실한 이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분향; 
  몇 번을 헹구어 말려도 그림자의 얼룩은 가시지 않는다 외연
의 여자가 연기를 향해 거친 대사를 한다 그만 좀 작작 피워대
난무하는 쌍시옷들 연기는 나를 향한 분향이므로 사각 틀을
주먹으로 꽝꽝 내려친다 완전한 망각이 실현될 때까지 완전한
일관성을 각오하며 

  분리; 
  몸이 잠든 어둠마다 나의 분인分人이 소리 없이 깨어난다 깨
어나 경영을 관리하거나 재입대하여 장약을 장전한다 어두운
골목 끝에서 근친이 이젠 그만하라며 운다 무거운 그림자 몇 장
눈동자 안쪽에 쌓인다 그리운 이들의 모습은 죄다 후면이다 

  조문; 
  어디로부터 연락이 온다는 것은 조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헌
화하지 않는다 누구도 헌주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밤새 술
을 올리며 천천히 허물어진다 그 사이 지나간 겨울이 회귀하고
몸 깊은 심해에 눈이 내린다

차창 밖을 보며

  오한은 자욱한 안개를 밀치고 나와 으슬으슬 몸을 조여 온다 
  잔 나뭇가지에 걸쳐진 흐릿한 회색 물기, 매단 채 봄으로 가
는 막차에 올랐는데 차창엔 서리꽃 피어 함께 달린다 

  겨울 페이지가 펼쳐진다 

  차창에 하얀 서리 깔리던 산동네 찍혀서 덜컹거린다
  겨울 모서리, 삐걱거리는 바람, 허기를 앓는 눈동자들, 
  푸석이는 몸, 진눈깨비 속으로 조각조각 흩어져 날린다 생각
은 동상 걸린 나무처럼 파랗게 변하고

  차가운 풍경이 달려온다

  봄은 아직 저 너머에 있는지 뻐끔한 눈 속에선 부서진 겨울만
흔들거린다 바람의 한숨, 뿌옇게 흩날리는 벌판 한복판엔 꽃나무 
하나가 있고 근처에는 꽃나무 하나도 없고

갈퀴나무

  멀리 왔다. 잎들이 싱싱하게 펄럭이고 푸른 하늘, 새들이 푸
드덕 난다. 너무 멀리 왔다. 아버지와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보이지 않는다. 아득한 오래전 일이다. 흰 그늘 건너 아버지는
떠났다. 흩어지는 물결 속 나는 물풀처럼 여렸지만 독하게도
입이 없었다. 참으로 멀리 왔다. 아, 어머니도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성에꽃 뿌옇게 피어날 때부터이다. 자는 잠에 가면 좋을
텐데… 이미 반쯤 지워진 풍경들, 희미한 신음을 흘린다. 말기
다발성 골수 종양, 백혈구와 혈소판이 검은 방을 끌며 아버지
머물고 있을 먼 허공 쪽으로 흘러간다. 나는 갈퀴나무처럼 흔
들린다. 돌이켜보니 아버지 때도 그랬다. 나는 물풀 아닌 갈퀴
나무였다.

경영분석

  기획실 창가로 잿빛 숫자들 어지럽게 부딪힌다 
  매출액 손익분기점 부가가치생산성…
  그 틈새로 어색하게 흩날리는 눈발들의 조합 어금니도 없는
허전한 입속 눈처럼 하얘지고 싶어 양치를 한다
  입술 주위로 눈꽃이 피더니 조금씩 흘러내린다 

  삶인 듯 모질게 앓던 치아 신경을 팠는데도 줄기는 퍼렇게 날
세워 온몸을 베고 다녔다 불안스레 흔들리던 하얀 가운 가지
런한 수술 도구 옆에 나도 줄을 맞춰 누웠다 드릴은 잇몸뼈를
가학적으로 뚫더니 뿌리를 생체로부터 단절시켰다 얼음꽃 바
스러지듯 흔적을 지우면 모든 게 끝일 줄 알았는데 신경은 다
시금 펄펄 살아났고 

  모서리부터 무너져 내렸다 치아와 멘탈은 이상 없음 신경계
는 혼란? 소설 같은 병명 곁에서 봄 여름 가을이 쓰러졌다 잇몸
을 뚫던 드릴 뼈 타던 홧火내 몸서리치며 계절 속을 떠돌았고 

  사박사박 쌓이는 저 눈도 드릴로 뚫으면 홧내가 날지도 모
를 일이다 조각난 눈들은 아우성치며 날릴 테고 

  뿌리까지 절단한 구조조정 그 후에도 생존은 허기지고 경영
분석 숫자들 투명한 얼음송곳 되어 몸속 깊이 박힌다 눈발 속
뿌연 물상들 기획실 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

결산

1. 미처분 이익잉여금  9,923,590,115
  1) 전기이월잉여금   329,503,834
  2) 당 기 순 이 익  9,594,086,281

2. 임의적립금 이입액   500,000,000

3. 합         계 10,423,590,115

4. 이익잉여금 처분액 10,101,000,000
  (주석13)     
  1) 이 익 준 비 금   191,000,000
  2) 임 의 적 립 금  8,000,000,000
  3) 배    당    금  1,910,000,000

  가. 현 금  배  당
  (주당배당금(율)) : 10,000원(100%), 1,910,000,000

처분예정일 20××년 3월 29일, 처분확정일 20××년 3월 26일 
  주석13)
  가. 꾸겨진 채 첨부된 시인은 재무제표의 일부입니다. 본 재무제
표의 작성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으며 바람잡이의 검증도 경영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결산당할 것입니다. 폭풍과 함께 (첨부는 별
도 공시 요청 바람)

  나. 숫자 속에 감금된 자들이 보일 것입니다. 밥과 정의 사이에서
날마다 방황하는 자들과 노랑머리보다 더 노란 검은 머리 족속도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을 흐릿하게 뜬 채 삐딱하게 흘려보면

회색 비

  비가 내린다 엎질러진 기억처럼 

  그날도 내 손은 나를 배반하고는 분주하게 손익분기점, 부
가가치 생산성을 계산하면서 얽힌 구조를 매끈하게 조정하였
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직무에 충실한 것과 밥에 충실한 것과
의 상관계수를 더듬었는데 내 그림자는 직무와 밥 사이에서 비
겁한 문양으로 구겨져 있었다 문을 나서기 전, 흔적을 유기하
기 위하여 습관처럼 손을 씻어내자 세면대 위 어색한 숫자들과
잘린 목들이 떠올랐다 세면대 마개를 뽑아내고 이내 등을 돌렸
는데 부유하던 숫자와 목숨들이 하수관 파이프를 타고 순식
간에 빨려 들어갔다 콸콸 소리를 지르며 

  그 후 숱하게 분석을 하였지만 경계선에 걸쳐진 생은 좀체 검
증되지 않았고 숫자와 목숨들도 어느 하천까지 흘러갔는지 선
잠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주 뒤척거렸다 더러는 고여 부패하
였는지 하천 변에 독한 풀들이 자라났고 또 더러는 검은 구름
으로 변이되어 면도날처럼 예리한 비를 뿌렸다 베인 꿈은 밤마
다 비틀거렸고 그 위에 다시금 비가 날카롭게 꽂혔다 날이 밝
으면 구조에서 해체된 자들 숨소리가 여전히 라인에 흘러 다녔
지만 구조 안, 남은 자들은 비어있는 것을 배경으로 조업을 지
속했다 가치의 부가를 위하여

  비는 점점 거칠어지고 사무실 창으로 목 없는 영혼들이 차갑
게 부딪힌다 웅- 웅-거리며

U와 u

  사연 많은 U가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 
  사연 잃은 u도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는 자꾸만 어두워진다
  복제된 그림자가 점점 부풀고
  U와 u가 절대 포기를 모르는 듯 전속력으로 유턴한다
  과거의 새벽에서,
  현재의 저녁에서, 
  U는 누가 뭐래도 첫사랑이고 
  오염된 비가 내린다
  u는 누가 뭐래도 버려진 시를 주우러 다니고
  오염된 눈이 내린다
  자식을 양육하는 늙은 소녀 U
  남편을 양육하는 늙은 소녀 u
  잃은 첫사랑이 시를 주우러 다니는 것?
  가장 위험한 구간의 유턴이다
  은밀한 동공이 CCTV처럼 U와 u를 감시하고
  어둠은 더욱 투명해진다
  U와 u의 배후는 실패한 속도,
  전력을 다한 정지,
  과연 회귀라는 게 있기는 했던 걸까 
  도로는 어떻게 정의됩니까
  참으로 윤리적 불화입니다
  새벽 두 시 화분이 결빙된 입술 하나를 
  그의 꿈 안으로 쨍그랑 떨어뜨릴 때
  오염된 눈과 비로 뭉쳐진 사연들,
  도로를 이탈하여 벽을 향해 질주한다
  • 이전

  • 다음

아난타

안민

댓글전체보기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차례 및 낭송시 듣기

  • 눈사람

    낭송시

    12

  • 묵찌빠

    14

  • 마지막 편지

    19

  • 침대가 있는 무대

    21

  • 증명사진

    26

  • 사라진 지대 혹은 금기

    28

  • 고립국

    32

  • 출가

    낭송시

    37

  • 무릎의 미로

    40

  • 알레그로 55b번

    43

  • 논술

    46

  • 의자

    48

  • 실낙원

    50

  • 지붕 위에서

    52

  • 조심

    56

  • 해당화

    59

  • 소금호수

    60

  • 해리

    62

  • 파라핀

    64

  • 길 위에서

    66

  • 어떤 각성의 방식

    67

  • 기도

    69

  • 전포대 일기

    71

  • 6079

    80

  • 후면도

    낭송시

    82

  • 디지털 속의 가시假視

    84

  • 단편

    86

  • 평화

    87

  • 기명汽鳴

    88

  • 포토그래프

    90

  • 차창 밖을 보며

    92

  • 갈퀴나무

    93

  • 경영분석

    94

  • 결산

    96

  • 회색 비

    98

  • U와 u

    100

책장,착갈피

시집(시)을 책장,책갈피에 추가했습니다

  • 닫기

서비스안내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