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딥니까?

박세현

그뿐

시에 뭔가 있다고
열을 올리던 시절은 좋았다
이제는 늙으셔서 그런가
시의 본색을 눈치채서 그런가
나는 시를 믿지 않게 되었다
시에 대해서 떠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시를 끼적대는 것은
시에 뭔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쓴다
그런 나를 격려하며 산다
그뿐

허무맹랑

허무맹랑한 일들이 좋다
허무하거나 맹랑한 말들 역사들 사람들
국가들 선언들이 좋아졌다
왠지는 나도 모를 일
허무맹랑에는 답이라 할만한 게 없다
그것이 좋을 뿐이다

뜻있는 삶이라는 문장처럼
뜻없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같다
허무맹랑한 삶이라면 모를까

매일 밥을 먹고
매일 잠을 쓰고
매일 자판을 두드리고
매일
매일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

뉴저지주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택시운전사가 아니라 시내버스 운전사
그는 오로지 자파(自派)다
틈틈이 시 쓰고 저녁이면 개와 산보하고
동네 펍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자신이 비운 술잔 바닥을 오래 들여다 본다
그게 그의 시다
그는 핸드폰이 없고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시집노트를 개가 물고 씹어버렸는데
(이 문장 밑으로 흘러가는 박수소리)
열 받지 않고 표정 없이 출근한다
(대단하지 않은 시)
패러슨 씨
나는 늘 당신이고 싶다

수타사

수타사에 세 번 갔다 아니
네 번 갔다 그것도 아닌가 봐
열 번 갔다고 쓰려다 그만둔다
사실은 한번 갔다 아니 두 번 갔던 모양이다
늦가을에 갔다 아니 한봄에 갔던 듯하다
범부채 피었던 것 같고
조팝의 합창도 들은 것 같다
바람 없던 대적광전 앞에서
나는 손을 모았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여래여, 어디에도 없으신 여래여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별걸 다 물으시는군)
마하반야바라밀다
내년에 수타사에 가면 몇 번째 가는 거냐

흥업 사거리

30번 버스가 오고 뒤에 30-1이 왔다
그 뒤엔 평상복 차림의 늦가을 바람도 삼삼오오
길 건너편에는 보리밥집과 한의원이 붙어 있고
노래방과 편의점이 붙어 있다
내 옆에는 대학생 차림의 젊은 여자 한 명
그 옆에는 남자 차림의 할아버지 한 명
내 손에는 시반에서 읽을 페이퍼가 들려 있다
누군가의 시를 읽고
누군가의 시평도 읽는다
오늘은 누군가의 영화를 보는 날이다
내가 시다
내가 영화다
대학생이 폰을 접으며 30번 버스에 오른다
할아버지 배역은 정거장 의자에 그냥 남는다
나도 햇살 위에 그냥 남는다

말랑말랑한 시

오늘 모처럼 흐림
공중에 새 한 마리 날아갔다
새 이름은 통 모름
몰라도 좋았다고 쓴다
11월 첫날 수요일 오전
나는 새로 조립되고
금세 새로 허물어진다
파도소리 듣고 싶어서
저장해둔 폰의 녹음 버튼을 누른다
바다가 온다
(혼자 소리 내어 낭독해 본다)
녹음된 파도 위에서 바다는 잘게 부서진다
바다는 더 더 잘게 부서진다
나는 거품 위를 걸어간다
정말 바다에 가야겠다
시동을 걸자
부르릉

당신의 시

내가 당신의 시를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가
얼마나 마음 깊이 흠모했던가
그건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안다
이제 나는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다
그것도 당신은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내가 왜 당신의 시를 경멸하는지 모른다
당신의 시가 한물 가서가 아니다
시어와 행갈이가 맨날 그 타령이어서도 아니다
너절한 문학상을 수상해서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의 시는 뻔하지만
그 점이 당신의 결점은 아니다
뻔한 시는 당신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물었다
시는 왜 쓰세요
당신도 납득 안 되는 어려운 말로
당신은 뭐라고뭐라고 떠들었다
차라리 심심해서 쓴다고 했으면
당신의 심심풀이를 쭈욱 읽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처럼 나도 잘 모르는 말 첨언한다
시인은 재능이 아니라 자존심에서 패배한다

지나왔다

양평휴게소를 지나왔다 안개를 지나왔다
늘 웃어주는 당신도 지나왔다
좀 구식으로 웃는 당신의 무의식을 지나왔다
한 개도 새롭지 않은 특집시를 지나왔다
노상 틀리는 오늘의 운세를 지나왔다
새롭게 구성된 종말론을 지나왔다
의미심장한 소설을 한 걸음에 지나왔다
남한강대교의 물결을 지나왔다
당신의 입술을 지나왔다
아버지를 지나왔다
단풍이 녹슨 대관령을 지나왔다
지도교수의 농담을 지나왔다
이웃집 남자의 과거를 지나왔다
젊은 배우의 죽음을 지나왔다
시시한 정치를 지나왔다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을 지나왔다
조잡스런 인문학을 지나왔다
얻어터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지나왔다
이젠 말해주고 싶었지만 용기 없어 그냥 지나왔다
뭐가 있는 듯이 말하는 당신들을 지나왔다
그러나(는 정말 사랑스럽다, 이 경우 특히)
나는 내가 지나가지 못한 지점을 처음부터
다시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를 수 없는 결말

 26층 공중에서 내려와 동네를 헤맨다
 삶의 맨살 속을 걸어댕기네
 이건 비유야 뭐야 비유는 사절이다
 고쳐 쓴다 난장판 속을 두리번거린다
 점집들 깃발 늘어선 골목길
 상계시장 근처 열심히 산 사람들의 자취가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다가온다
 시 쓸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운 좋으면 쓰지 않고 읽기만 해도 좋다
 골목 주차장에서 후진하던 소형차가 벽에 끼어서 빼도박도
못하고 있다 행인들 몇이 구경하고 있다 달랑 들어내고 싶어도
마음뿐이다 불암산 바위벽에 붙어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
오지도 못해 어떤 순간에 못 박히던 엉터리 암벽등반가가 떠오
른다 이 시도 여기에서 멈칫대고 있다 시작은 했는데 이를 수
없는 결말 혹은 없는 결론 앞에 도착하고 있는 중이다 시라는
헛소리도 이 근방에 있다

시 쓴 죄

생각이 있고 종이가 있고
손가락이 있어 그냥 썼다
쓰고 보니 시였던 것
시가 아니라면 그 손으로 딴짓을 했겠지
웃고 울고 찡그리며 짬짬이 살면서
바람 불고 천둥 쳐도 나는 빗방울 속에서
기꺼이 시를 살아냈다
어느 날 내가 끄적거리던 시가
폭삭 망한다고 해도
난 모르는 일이오
시 쓴 죄밖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품절로 뜨는 이승훈 시선집
비 오는 저녁에 뭣하러
저 시집을 검색했을까나
그야 심심해서 그랬겠지만
환상이라는 역이 동해안에 있다는 소문은
소싯적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바
눈 내리던 날 가보기도 했었지
개량한복 입고 야릇한 모자 얹은 이승훈 역장이
바다를 지키면서 담배를 빨던 환상 역은
망상역에서 꼭 한 정거장 떨어진 거리
정신분석학개론과 금강경 제일분 사이
누군가의 실수로 지워진 한 줄이겠지
한번 가면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그곳
어디서 출발하든 환상에 이르는 소요시간은
언제나 영원무한임을 잊지 마시고

가제목

남항진에 와서 파도소리 듣는다
안목으로 굽어지다 핸들을 꺾어 여기 왔음
올 때마다 안목만 가면 남항진 해당화들이
삐질 것 같아 급히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다
파도도 좋고 수평선도 좋고 갈매기도 새롭게 난다
나도 덩달아 날고 싶은 건 아니다
날개는 집에 두고 왔다
맨손으로 날갯짓만 하고 가리라
파도소리 파도소리
파도와 소리 사이에 생략된 사이시옷
그게 나였다오
제목을 남항진이라 붙일까 하다가
시라고 붙인다
가제목이다

저녁

앙리 마티스가 그리다 만 듯한
저녁
비빔국수를 먹고
큰숨 한번 내쉬고
그리고
당신이 버린 여백에다
다정한 친필로 시를 써야겠다
누군가 읽어주지 않아도 좋을
그런 시

속보

일곱시 쯤 일어났나?
커피를 마시고
휴대폰 뉴스를 검색한다
별일 없군
맨날 그 타령
좀 지겹군 이런 나라
정치인들만 없어도 살겠다
다 귀찮아서 커피도 생략
당현천변을 속보로 걸었다
목구멍은 쓸쓸하겠다
바람이 분다
너무 오래 산다는 생각

첫눈 후기

 무량사에서 올해 첫눈을 맞는군
 첫줄을 이렇게 잡았는데
 무량사는 가본 적이 없다
 거기가 어디지?
 상상만으로도 감개는 높다
 고즈넉한 동행까지 있으니 마음은 하늘에 닿았다
 처마에 앉은 충청도 까치를 보면서 나는 웃었다 이런 기분이
라면 순수예술 석사과정에 다시 입학하고 싶어진다 너무 순수
해서 언어도 증발한 몇 알 소금 같은 의미만 수습해서 저기 오
층석탑에 담아두련다 그렇다 나는 그렇다 오로지 그렇다
 어젯밤 잠든 사이 서울에 진눈깨비 왔다
 무량사 첫눈이 거짓말이듯이
 내가 사는 서울의 첫눈도 가설이 되었다
 사는 게 그렇다고 타자하고 글자를 고딕으로 바꾼다

면벽하는 저녁

이런 저녁
어떤 저녁?
중요한 약속 펑크 낸 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공백 속에 앉아
빈 벽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순간도 찾아온다
면벽
(스스로 벽을 면제하다)
소맥을 즐긴다는 피아니스트가 떠올라
그녀의 쇼팽 연습곡이나 들어보려고
시디를 찾았는데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다
피아노에 엎드린 연주가의 젊은 포즈를 보면서
그냥 2악장의 저녁으로 넘어간다
피아니스트를 만나면 소맥 사줄 생각으로
돈을 모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저녁이다

독거살아갈 앞날을 탓하면서 한잔 해야겠다(김종삼)

나는 이제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는다
이제 당신들과 나 사이에 개입할
언어도 없고 문법도 없다
부디 전화나 문자로
나의 밤을 더럽히지 말아달라

한 모금의 물
한 모금의 공기
줄여서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
살아가게 될 것이다
떡반죽 같은 외로움을 굴리며 살겠다

우편함에 꽂힌
주차위반 고지서 두 장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지나가던 노랫말

어느날 나는

어느 날 나는 나로서
나라는 대명사로서
멸망한 나라의 부속도서처럼 살아간다
나는 나를 대속(代贖)하며 나를 연기하며
나를 대신하며 나를 신앙하며 나를 꿈꾼다
어느 날 나는 몽골이자 북한이고 네팔이고
어느 날 나는 뉴욕이고 잘츠부르크이고 핫도그이고
어느 날 나는 열차 떠난 상계역이고 맹추이고
시든 쇠별꽃이거나 요양원에 사는 아버지이거나
나는 막대한 외로움이고 방대한 슬픔이며
초라한 기쁨이며 불행과 행복의 사잇길로 걸어간
초현실주의자이며 어느 날 나는 동네 편의점에
나를 맡겨두고 파주 문산 연천 산정호수 부근을
박자도 리듬도 없이 돌아다니며 나 없이 슬프며
나 없이 기쁘며 나 없이 펑펑 눈보라치리라
어느 날 눈보라 속에서 나는 눈사람 되어
속삭이겠지 나여 나여 혹은 나요 나요

진짜 시인

잠 안 오거나
어디선가 열 받고 나면
수면제 삼아 진정제 삼아
우리나라 시인 열 명을 꼽아보는
버릇이 내게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며
명단을 만들고 나면
꼭 한 명이 남아돈다
누굴 빼는가 고심하느라 몸이 떨린다
같은 성씨가 많아 터무니없이 제외되는
시인도 있다
어떤 날은 꼭 한 명이 부족해 애를 먹는다
그 많은 시인 중에 한 명을 찾지 못하다니
우습다
붙박이로 들어가는 시인보다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불확실한 시인을 나는 애정한다
그가 진짜 시인 같은 이유는 뭘까?

슬픔의 힘

신중현은 황동규와 갑장이고
수잔 손택은 내 어머니보다 두 살 연상
짐 자무쉬와 나는 출생년도만 같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
하루키와 조정권도 동갑인데
조정권은 먼저 가버렸다
노원역 언저리에서 한 잔
캔맥 손에 든 채로
집 앞에서 집이 너무 멀다고
중얼거리던 시인의 대사 한 줄
슬픔은 파도와 비슷하다
밀려오고 밀려가고 아픈 데 때리고
때린 줄 모르고 다시 때리고
저도 그 힘으로 깨어진다
그것이 슬픔의 힘이다
추상적으로 말해 나는 파도와 동갑이다

신파와 구파

그는 툭하면 운다
예전부터 그랬다
비 오는 날은 대놓고 울지만
맑은 날은 또 너무 맑아서 엉엉 운다
시인 누구처럼 울어버린다
문자 했더니 울 일이 생겨 바쁘단다
키우던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
며칠은 정신없이 울겠군
백지를 보고 울고
일 악장과 이 악장 사이의 침묵이 겨워 운다
등잔을 봐도 노을을 봐도 천수경을 읽어도
거울을 봐도 운다 아기를 봐도 노인을 봐도 운다
그렇게 일삼아 예전부터 울어왔다
왠지 나도 따라 해보고 싶다
그러나 그처럼 구식으로 울지 말고
신파를 섞어서 맵게 능청스럽게
울었으면 하는 게 요새 내 바람이다

쓰다가 만 시

한 번쯤 쓰다가 만 시
그대로 발표해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렇게 해보지 못한 나의 소심증
꾸다가 만 꿈처럼 시의 행도 띄어쓰기도
아무렇게나 어지러운 시를
그냥 미완성으로 두는 것이다
그것도 한 편의 완성이다
생각은 그러면서도 늘 낱말 하나 때문에
시행 때문에 제목 때문에 신경 쓴다
그런 날 오려나 모르겠다
제목만 써 놓는 거다
시인의 이름도 지우고
그래도 첫 줄은 써야 되겠지
아니면 숫제 백지로 비워?
그러면 왜 안 되는 거지
(혼자 웃고 말 일인가)

소중한 일

내게 소중한 일은
시를 쓰는 일이 아니고
시를 몸소 살아내는 일이 아니다
혼자 앉아서 비극이라는 말을
한자어로 또박또박 써보는 정도
그것이 전부다
빈 커피잔에 마음을 부어놓고
젓가락으로 천천히 휘젓는다
거품이 일어나고 바람도 인다
시는 이렇게 끄적대는 순간이지
쓴 것을 종이에 찍어내는 작업은 아니다
믿고 읽을 수 있는 시인이 없다는 건
두루 한국시의 미덕에 속한다
내게 소중한 일은
시를 읽는 일이 아니고
시를 멀리 갖다 버리는 일이고
시를 왕창 잊는 일이다 맞다
— 계간 박세현 한여름호에서

빗소리 수집가

비가 온다
오늘의 비 어제의 비 그날의 비
한꺼번에 손잡고 마음 섞으며 몸에도 뿌리고
마음에도 뿌리고 자동차도 아파트도 여자도
나쁜 남자도 더 나쁜 여자도 구식 코스모스도
재미없는 영화도 음악도 연주자의 사생활도
엉망으로 바꾸어놓는다 감사
골문 밖으로 슛을 날리는 축구선수도 선 채로
비를 맞는다 페미니스트도 그렇다
비에 젖은 생각은 다 이사 가고
이삿짐에 실리지 못한 생각만 남아서 한 방울 두 방울
한 바가지 두 바가지로 쏟아진다
저렇게 길고 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블루지하고 힙합하고 심지어 짐 자무쉬한 빗소리를
눈에 귀에 코에 목구멍에 항문에 집어넣고
어제와 비슷하게 목이 멜 것이고
어제와 똑같이 축축한 행복에 젖을 것이고

북촌 연구

가끔 북촌에 간다
딱히 뭐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안국역에 내려 터벅터벅
심해를 건너듯이 걷다가
아무 골목에나 나를 감춘다
안면 없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금방 수리한 한옥을 곁눈으로 지나간다
지나간다에 누가 밑줄 그어주면 좋겠다
나는 올해도 살 것이다
어쩌면 내년 봄에도 누구 집 처마 밑에서
비를 긋고 있을지도 모른다
커피집에 들기에는 몸이 어색해서
못 본 척 지나간다
이런 식으로 건너뛴 순간들에게
때늦은 절 세 번
마음이 시큰거린다
여기까지 쓰고 나중에 다시 쓰자

생각도 견뎌야 한다

찾아보니 여름에 관한 시가 없어
몇 편 쓰기로 했다
말하자면 기획시인 셈
한겨울에 여름시를 쓰려니까
몸도 마음도 열이 오르지 않아
도리어 으스스하다
작년 여름이 다가온다
한여름의 가운데 에어컨 없는 방에
마음먹고 길게 누웠을 때
(실제로 길지는 못하지만)
더위도 견딜만한 것은 견딜만 했다
겨울도 견뎌보고
여름도 견뎌보고
봄가을도 견뎌봤으면
대충 다 견딘 거 아닌가
그런 생각
생각도 견뎌야 한다

연주는 계속된다

꽤 늦은 시간에 불쑥 동네
카페에 들어섰다 작은 무대에서
누가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다
객석에는 세 명이 앉아서
연주를 듣는다 나도 앞자리에
앉아 연주자를 건너다 본다
그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고 순간적으로 연주는
정적이다 담배를 한 모금 빨기
위해서인지 자기가 원하는 건반을
고르기 위해선지는 잘 모르겠다
짜릿하다 피아니스트는
셀로니어스 멍크다 새벽 한 시
그가 어떻게 강원도의 한적한
카페 구석에서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의
이데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멍크의 연주는
계속된다

사는 게 제기랄

아방가르드 예술가 구사마 야요이의
전시회가 열리는 뉴욕 첼시
두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관람할 수 있다는군!
사는 게 제기랄
한대수 칼럼에서 읽었다
두 시간이면 중계동에서 무실동까지 가시고
커피잔을 헹구는 시간이다
무심한 나의 놀라움은
롹커 초보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허드슨강 매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갤러리에 갔다는 뉴욕의 뉴스다
그 대목이 오늘 아침
나의 아방가르드로 추천된다
예술이 없었다면 벌써 자살했을 것이라는
구사마의 허세는 그 다음 줄

봉두난발

시
시는 무슨
세상 모르고 깨춤 추는 거지
봉두난발로 언어의 흔적을
끄적이는 거지
바람 불면 나는 바람이오
비 오면 나는 빗방울이오
비전향 장기수처럼 살아가지요
오로지 한 길을 간다기보다
한 길도 다 가보지 못하는
쓸쓸하고 외롭고 괴롭고 어쩌구저쩌구
식도 법도 없는 헛손짓에
성공했기를 바라는 바이오
어쩌다 그런 화상을 면회 갑니다
같이 가셔도 좋고

2017년 11월 1일 흐림

올것이 왔다 수요일의 늦가을
잔에 남은 소량의 어젯밤 커피로 입가심
간밤의 꿈들을 청소함
출근하는 차들을 내다 봄
우산 쓰고 가는 사람들
우산 없이 가는 사람들
비가 오다말다 한다는 뜻인가
읽다가 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을
이어서 읽음(가즈오는 내 손에 없으니
이 줄은 지워야겠다)
처음 본 남자가 멋있듯이
처음 읽는 소설이 좋다
이 문장 오해하느라 힘들겠다
11월의 첫날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를 살아달라고 손을 내민다

재구성의 힘

모차르트의 장례식날
비바람 정신없이 불어서
운구하던 사람들 다 도망갔다고 전한다
나중에 모차르트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그날 심란했겠어요
다 후세가 지어낸 말이지요

그래도 밋밋하지 않고
극적이어서 좋잖아요

삶은 순전히
재구성의 힘!

살살

나는 안다
내 숨소리가 나의 시라는 것을
길을 갈 때 몸을 타고 올라오는
나의 발자국 소리가
내 거친 시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한때 우파였으나 극우파로 전향했고
좌파였으나 시시해서 극좌파로 개종했다
나는 열 권의 시집 800편의 시를 쓰면서
당신들 모르게 느린 속도로 타락해왔다
심심할 땐 바람 빠진 마음에 기대고
외로울 땐 고장 난 외로움에 기댄다
건달이나 반역으로 살고 싶던 희망은 접었다
그게 참정신이었음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
이제는 숨소리도 살살
발소리도 살살
시는 더 살살

봄밤

 다시는 봄밤에 대해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잊어먹고 또
쓴다. 경복궁 역 3번 출구를 나와 자하문로를 걷는 동안 봄날
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미세먼지에 섞인 옅은 어둠발이 서울
의 잔속삭임같아 몸이 아렸다. 마음도 아려 마음을 만져줬다.
흰 머리칼도 아렸다. 우체국, 스타벅스, 미술관, 칼국수집, 철
학아카데미 골목을 빠져나와 신주쿠 양아치들을 찍은 사진전
도 눈에 넣었다. 삼청동에 이르자 완전 어둠이다. 나도 어느새
한 덩어리 어둠이었던 것. 이런 밤엔 더 걸어야 생각도 몸에 깃
든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면서 지저분한 마음의 뒷골목에
당도한다. 번지수도 우편번호도 없는 그 집 앞. 빈손 탈탈 털
고 입장하자. 오래 걸어온 길을 왼손으로 쓱 지우고 이 밤은 여
기 묵기로 한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봄밤이라네, 여보게.

박세현시놉시스

그는 시를 썼고
그는 자기 시를 읽었으며
그는 가끔 누군가의 다큐를 찾아본다
그의 시에서는 종일 빗소리가 들렸으며
그의 시에서는 여름날 헛간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울린다
그는 잡다한 강의를 했고
그는 잡다한 글을 썼고
그는 가끔 바다에 가며
그는 가끔 바다의 복잡한 표정을 표절하며
그는 가끔 파도 위를 걸어 다닌다

사람들은 말하겠지
그 사람은 시인이었다고
그는 말하겠지
나는 한 번도 시인인 적이 없었다고

내게 없는 우수영 앞바다

법정이 사촌에게 보낸 서한집을 읽는데
클라리넷 오중주가 끝난다
출가했으면서 아직 그의 속인(俗人)
박재철에 기대어 살고 있을 때
현대문학 신간을 보내달라는 스님의 편지
목소리에서 금방 솟은 풀냄새가 난다
정비석의 소설작법도 있으며
이태준의 단편집도 주문했다
법정이 문학청년이었다는 뜻보다
산중에서 절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위장의 여백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내게 없는 전라도 우수영 앞바다의
잔파도가 넘실거린다
내일은 클라리넷 오중주를 주문할 것이다
누구 것이든!

아무개 올림

새해가 문틈으로 들어와서 악수했습니다
선생님도 괜찮으시지요?
커피집 좋은 데 알아놨으니
햇살 좋을 때 가보십시다
요샌 묵은 책들 보다가
동네 샛길을 걷기도 하고
소식 끊긴 사람한테 안부도 전합니다
(철들었다고요?)
어젠 지젝 선생이 궁금했고
밤에는 북유럽 재즈를 검색했습니다
(사실은 김추자를 검색했거든요)
내일은 도토리묵이 궁금할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심심하게 사시길 바라는
아무개 올림

블루스 타임

겨울 햇살 앞에서
김종삼 선집을 읽네
그 옛날 어느 출판사 어느 편집실에서
내가 교정 본 시집이지
여기도 읽고 저기도 읽고
공들여 읽으면 밤잠 설칠지 모르니
거죽만 읽는 거야
시집 저 너머 아주아주 먼 데서
걸어오는 소리가 있었네
뎅그렁 뎅그렁
나도 모르게 나는 알아챘던 거야
40여 년 전
스물 몇 살 때
나의 미개한 저녁을 체계 없이 흔들어놓던
여량천주교회 쇠종소리가 아니던가
시집을 덮고 눈 감고 입 다물었다네
나 혼자 허공에 붕 떠서 한 박자 쉬는 시간
귀환 시각 미정*


✽김종삼, 「올페」의 끝 줄

우두커니

가야금과 기타가 뒤섞인
엘콘도르 파사를 귀에 집어넣으며
생수 한 병 원샷하고
베란다에 기대 시내로 밀려오는
자동차 불빛을 롱 테이크로 바라본다
이 풍경을 구워낼 수 있는 사자성어는
우두커니
저렇게 돌아오는 길이 누구에게는
열심히 떠나가는 길이다
시집 한 권을 꺼내들다가
꺼내려던 마음 흩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시집도 모르게 도로 제자리에 꽂았다
시를 읽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시가 지나가는 순간이다
손 놓고 밤을 보낸다
숨도 쉬지 않고

여긴 어딥니까?

찰리 파커가
색소폰을 내려놓고
선배 벤 웹스터에게 귓속말 하는 사진
저런 것도 재즈랍니까?
이런 말 근처가 아니었을까?

김수영이 어느 뒤풀이에서
김소월에게 던진 허드렛말이 있다면
선배님은 어디 김씨냐고 물었을라나

쳇 베이커가 마약을 구하러 한국에 왔다면
(슬쩍 왔다 갔을지도)
자신의 불시착에 몸을 떨며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쓸데없이 공들여 상상한다
저기요, 여긴 어딥니까?

초현실주의

내가 임시로 사는 아파트
저녁이면 블루스풍으로 어둠이 내린다
개 키우는 남자
독거노인
이혼한 자영업자
가끔 콧노래
그리고 낮은 여자 울음소리
삶이 저리고 겨워서
허리 굽혀 어둠에 인사하는 밤이다

고맙습니다

이런 저녁에 전화를 주시다니
너무 감동적입니다
용건도 없이 휴대폰을 울려주셔서
큰 신세를 진 기분입니다
더 바랄 게 없어서
같이 늙어가는 소설가의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지 다음 날 백야 같은 저녁
각자 어쩔 수 없는 장면이 있을 것인데
그저 그렇고 그런
소설 속 인물과 내 표정이 닮아서
소리 내지 않고 웃던 순간에
전화벨이 울렸던 겁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엔 저도 전화를 갚겠습니다

어쩐지

물론 나를 찾는 이 없겠지만
혹시나 하면서 나를 수소문한다면
당신은 궂은비 맞으며
라면 끓이고 있는 나를 만날 공산이 크다
(행운으로 아시기를)
사모하는 마음 한 점 없이
나를 찾을 때마다
이 사람은 보헤미아 뒷골목을 헤매고 있겠지
거기서 장칼국수 주문하고 있겠지
날 발견하고 촌스럽게
혹시 아무개 시인 아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나를 알아볼 자격이 없는 인류다
그리고 또 프라하에 가면
귀를 막고 모차르트를 들어야지
교향곡 38번
서른 즈음 명지대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남가좌동 버스 노선이군
어쩐지

소설가 C형에게

C형
미안하지만 나한테 좀 속아주면 안 될까요?
정말로 그러면 미안하니까 속는 척이라도 괜찮겠소
단 며칠 단 한순간도 좋소
당신 시 읽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제 시는 안 읽어도 아쉽지 않을 겁니다
이런 스타일로 속아주시길 부탁

C형
그게 어려울까요?
서로의 귀속임 눈속임 말속임 그리고
몸속임이 없다면 어떻게 삶을 지속하겠습니까?
나는 C형을 속이고 C형은 나를 속이면서 우린
지나간 시대의 골목에서 만나
악수할 수 있을 겁니다

시인들은 시쓰기 바빠서
남의 시 읽을 처지는 아니지요
시인된 자의 불행일 겁니다

C형의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묘한 소설이라 문자 넣을 용의가 있습니다

청명과 입하 사이에
박 올림

봄의 해변에서 혼자

봄의 해변에서 혼자 서성거린다
서성거리다
말이라는 게 위조지폐와 흡사한 것인데
저 앞의 말은 그저 속 빈 친구 닮았을 뿐이다
기쁠 때 웃고 쓸쓸할 때 더 크게 웃어버리는 친구
가장 좋아하는 친구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본인이 가장 애달파하는 유일한 친구
오늘은 내가 저 서성거림을 좀 달래줘야지
그래서 대낮 해변에 분장 없이 출연한 것
좀 있어 보이려고 혼자라고 썼지만
사실 해변에는 혼자 온 것이 아니다
내 그림자도 따라오고 그림자의 친구도 같이 왔다
내 그림자의 옛날 친구도 오고
옛날 친구의 이성친구도 따라왔다
봄날이라 수평선도 새로 그어졌고
인문학 같은 헛소리 들리지 않아서 잔파도 위를
서성거리기 좋다
서성거림을 밀고 오는 저 파도소리
나의 뭔가를 열심히 가려줘서 고맙다

점심 가는 길

깜짝이야
이거 봄바람 아닌가?
숨었던 마음 확 뒤집어진다
지팡이 짚은 아버지 부축하고
점심 가는 길
메뉴는 한우갈비탕
구 강릉대학교 치과대학 옆집
무술년 첫날의 생애업무가
바람에 휜다
바람 하나
바람 둘
둘 둘 셋넷

쓸 수 있을 때 쓴다

내 마음의 극점
또는 최종심급
그러니까 미친 척 끝까지 밀어보는 것
거긴 아무것도 없을 테지
무엇인가 있다면 극점은 아니겠지
비 오는 날 우산 열심히 썼는데
바짓가랑이 축축하게 젖었다
난리를 쳐도 어쩔 수 없는
내 열망이 닿지 못하는 순간만이
나의 극점이기를 열망하며
손바닥 위에 쓴다
빗방울 한 획
쓸 수 있을 때 쓴다

거기는 어딘가

내가 이런 소리를 내고 있지만
내가 정말 내고 싶은 소리는 이게 아니다
아트 페퍼의 알토 색소폰은 그렇게 호소하고 있다고
이웃나라 소설가 하룩희는 썼다

내 말도 그 말이다
한 번도 원하던 곳에 도착해보지 못한 채로
나는 시를 끄적대고 있다
거기가 어딘지 모르면서 말이다
66

여름밤 소면맛

늦은 밤 아니다 초저녁이다 여름
명예교수인 친구들과 앉아서 삼겹을 뒤적거리며
소주에 맥주를 말아먹는다
바깥은 빗소리 부슬부슬
좀 밝은 단조의 음계 위에서 정치도 청춘도
연금도 무엇도 각자의 칼로 싹뚝!
한 발 늦게 오신 장로님은 사이더 한 잔
후래자 삼 배
그래서 두 잔 더 마시고 외롭게 취한다
난 책 다 버렸어
친구의 취중진담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날의 앤딩으로 소면이 나왔다
된장국에 살짝 담갔다 건져먹는 소면맛
세상에 잠깐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순간
남대천 옆 초저녁이 밝아졌으니 대박
이맛이면 됐다

청평사

청평사를 아시나요?
모르오. 청평 어디쯤 있겠지요.
그럼, 청평은 어딘가요?
검색해보시오.

당신의 마음 속에
당신의 몸 육체 속에
당신의 기쁨 속에 슬픔 속에
오월의 나뭇잎들 바쁘게 눈부실 동안
힘차게 살아있는 동안만

다시 물어주시오.
혹시, 청평사를 아시나요?
청평사는 청평에 있습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 앞에 있듯이
당신 또한 내 앞에 살아있듯이
청평사는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 겁니다.

잘난 척하시는군요.
언제, 청평사나 가실래요?

김수영 시비 근처

김영태를 읽다가 문득
심장에 끓는 물도 없으면서 7호선
1번 출구로 진출해 도봉산 기슭에 다다른다
초개가 김수영을 두고 썼던 시 두 편
누군가에게 대놓고 저렇게 써보고 싶지만
나의 일은 아닌 것 같다
그의 10주기 전시장에서 김종삼 소묘를 봤고
(세련)되게 어색한 시인의 춤영상을 보며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훔치기도 했다
김수영이 봤다면 육갑이라 했을까?
빈손을 털며 억지로 심장의 물을 데우는 게
시짓기라면 육갑이나 망령도
더러 추임새가 필요하겠다
낯선 스텝으로 계곡물 흘러간 잠깐
등산객 붙잡고 막걸리 한 통 비웠으면
(쓰고 보니 김 씨 둘이 등장했는데
그럴 생각은 아니었음)

멀리 있는 꿈

 내가 소망하는 것은 없다
 없다에 방점 꼭꼭
 너무도 그것들은 멀리 있어서다
 평생 가도 만날 수 없는 꿈들
 그리하여 나는 꿈이 아니라
 그 이웃들을 그 찡그림을 그 메아리를 만난다

 예컨대
 별들 이슬비 쑥부쟁이 김종삼이 넘어간 아리랑고개 길상사
설법전 이태준의 무서록 사이에 낀 빗소리 오스카 피터슨의 손
가락에 묻은 한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넌픽션 내 수업에 참
가한 70대 시낭송가 역시 내 시집 『아무것도 아닌 남자』의 민
짜 날개 토요일밤에 들르는 수유리 우동집 목로에서 내다보는
상계역 밤풍경

 내가 소망하는 꿈들은 멀리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벗어놓은 허물을
 입고 먹고 바르면서 살아간다

내용없는 문자

11월의 햇빛이 서향 창으로 들어와
방안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지요
옛날에 읽고 잊어버렸던 시의 끝무렵 같군요
결론은 없지만 끝까지 결론을 찾다보면
저런 마지막 빛그림자와 만나질 겁니다
문자가 오는 신호음이 들리지만
못 들은 척합니다
헛들었으리라
그게 좋겠어요
문자는 누군가에게 도착하고 말겠지요
정든 금요일이군요
내가 나를 확인하기 딱인 날이지요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의 끝무렵도 사라지는군요
가끔 생각나면 문자 주세요
문자 그대로 텅 빈 문자

똥통

오늘 지역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장소는 포남작은도서관 서가 앞이다
피디가 도내 전역에 방송된다고 해서
피디 모르게 쓰윽 진심으로 웃었다
시를 쓴다고 방송에 나온다는 건 남한스럽다
이 한남스러움
질문은 그저 그런 것들이었고
그때마다 따박따박 시인처럼 나불댔다
인터뷰가 끝나고 시내를 벗어나는데
느슨하게 화가 올라왔다
책상물림처럼 진지하게 말했던 내가
미워졌던 것
대충대충 건성건성 흐물흐물 답했어야 맞다
어영부영하다 문학에 붙잡혀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직 나는 똥통에 빠져 있습니다요
이렇게 말하지 못한 왕짜증
얼마나 더 물 먹어야 정신차릴 것인가

새가 울던 날

산문집 계약금으로 오만원을 받았다.
5월 마지막 전날
새가 울던 날이다.
술잔 앞에서 출판사 주인은
조용히 지폐를 꺼냈다.
(위약금은 백 배)
내가 쥐어본 가장 큰돈이다.
글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첫날이고
머리맡에서 낯선 새가 울던 그날이다.
이런 사건에 비추어볼 때
나는 운이 좋은 분이다.

종일 비 옴

당고개에서 날아온 까마귀들이
비 오는 허공을 깨물고 있소.
이런 날은 소소한 바닷가 선술집 모서리에서
잘 모르는 얘기를 실컷 떠들고 싶소.
선술집이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검색해도 없는 술집이라 대답했지요.
모처럼 잘한 일이외다.
종일 비 옴.
일기에 적고 싶지만
나는 일기를 쓰지 않소이다.

나의 유품

오늘 나의 유품은 저 구름이오
잠자리에서 읽은 죽은 시인의
일기 한 줄도 유품에 추가하렵니다
우산 밖으로 떨어지는 잔 빗방울도
방탄소년단의 댄스도
알고 보면 나의 유품이거든요
찰리 파커의 젊은 죽음도 나는
내 것으로 인정합니다
나의 장점은 잘 잊어버린다는 것
내 이름으로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머리통에 남아나는 게 없소
누가 내 유품을 간직해주면 좋겠소
박세현문학관 같은 상상 속이면
훨 좋지요

말줄임표 사이로

어디선가 밤새워 파도치고
누군가는 없는 길을 떠난다
어젯밤 내 머리맡을 지나간 사람
그는 어떤 시인에 대해서 한참 설명했다
모르는 시인인데 알 것 같기도 하다
내 삶에 우연히 입회한 가랑잎 한 장, 두 장,
너무 많아 다 헤아릴 수 없는 밤
먼저 길 떠났던 사람이 돌아와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
처음 보는 시를 읽어준다
시 속의 말들이 튀어나와 새벽까지 춤을 춘다
쉼표와 느낌표와 한 상자의 물음표 그리고
쓸쓸한 말줄임표 사이로 파도소리
한 컷 집어넣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어떤 타이밍

단 5분간 머물고 떠나온 바다가
시방 머리맡에 찾아와 출렁거린다
소리가 입고 온 빛깔도 제멋에 겹다
미대 중퇴한 화가의 붓질 맛이 저럴까?
좀 얍삽하게 거칠다고 할까
삐딱하다고 할까

눈 내리고 그친 창밖
망명객이 읽고 버린 철 지난 시 한 줄이다
(받아주는 데가 없어 망명을 포기하고
이대로 산다)
식탁에는 방금 도착한 계간지가 놓여 있다
하나의 풍경이자 구태의연한 장식이다
그냥 이렇게 한 5분 서 있는다
그냥 이렇게 한 50년 서 있고 싶다

이때,
전화벨이라도 울렸으면 좋겠다
딱, 그 타이밍

비의 날

시를 외면하며 산다
시가 싫어진 게 아니라
시를 읽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그러는 사이
세상은 모자를 쓰고
야릇한 자기걸음으로 지나간다
시집 한 권 8,000원
종이값과 인쇄비와 제본비의 합산
매춘부는 즐거움을 주지만
시인은 무엇을 주시는가
써놓고 보니 심한 표현이다
지우지 않고 그냥 둔다
새벽부터 빗소리
오늘은 비의 날이다

봄 편지

도봉산 기슭
계곡물 흐르다 얼음으로 멈춘 곳에서
걸음을 세우고 자운봉을 맹하게 쳐다본다
프로이트의 도움 없이도 쉽게 해몽되는 꿈자리가
산길을 오를수록 난감해진다
내 시쓰기가 누구도 아닌 나를 달래는 노동이었듯이
여태 나는 나만 사랑했던 게 아닌가
이런 쓸쓸할 데가!
종단 없는 암자에 들어가
대충 만든 돌탑만 보고 돌아 나왔다
정년 지난 부처는 만나지 않았다
세상도 나도 당신도 제대로 한번 속여보지 못했는데
늙은 시인의 손편지는 누가 읽어주리오
저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에 얹혀
주야장천, 나는 없는 당신 속으로 흘러간다

이래 가나 저래 가나

언제나 제대군인같이 씩씩한 시인
(설마 뒷면도 있겠지)
박용재와 가자미물회를 드시고
모조품 같은 고깃배 몇 척
그물로 봄을 건져내는 거 보면서
사천항 봄날을 걸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나 나나 어딘가 화들짝
달아나고 싶은 안달
지금 밀려오는 파도는 아까 왔던
그 파도일까?

이틀 전에 끊었다던 그가
담배 사러 편의점에 들어가며 흘린 말을
식기 전에 메모하고 강릉시 사천면
시인의 태가 묻힌 하평리 들판에 잘게
뿌려주며 돌아서는 길이다

이래 가나 저래 가나
(특히,
세련된 영동지방 표준
억양으로)

꽃잎만 믿고 가자

밤벚꽃 바람 사이로 흩어지는
대학병원 뒤편 긴 내리막길을
산보걸음으로 걸어가면서
누구의 정직성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저렇게 관능으로 살아오르는
벚꽃 한순간만 믿기로 한다
주차장 구석에서 오래된 여자가
휴대폰을 삼킬 듯이 악을 쓴다
니들이 자식이냐 엉
벚꽃 지는 밤
누구를 믿어버리면 저런 지랄이 발생하느니
영안실 입구에 길 잃은 영혼이 서 있다 철썩
이것은 사천 진리 파도가 어둠에 따귀 맞는 소리
희게 지고 있는 꽃잎만 믿고 가자
그게 답이다

슬픔은 원 플러스 원

수레국화 검색해 본 아침
간밤에 지지 못한 좀생이별이
반짝거림 생략하고 허공에 박혀 있다
오늘 전화 한 통 걸려 옴
수신하지 않음
당신과 나는 유통기한 끝났으니
용건이 있을 리 없음
그걸 모르고 번호를 꾹꾹 눌렀을 당신
그게 나였음을 확인시켜 준 당신에게
오로지 고마운 마음
수레국화 한 컷 발송한다
슬픔은 원 플러스 원
열대야 시동 거는 유월 끝 무렵
내가 쓴 비산문 1편에 깃든
빗방울
바삭바삭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줄거리

너는 날마다 생각한다
꿈속에서도 생각한다
삶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쩍 떠나고 싶은 곳이 있다.
꿈속에서 다른 꿈속으로 들어가서
며칠 살고 싶은 곳이 있다.
리스본, 파리, 뉴욕, 잘츠부르크, 내몽고,
라싸, 바라나시, 삼천포
생각하면 또 있을 것이다.
내가 며칠 꿈에 시달리고 싶은 장소는
앞에 열거한 데는 아니다.

커피도 동이 난 아침에
내 입술 묻은 커피잔을 바라보며
비 오는 창밖
읽지 않은 소설들, 시집들
끊어진 원고 청탁을 뒤로 하고

우산은 없어도 된다.
빗방울 사이를 비집으며 거리로 나선다.
늘 출근하던 길을 버리고
내가 가는 곳은 나도 모르는 곳
아무도 모르는 곳
세상에 있을 리 없는 곳에서 실종되자.

단지, 이건 삶이 아니라는 것
삶의 대역이거나 레제시나리오라는 것
그곳이 내가 찾던 곳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곳에 도착해 거리를 걷는다.
세탁소, 치킨집, 칼국수집, 소줏집, 생맥줏집, 편의점,
당구장, 초등학교, 편의점, 식당, 자동차 정비소,
수리 중인 혁명, 행인 1과 행인 2 사이를 지나간다.

내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먼저, 연락해봐야 하나 생각 중.

누가 창남이를 미워하랴

창남이를 아시나요?
내 유년시대에 등장하는 동네 형
난데없는 업둥이 출신으로
자식 없는 영감네 아들로 살아간다
창남아 공부해라
할머니뻘 늙은 엄마가 재촉하면
어린 창남이는 책상에 앉아 줄줄 좔좔
용감하게 소리내어 책을 읽는다
손에 거꾸로 들린 책이지만
창남이는 왼금으로 제멋대로 주워섬긴다
그의 책읽기에서는 물소리도 들리고
새소리도 들리고 가끔 천둥소리도 들린다
노부부는 그게 너무 흐뭇해서
가짜 아들의 가짜 책읽는 소리에 깊은 잠에 든다
지금도 창남이형은 한글을 모른다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 있으면 동네에서는
창남이 책읽 듯 한다고 그런다

민무늬가을

9월 첫날
민무늬가을은 각자의 기억을 두드리고
사람들은 무거운 머리 내려놓고
친구의 페이스북을 검색한다
코스모스는 코스모스처럼 피었고
기차는 기차처럼 달리고
꼴보수는 꼴좌파처럼 웃고
노숙인은 노숙인처럼 살아간다
양평 다음 역은 덕소
양평의 전생역은 만종
노벨문학상이 시시한 신춘문예처럼
공모제로 바뀌어도 좋겠다는 생각
시인은 시 같은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 같은 소설을 쓰고 있는 나라
청량리역에 도착하면 더 갈 데가 없다
종착역이거든요
종착역 다음 역도 종착역이거든요

시인도 한철

시는 두고 맨입으로 달랑 옵시다
서랍 같은 데 책갈피 같은 데 끼워놓고
그냥 오시라구요
카스테라 한 입에 커피 한 모금
한 꼭지의 스토리텔링으로 인생을 좀 때웁시다
메뚜기도 한철
원두막에서 수박 갈라놓고 부채질하던 여름
생각나시나요?
귀 막고 듣던 바람소리
오늘 나는 모처럼 나를 연기했답니다
죽은 시인과 아직 죽지 않은 시인을 상상하며
초가을 어둠을 건너갑니다
시인도 한철
독자도 한철
다 한철 영업이잖아요
손톱 밑에 낀 시도 빼어놓고 오자구요
꼴값하는 시는 한번 더 쥐어박고요
느긋하게 밀려오세요

모두들 안녕히

가을에는 미친 척 시를 읽자
깊은 밤까지 시가 새겨진 종이 결을 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자
시의 행간에 낙서를 하자
시에서 삭제된 말들을 위로하자
그 말들만 모아서 시를 만들어 보자
울다가 지친 말 웃다가 더 크게 웃는 말
스스로 공허한 말 출판사에서 퇴짜 맞은 말
허름한 말들만 모아서 낭송회를 열자
평생 시를 읽지 않는 사람협회도 찾아가자
아예 사단법인 시를 찾아 댕기는 모임을 만들까
가을엔 시를 읽으며 이건 시가 아니다
시일 리가 없다고 되뇌이며 시를 날려 보내자
가을밤도 안녕히 시도 안녕히 안녕히도 안녕히
모두들 안녕히

빗소리듣기모임

 어느 하루 눈뜨고 생각해보니 삶이 한참 밋밋해졌다. 이래서
는 안 되지 싶은 마음 가닥을 붙잡고 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하여 손수 빗소리듣기모임을 일으켜 세우고 혼자 뚝딱뚝딱 셀
프로 종신대표에 취임했다.

 현재 정회원은 나 1인뿐이지만
 회원을 더 모집할지는 미정이다
 하는 일이야 뭐 있겠는가
 비 오는 날
 어느 구석에 모여 어느 빗소리에
 오롯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드디어 미쳤군! 그러겠지들

 비 오는 날 생각나거든
 술잔값이나 들고 오시면 된다
 당신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나의 동지들
 이 모임은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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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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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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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랑말랑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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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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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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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를 수 없는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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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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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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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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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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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눈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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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벽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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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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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박세현

    53

  • 내게 없는 우수영 앞바다

    54

  • 아무개 올림

    55

  • 블루스 타임

    56

  • 우두커니

    57

  • 여긴 어딥니까?

    낭송시

    58

  • 초현실주의

    59

  • 고맙습니다

    60

  • 어쩐지

    61

  • 소설가 C형에게

    62

  • 봄의 해변에서 혼자

    64

  • 점심 가는 길

    65

  • 쓸 수 있을 때 쓴다

    66

  • 거기는 어딘가

    67

  • 여름밤 소면맛

    68

  • 청평사

    69

  • 김수영 시비 근처

    70

  • 멀리 있는 꿈

    71

  • 내용없는 문자

    72

  • 똥통

    73

  • 새가 울던 날

    77

  • 종일 비 옴

    78

  • 나의 유품

    79

  • 말줄임표 사이로

    80

  • 어떤 타이밍

    81

  • 비의 날

    82

  • 봄 편지

    83

  • 이래 가나 저래 가나

    84

  • 꽃잎만 믿고 가자

    86

  • 슬픔은 원 플러스 원

    87

  • 리스본행 야간열차 줄거리

    88

  • 누가 창남이를 미워하랴

    90

  • 민무늬가을

    91

  • 시인도 한철

    92

  • 모두들 안녕히

    93

  • 빗소리듣기모임

    94

책장,착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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