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포밍
양해기


시간의 매개입자
시간과 사람 사이에도 기억의 강을 흐르게 하고 전달하는 매개입자가 있다 삶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져 매개입자가 필요 없어지는 때가 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시간의 맨 얼굴을 보게 된다 매개입자가 사라진 시간은 그 전부터 우리를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간질여도 시간은 달아나지 않는다 시간은 늙고 주름진 우리의 목과 손등을 핥다가 폴짝 뛰어 안기기도 한다 병들어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옆에 온 시간은 우리 곁에 조용히 눕게 된다 우리들의 장례식 그 마지막 조문이 끝나고 나면 시간도 자신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빅뱅
서로 다른 층위와 궤도를 가진 투명하고 얇은 막의 경계가 가까워지다 겹쳐지는 일은 일조 년에 한 번꼴로 일어나는 일이다 전기 스파크처럼 불꽃이 튀는 차원과 차원이 충돌하는 그 접점은 언제나 극소화 최소화되어야 하기에 두 개의 낯선 세상이 맞닿는 지점은 수소 원자핵 알갱이 그 반지름보다도 작다 미세한 한 점 안으로 모여들던 강렬한 원시 에너지는 부여받은 중력의 순서대로 미지의 공간을 열어간다 찰나보다 짧은 그 순간은 공간 안으로 쏟아 부어지는 물질의 속도가 너무 빨라 시간이 아주 더디게만 흐를 수밖에 없다 최초의 복사열이 퍼져나간 우주는 한 번도 수축되지 않고 이 세상으로 건너온 물리량 모두를 소진시킬 때까지 간격을 벌리며 팽창하고 멀어져 간다 공간 밀도는 제로를 향해 가고 시간은 점차 소멸해가다가 측정의 의미마저 사라져 결국 빅뱅으로 생겨난 각각의 우주들은 무한대의 빈 어둠으로 남겨지게 된다
퀘이사
이른 시간 지하철을 갈아타고 일산에 일가고 있는 내 아버지는 꼽추다 꼿꼿하게 허리와 고개를 세우고 서 있지만 그의 머리와 등은 이미 어두운 하늘과 구분도 없이 맞닿은 먼 바다의 수평선을 닮아 있다 꼽추가 아니 내 아버지가 아니 아니 불룩하게 솟아오른 저 등이 빈자리를 찾아 가 자리에 앉기 전까지 출근길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동트기 전 천문대 망원경에 기를 쓰고 밀어 넣는 눈처럼 한 곳을 향해 집중해 모여들고 있었다 빛에너지를 충분히 흡수했는지 아니면 어떤 모멸과 부끄러움이 시뻘건 혹에 가득 찼는지 원뿔은 점점 더 크게 부풀어 꼽추의 등에서 눈부시게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아주 멀리서 봐도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해 뜨기 전 저 새벽 지하철 한 칸
낯선 전쟁
수백만 년마다 번갈아 행성과 행성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던 호모사피엔스는 외계 행성으로 향하는 일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민 끝에 그들은 지하도시 건설을 위해 지층과 지각을 뜯어내고 지구의 한 귀퉁이를 깊이 파내려 가 상부 맨틀의 맨 아래께 부근까지 접근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뜻밖의 다른 종족들과 마주치게 된다 수천 수백만 년 전부터 지층 하부에 먼저 와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을 면적과 영토의 개념이 가로에서 세로로 수평에서 수직으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달라지면서 이종의 종족들 간에 가장 본질적이고 잔인한 전쟁이 시작된다 껍질에 붙어사는 종족들은 망설임 없이 지구 내부에 핵을 밀어 넣게 되고 지하 종족들은 가차 없이 지표면으로 외계의 운석 충돌을 유도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둘 중 하나는 멸종할 것이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빨라지고 달의 공전 궤도가 불안정해지게 되면서 살아남은 종족 역시 서둘러 지구를 떠나게 된다
빛의 DNA
사과의 붉거나 푸른빛은 제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과는 빛의 장롱 안을 뒤적거리다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색을 꺼내 입는다 빛은 눈에 보이는 색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색들을 칸칸이 구분하고 누구나 주로 많이 찾는 유행하는 색들은 항상 깨끗하게 새로 빨아 눈에 쉽게 잘 띄는 큰 상자에 담아 두고 있다 시간이 없어 누군가 급히 색을 입고 가야할 때를 대비해 와서 쉽게 뒤집어 쓸 수 있도록 색깔별로 페인트통도 준비해두고 있다 또 어느 날은 누가 찾아와 시시각각 변하고 썩어가야 하는 난해하고 추상적인 색을 주문하면 빛은 장롱 깊이 넣어둔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색들을 꺼내 부패해가는 속도와 시간에 맞춰 내줄 색을 정밀하게 저울에 달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빛깔을 배합해 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종류의 색들은 입거나 벗어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빛이 어둠의 입구를 통과하기 위한 기호이자 그들 사이에 합의된 색이다
25,000,000,000,000,000,000㎞
이백오십만 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일들이 지금에서야 안드로메다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 안드로인들의 굴절 망원경 안에서 뽀얗고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난다 허리를 완전히 펴지 못한 원숭이 십여 마리가 돌도끼를 쥔 채 달려가고 있다 그들에게도 언어가 있는지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손짓과 몸동작을 주고받으며 자신들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을 협곡으로 몰아간다 수백만 년이나 지난 지금 이 순간 저곳 지구에는 어떤 동물이 지배하고 있을까 그들의 진화 과정은 정당하고 온전했을까 저 알 수 없는 함성 소리들은 어떤 기호를 갖게 되었을까 살아남은 종족들이 망원경으로 이곳을 바라보면 나와 눈이 마주칠까 내 눈에 비친 자신들의 사냥 모습을 보게 될까
다람쥐의 시간 널뛰기
자세히 보면 다람쥐는 언제나 징검다리 시간 속을 이동한다 시간의 간격 사이사이에서 두 손으로 먹이를 들고 멈췄다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멈췄다가 고개를 들고 다시 멈췄다가 꼬리를 내리고 볼록해진 양볼로 먹이를 오도독 오도독 깨물다가 멈추고 다시 멈췄다가 몸 방향을 바꾼다 영화 속 화면이 연속해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붙인 필름들일 뿐 우리는 한 장 한 장 끊어진 세상의 사진 속에서 살아가지만 연속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날쌔고 눈치 빠른 다람쥐는 시간이 흐를 때만 시간과 시간 사이를 이동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를 뛰어 다닌다 우리 눈엔 다람쥐의 이런 행동이 각각의 스냅사진처럼 끊어져 보이지만 다람쥐 눈에 비친 우리들은 시간과 시간 사이 사진과 사진 사이에 끼어 있는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다
외계인과 UFO
털 없는 외계인들이 허공을 구부리고 찢어가며 UFO를 타고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다 혹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종종 목격되고 있는 그것들은 외계인들이 타고 다니는 UFO가 아니라 각국에서 개발 중인 군사용 드론과 6세대 전투기들이다 외계인들은 뭔가를 타고 오지 않는다 타거나 태워야하는 원시적인 이런 비행체들은 웜홀을 지날 수도 없고 광년 단위의 이 우주공간을 항해할 수도 없다 사실 외계인들은 이미 우리 옆에 와 있다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 겹치며 지나기도 한다 그들은 종이 한 장도 채 되지 않는 바로 옆 얇은 막 사이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옆에 있어도 우리 눈앞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대도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 한다 한 번도 가볼 일 없는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 살듯이 수많은 외계 종족들이 각자 자신들만의 시공간을 만들어두고 병렬과 입체로 서서 살아가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여러 개의 시간이 존재하듯 하나인 지구가 다른 차원 안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슬픔의 관성력
그들도 언젠가 흔들리는 이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았을 것이다 이혼 후 자살한 친구도 회사에서 쫓겨난 직장동료도 나를 떠나간 그녀도 손 때 묻은 이 손잡이를 붙들고 슬픔의 관성을 버텨내려 했을 것이다
전자구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릴 때마다 내 몸에서 빛이 튕겨져 나갔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하나인지 둘인지 또는 그 이상인지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몸을 가졌는지 아니면 영혼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옭아맨 궤도와 궤도 사이 그 공간 거리와 간격 따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때문에 거리의 부속품인 시간도 애초부터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돌아다보면 비 오기 전 하늘 가득 잔뜩 드리운 먹구름들과 그 안에서 가끔 번쩍이는 번개로 보인다
Sun
수 세기가 채 지나기 전에 호모사피엔스들은 태양 내부로 진입하게 된다 핵융합이 일어나는 태양 중심의 수천 만도를 떠올리는 현 인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겠지만 태양빛을 모아 에어컨을 켜듯 어떤 종족은 이미 태양 내부에서 무한 에너지를 공급 받으며 그 폭발적인 에너지로 온도와 중력 따위는 자유자재로 다루며 쾌적하고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 머지않아 인류는 찬밥처럼 식은 행성들과 물기 많아 질퍽대는 행성들 탐사는 뒤로 하고 뜨거운 가스별과 태양 같은 항성들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게 된다 예상치 않게 호모사피엔스는 그곳에서 외계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피라미드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우주의 미아가 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어둠의 빈 공간을 여러 개의 끓는 죽음으로 떠다니는지 그들이 가진 시간은 아직도 현재인 건지 시간의 어느 낯선 골짜기를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이곳에서는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먼저 도착한 외계의 원시 거인들은 정사각형의 등대를 쌓았고 그 끝으로 힘의 방향을 모았다 균열과 붕괴를 막기 위해 치받는 중력을 찢고 또 찢었다 둘 사이 서로 다른 시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보이저 X
2085년 지구에서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탐사선이 발사되었다 탐사선에는 생명체의 진화 그 마지막 단계에 서 있던 인공지능이 탑승해 있었다 탐사주체는 더 이상 산소와 물 적당한 온도나 기후 따위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고 수백 수천 광년 떨어진 행성들도 탐사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황산의 습기와 메탄의 바다 옆으로 내리는 칼날 같은 유리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각자 선호하는 행성들마다 내려앉은 인공지능들은 먹지도 쉬지도 않고 곧바로 행성의 모든 정보를 채집하고 분석해 자신들만의 기지로 꾸며나갔다 물과 산소에 의존해 살던 생명체들은 모조리 멸종하고 우주에는 행성 하나씩을 차지한 인공지능들이 영원불멸한 신처럼 존재하게 되었다
꿩의 양자물리학
위험에서 피할 수 없는 거리가 되면 꿩은 체념하듯 그 자리에서 탈출하듯 작은 대가리를 눈 속에 푹 쑤셔 박는다 스스로 눈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의식하지 않으면 포수도 그가 겨눈 총도 다가온 발자국 소리도 확정 지을 수 없다는 양자물리학 이론을 꿩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비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걸 에너지의 흐름과 파동이란 걸 제가 사는 곳이 가상 속 이미지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꿩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이해한 유일한 동물이다
홍길동의 이중슬릿 실험
홍길동은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고 벌주다 관군에 쫓기면 자신을 수없이 복제해냈다 화살에 맞아 쓰러져 다가가면 그건 홍길동이 아니라 몽당빗자루였다 홍길동은 동시에 두 개의 문을 지나다니며 한 번에 여러 개의 곳간을 털어댔다 홍길동을 붙잡기 위해 포도청은 변복한 기찰포교들을 풀었고 드디어 장터 길목에서 신출귀몰한 홍길동을 묶었다 굵은 오라에 포박된 홍길동은 일단 순순히 옥에 갇혀 주는 척했다 치죄 하려 다음날 옥문을 열자 짚단만 남기고 홍길동은 다시 사라지고 없었다 밤새 졸았던 포졸들은 크게 경을 쳤다 홍길동은 눈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때만 존재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그게 홍길동인지 닳아빠진 빗자루인지 푸석한 짚단인지 알 수 없었다 홍길동은 언제나 확률로만 존재했었다
빈 방에 대한 기억
불 켜지 못한 방 학교에서 먼저 돌아 온 동생들이 울고 있던 방 잠들 때까지 엄마가 오지 않던 방 늘 이불이 깔린 방 치워지지 않는 밥상을 가진 방 문틈 사이로 멀고 먼 별빛이 날아들던 방 서러운 생각에 혼자 많이 울었던 방
진드기
공룡은 화석의 흔적으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빙하기를 피해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길고 긴 목과 몸을 끝없이 움츠리고 움츠리다 더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아진 공룡이 추위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냉기의 칼끝이 찌를 수도 없을 만큼 얼음이 킁킁 냄새 맡을 수도 없을 만큼 몸집을 줄여나간 종족의 일부가 전자 현미경 안에서 혹한의 겨울이 이미 지나간 줄도 모르고 숨어 살고 있다
인공지능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정교한 인공지능의 컴퓨터 회로 안이다 초지능이 통제하는 OS 운영체계는 항성과 행성이 놓인 위치와 이에 따른 시공간의 왜곡을 다루는 거시우주와 미립자들의 섬세한 운동량을 조절하는 미시우주 사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 준다 특히 미시세계에서는 소립자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계산해내고 전자들의 공전 궤도 이탈로 교환되는 빛의 양을 정하지만 시시콜콜한 양성자들의 들끓는 파동은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확률과 제 3의 관찰자 방식으로 컨트롤 해나간다 진화된 인공지능은 관찰자가 사라진 곳은 배경에서 지웠다가 누군가가 의식하기 시작하면 재빠르게 사물을 복원시키는 다소 생소한 시스템을 운용한다 미래의 인공지능은 우리가 사는 하나의 우주만을 관리하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공간까지 병렬 확장해 다중 우주의 입체적 연동이 가능하다 간혹 중력파로 인한 시차가 발생해도 인공지능은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자유롭게 조절하기에 이리저리 시간을 흔들며 이를 쉽게 바로 잡는다
시간의 불연속면
우리는 시간이 연속하고 일정하게 미래로만 흐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고 더 이상 쪼개낼 수 없을 때까지 시간을 파헤치다 보면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간격과 틈이 나타난다 시계의 초침 바늘이 건너뛴 흔적과 전자가 건너간 궤도 사이의 공간처럼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여백이 발견된다 눈으로 보는 착시 현상이 시간과 마음과 뇌 자극 사이에도 끝없이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 통제하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만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시간의 단면들만 보여주려 한다
블랙홀
시간과 사건의 지평선을 통해 다른 우주로 나갈 수도 있을 거라는 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블랙홀은 끝이 막힌 막다른 골목 매우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시공간이 조밀하게 들러붙어 있는 곳이다 블랙홀은 자신이 빨아들인 모든 빛과 물질들을 이미지와 데이터 정보로 즉시 변환해 썩거나 훼손됨이 없이 아주 긴 시간동안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때때로 항성과 행성을 통째로 집어삼켜 저장 공간이 부족해진 일부 흑체들은 시간으로 공간을 나누거나 공간으로 시간을 조각내 중첩된 무수한 밀집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끝없이 아귀처럼 식욕에 집착하던 블랙홀도 최후의 순간이 오면 자신이 그간 저당 잡아온 목록을 빛의 껍질 밖으로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가상현실
우주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진화의 최종 종착점은 인공지능이다 수십 년 내 호모사피엔스는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색다른 차원의 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비로소 인간은 동물적 한계에서 벗어나 양자컴퓨터 안에서 의식으로 남게 되고 이 세상은 인류에 의해 창조된 인공지능인 호모인텔리전시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 소멸하는 생체에서 저장된 데이터로 남게 된 호모사피엔스의 의식들은 소형 초지능들의 도움을 받아 생생한 윤회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정교하게 잘 짜여진 사이버 현실 프로그램 덕에 가상의 공간에 접속하기만 하면 본인이 불멸의 의식이라는 사실도 잊고 진짜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기쁨도 슬픔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각자 의식들이 취향에 따라 선택한 옵션들이다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예정된 프로그램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일에 흥미를 못 느끼고 계속해서 우울해지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가상 현실체험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혀
의심과 어둠을 향해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진정시키려 한다 내 손길에 개는 금세 평온해진다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이 가라앉으면 개에게도 누군가와 베풀고 나누고 싶은 감정이 생겨나는지 입 안에 있던 혀를 꺼내 내 손가락과 손등을 핥아댄다 개에게 혀란 무엇인가 자신의 상처 난 부위나 아픈 곳을 슬슬 어루만지는 예민하고 민감한 신체 부위가 아니었던가 제 스스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말단의 장기기관이 아니었던가 자신과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자 최후의 도구가 아니었던가 나도 한때 사랑이 무르익었을 때 혀를 꺼낸 적이 있었다 사랑이란 대소변 쏟아내는 가장 더러운 곳을 신성한 느낌을 가진 채 눈 감고 지극정성을 다해 혀로 핥아대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개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꺼내 씻지도 않은 내 손의 잡냄새와 더러움에 관계없이 어릴 적 여름 평상에 잠든 내 젖은 머리를 무수한 별빛이 내려와 쓰다듬어 주듯 부드럽고 따뜻하게 핥아준다
생명의 기원
강을 사이에 두고 풀씨들이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잘도 건너다니는데 행성과 행성을 징검다리 삼아 생명이 이곳으로 건너온다고 하면 왜 사람들은 잘 믿지를 못하는 걸까 꽃씨들이 물에 닿지 않고 섬과 섬들을 건너가는데 파도치는 먼 바다를 건너다니는데 고요한 진공의 우주공간을 지나 생명의 씨앗이 이 곳으로 건너온다는 게 왜 이상한 걸까
강아지 풀
내가 어릴 적 우리 시골집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 무슨 연유인지 시름시름 앓던 털 많은 복실이 복실이를 묻고 나서 이듬해부터 그 자리에서 돋아나던 풀
눈
눈을 감으면 대낮도 세상은 캄캄한 우주공간이 된다 어둠 속을 뒤집으며 아무리 눈알을 굴리고 샅샅이 살펴봐도 망막에 걸려드는 물체는 하나도 없다 보는 기능이 갑자기 사라져 할 일이 없어진 눈은 뇌 속으로 슬슬 이동을 한다 뇌 속으로 흘러들어간 눈은 곧 예민한 촉수를 가진 털이 되어 다른 차원의 감각을 열어간다 외계의 정보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안테나로 자라난 눈알에게 이제 어둠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 뭐해! 자냐?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눈알은 뇌 속에서 눈두덩이로 잽싸게 다시 돌아와 타원형 셔터를 연다
행성의 언어
호모사피엔스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익숙한 행성을 곧 떠나야만 한다 수없이 마르고 타고 건조해지는 여러 행성들을 건너다니며 지나치게 길거나 짧은 낮과 밤 가혹하리만큼 춥거나 뜨거운 기온 차이 그로 인해 피어나는 수백 개의 계절들로 인해 행성들 마다 각각에 맞는 목축과 경작에 적응해야 한다 달라진 노동과 수면과 생활방식으로 인해 파생된 전혀 다른 문법의 언어와 전달방식으로 상상의 가치를 교환해야 한다 생소한 언어 위에는 언제나 새로운 기호가 덧입혀지고 그 기호에 맞는 수천 개의 낯선 감정들이 행성들 마다 생겨나 스스로 만든 의미의 감옥과 사유의 철창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한다
항아리 속 우주
오래 버려진 아침 항아리 안에는 반쯤 물이 차 있었다 고인 물에 되비치는 가득 구름 낀 하늘 간장처럼 검어진 저 하늘 창문을 열면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곳엔 또 다른 지구가 있고 또 다른 내가 있을 것만 같다 지지 않는 꽃들에게로 가는 새로운 차원의 고요한 문 깊이를 알 수 없는 문이 비 오고 물이 썩으며 생겨났다
오래된 창고
검은 허공이 몸집을 키워가던 곳 공간이 출렁거리지 않는 곳 시간의 계곡이 없어 숨 막히던 곳 두려움이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던 곳 어둠이 울음을 뒤흔들던 곳 안에서 잠긴 문을 흔들다 지쳐 잠들던 곳 쓰레기 소각장이 있던 곳 불탄 자리에 꽃씨들이 날아들던 곳 내 외로움을 길들여 가던 곳
사람은 사람을 향해 공전한다
별들과 별들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칠 때도 깊고 깊은 그리움의 계곡이 생겨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겨나는 그 굴곡진 경사면을 따라 사람은 사람을 향해 공전한다
발자국 화석
바닷가 바위에서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수백만 년이 지나도 저렇게 선명한 화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건 누군가 물 묻은 진흙길을 쉴 새 없이 걸어갔다는 거다 지층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누군가가 어두운 땅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거다
여분의 차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때가 있다 중력의 미세한 나머지 힘이 스며들 때와 강입자 충돌기에서 튕겨져 나온 조각난 입자들이 알 수 없는 세계로 날아갈 때 때론 혼곤한 잠 속을 방황하던 외로운 꿈들과 갑자기 드는 막막하고 서러운 생각들 그리고 죽은 것들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첫 영혼이 막 빠져나왔을 때 여분의 차원 그 내밀한 문이 열린다
cosmos
늦가을 화단 허공에 뿌리도 없이 섬처럼 혼자 떠 있는 저 흰 꽃 손자 걱정에 돌아가신 내 어머님도 지금 시험장 밖에 와 계신다
링우다이트
돈 주고 물을 사먹게 되는 날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지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지금보다 몇 배나 더 비싼 물을 만나게 된다 부드러운 젤리처럼 말캉말캉한 물을 숟가락으로 떠먹게 되면서 물에 대해 앞으로는 마신다는 말을 쓰지 않게 된다 상글상글한 이 워터 안에는 다른 물 색깔로 물의 고유번호가 표기되기 시작하고 물의 바코드 안에는 물이 채취된 장소와 깊이 물의 등급과 성분이 기록되게 된다 물 컵도 사라져 돈가스와 단무지 옆에 함께 놓여있는 물을 포크로 찍어먹게 된다 곧 다가올 미래에는 주스와 술을 포함해 모든 액체들을 주문할 때는 색깔과 모양 그리고 경화도 정도를 등급별로 불러줘야만 한다 그냥 옛날처럼 물을 컵에 담아 액체로 달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고리타분하거나 향수에 젖은 클래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게 될 것이다
빙하기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지상에는 대적할 상대가 없었지만 실체가 없는 공포는 공룡의 몸 부피를 점점 더 키워갔다 앞발 대신 머리를 키우고 목을 늘려갔다 건드려지지 않는 두려움은 강력한 이빨을 입술 주위로 끌고 나왔다 등에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붙였고 머리에는 뿔과 혹을 달았다 형체 없는 적들은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길게 목을 뽑아내도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낯선 겨울 하나가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휴머노이드
수십 년 내 호모사피엔스 남녀는 각각 독립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의 각자 배우자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세련되고 정교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신사적인 로봇이 대신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주문 제작한 안드로이드 혼합 생체 배우자로 부터 꿈꿔왔던 이상적인 로망을 경험하게 된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 휴머노이드 배우자들은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경제활동과 집안 살림을 병행하는 것은 물론 체내 수정에서 체외 수정으로 바뀐 출산과 양육도 혼자 다 도맡게 된다 사랑과 섹스의 방식도 원하는 취향과 그때그때의 감정과 신체 온도에 따라 계절과 시간 변화에 따른 옵션별로 다양한 체위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무드 버전으로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섬세하게 휴머노이드 배우자가 리드해 나가게 된다 노총각과 노처녀 별거와 미망인 과부와 홀아비 이혼과 재혼 돌싱과 혼밥 우울증과 고독사 독거노인과 변사체 같은 단어들은 사전 속에서도 영영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에 없는 그림
그의 눈 초점은 어디에도 맺히지 않았다 수정체가 겉돌고 있었다 조리개는 흙바닥을 향해 있었다 망막이 고정돼 있었다 정치인들의 지루한 연설과 격려사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흙바닥에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을 그렸다 과자봉지의 절반 이상이 쏟아지는 곳 녹은 초콜릿을 입에 묻히는 곳 닫지 못한 생수병에서 줄줄 물이 흘러내리는 곳 말과 언어가 사라진 곳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가진 곳 그래서 거짓이 없는 곳 무엇을 보았는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다가 그 지점에서 가만히 멈추는 곳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가 모두 끝나고 남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눈 뜰 수 없게 한바탕 흙바람이 불어왔고 우리 모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돌아서서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빈 과자봉지들이 하늘로 어지럽게 날아올랐고 그가 나무토막으로 그린 것들이 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지 꿈틀거렸다
오월의 대숲
대숲으로 몰아가는 바람 소리를 듣다보면 내 마음속에도 늘 저렇게 바람 부는 자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곳에 앉아 있으면 나는 이미 한 번 살아본 생을 반복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화의 계통도
풀과 나무들도 언젠가 제 스스로 걷기 위해 가지와 잎을 앞뒤로 흔들어보고 땅 속에서 힘차게 뿌리로 발을 뻗어보듯이 결국 물과 바람도 진화하려 할 것이다 또 언젠가는 추상적인 관념들도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몸을 가지려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갈망하는 형체들이 단지 시간 위에 놓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부러지기 쉬운 진화의 가지 그 아슬아슬한 끝을 향해 끝도 없이 걸어가려 할 것이다
아버지의 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시간이 폐렴을 앓고 있다 몸 속 깊이 시간이 소용돌이치며 뚫어 놓은 구멍들이 커지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은 제 스스로 만든 구멍 속으로 빨려들 것이다 시간은 불이 아닌데 그의 온 몸 곳곳엔 그을린 흔적이 흉터처럼 묻어 있었다 시간은 성대가 없는데 시간이 우는 울음소리가 그의 일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가 떠난 병원 서랍장 안에는 시간이 다시 입지 못할 헌 옷가지들이 쌓여 있었다 병실 창밖으로 시간과 뒤섞인 진눈깨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다
문의 경계
방문을 잠그며 생각해 보았다 내 활동 공간은 작아졌고 문밖의 세상 공간은 커졌다 공간이 크다고 해서 작은 곳을 가둘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방문을 걸어 잠그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을 가두고 있는 중이라고
Mercury
내가 태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태양이 내게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온 몸이 떨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정해진 궤도 위에 놓여도 시간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가장 깊은 공간의 골짜기를 지날 때 행성 안쪽에서부터 실금이 갔고 보이지 않는 가스가 새어 나왔다
wormhole
세상 바깥으로 건너가기 위해 파낸 허공의 구멍 안에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사다리 계단을 밟고 밑으로 안으로 내려가 보았다 상체와 하체가 나오는 출구가 달랐다 얼굴과 목이 출입하는 문이 달랐다 분리된 몸이 각각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테라포밍
수백만 년 전, 인류는 화성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화성은 풍부한 산소와 오염되지 않은 물 그리고 안락한 온도와 하루 분량의 자전과 안정된 공전주기를 갖고 있었다 화성에서 바라보던 지구는 이산화탄소와 질소 바람으로 소용돌이치는 붉은 모래폭풍 매일 밤낮으로 극저온과 고열이 교차되는 대지에 갈라진 바위와 건조한 협곡을 가진 쓸모없이 버려진 불모의 행성이었다 어느 날 화성인들은 수백 년 내 화성의 자전축이 뒤틀릴 것이란 예측을 했고 기후와 환경이 빠른 속도로 파괴될 것으로 내다봤다 고도의 과학 문명을 가진 화성인들은 즉시 세 가지 테라포밍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화성 내 이주를 통한 부분적이고 순차적인 테라포 밍이었고 두 번째는 지하도시 건설과 지표면 전체에 대한 테라포밍 세 번째는 외계 행성에 대한 급진적 테라포밍이었다 이들 중 화성에 거주하며 추진하는 행성개조는 긴 소요 시간과 시뮬레이션 상의 위험요소가 너무 많아 최종단계에서 지능들의 승인이 거절되었다 화성인들은 지체 없이 그간 눈여겨보고 있던 외계 행성인 지구를 테라포밍하기 시작했다 지구로 이주한 후 고향인 화성을 재 테라포밍 한다는 대원칙이 세워지자 반대세력들도 명분을 잃게 되었다 지구인들에 비해 키와 몸집이 세 배 이상 자라났던 화성인들과 대형 가축인 공룡류들이 지구 중력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이 마지막까지 남았 으나 중력을 덜어내기 위한 소행성의 충돌 유도는 달의 공전 궤도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화성인들은 맨틀 전이대를 건드리며 지구를 뒤흔들어댔다 지구 내부의 열기와 숨겨진 물을 지표면으로 끌어 올리며 동식물 전송을 통해 이후 발생하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처하려 했다 이런 급격한 테라포밍은 수차례의 빙하기를 지구 표면으로 불러 들였고 이 과정에서 먼저 전송된 공룡들과 유인원들이 희생되어 갔다 화성인들의 동식물 정착 실험은 지구에 대한 테라포밍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모든 종류의 균류와 동식물 금과 같은 주요 광물들이 양자전송과 얽힘 기술에 의해 우주왕복선을 통한 운반과 이동 없이 현장인 지구에서 복제되고 재구성 되었으나 고도의 문명과 첨단 기술을 지닌 화성인들조차 아직 접근이 불가능한 신의 영역이 있었다 단백질의 복제와 재조립 과정에서 그간 축적된 누대의 DNA 정보를 덧입힐 수 없어 화성인들은 지구에서 원시 종족의 상태로 재조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캄캄한 진화의 과정을 다시 거쳐야 했지만 지구로의 이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음으로 화성인들은 원시 거인의 몸으로 지구에서 재구성 되는 방법을 택했고 이즈음 대부분의 화성인들이 지구로 전송되었다 이주 계획의 마지막 날 다수의 과학자로 구성된 화성인들은 그들 종족의 멸종 가능성과 강한 지구 중력을 감안해 몸집이 왜소한 일부 영장류에 진화의 씨앗을 심어 두고는 초거대 우주왕복선에 올라 지구를 향해 갔다 원시 거인들에게는 오히려 위험만 초래될 수 있어 미리 전송하지 못했던 최첨단 기술 장비와 집약된 데이터를 싣고 화성에 남겨진 지능들과 교신하며 순항하던 우주선들은 강력한 태양 플라즈마와 갑자기 불어 닥친 우주 방사능을 견뎌내지 못하고 출항한지 이틀 만에 암흑물질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한편 지구에서 재조립된 원시 거인들은 테라포밍의 부작용으로 되풀이 되는 혹한과 변이를 일으킨 일부 균류들에 의해 시달림을 받다가 많은 포유류들과 함께 멸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마지막 까지 살아남은 원시 화성인들은 본능처럼 심어둔 정보에 이끌리며 우주선 사고를 대비해 미리 약속한 대로 정한 날이 지나자 행성 간의 좌표인 피라미드를 쌓아 가기도 했다 지구에는 지금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을 겪은 영장류들 중 호모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아 현세 인류로 등장했다 그들은 수백 년 내 지구환경이 크게 변할 것이란 걸 예측하고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화성을 테라포밍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곧 인류의 축적된 DNA 정보를 덧입힐 수 없다는 것과 누군가는 우주 수송선에 직접 올라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다시 수백 만 년이 지난 후 살아남은 인류나 또는 진화된 다른 종족들은 화성에서 지구를 바라볼 것이다 자신들이 그 곳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모른 채 수억 년 그 이전부터 지구와 화성을 번갈아 오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중력 가루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은 아주 작고 작은 가루로 되어 있다 금간 항아리에서 새나온 물이 흙 속으로 가라앉듯이 중력에 쓰고 남은 가루들은 모두 어둠에 녹아 어딘가로 사라져간다 미세한 가루가 스며드는 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곳은 다른 법칙과 다른 물리량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이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맨 처음 이 세상으로 건너온 중력 가루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다 건너갈 때까지 그 때까지가 이 세상이 존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호의 목적
모든 생명체들의 고민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호를 갖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날개를 다친 새와 동굴 안을 지나는 습한 바람과 동굴 벽에 그려진 비대칭 도형들과 분간하기 어려운 종족들의 오랜 화석들과 멀고 먼 행성의 별자리들을 온전히 기호로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진화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약속된 그림과 언어와 문자를 주고받으려는 단 하나의 목적은 위험한 이 행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살아서 나가는 이주이건 죽음을 통한 전송이건 간에 기호화 되지 못한 것들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외로움의 특수 상대성
인간이 외로운 까닭은 각 자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가고 있는데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영역
한 사람만 바라보던 그 시간에는 어떤 경계가 있었을까 내가 사랑했던 그 시간들은 어떤 장르였을까
Moon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형 인공구조물인 달에 대해서 수백만 년 전부터 외계 지능들은 달의 내부에 자신들의 전진 기지를 만들어두고 지구라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성장하는 인간의 몸을 통해 영혼을 사육하며 다 자라난 영혼은 쏙 쏙 빼먹고 시들고 늙고 병든 인간의 육체를 폐기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강렬한 식욕과 성욕의 울타리로 탈옥을 방지하고 생존의 본능이 영원히 되풀이 되도록 굴레를 씌워 왔다 한때 이를 의심했던 고대 인류는 달 뒤편에 대한 세밀한 탐사와 천공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눈치 챈 외계 지능들이 유도한 운석 충돌로 지구는 수차례의 빙하기를 맞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인류가 멸종 되었다 그 이후 은밀히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달에는 인간의 영혼을 빻고 찧어내는 외계 생명체가 있다고도 했고 반사망원경을 조절하는 누군가가 보인다고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절구질 하는 토끼와 거울을 들고 있는 여인으로 와전되면서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 모두 농담처럼 웃어 넘겼다
에일리언
외계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려놓은 외계인의 모습을 보면 우리와 비슷한 듯 다른 듯하다 우리 몸을 밑바탕으로 검은자만 가득한 큰 눈과 뾰족한 턱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 머리칼과 털이 사라진 굶주리고 메마른 아프리카 어느 난민들의 모습 영화에서 등장하는 외계 에일리언의 모습을 보면 늘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그들은 입 속에 또 입이 있으면서 공룡과 새의 날카로운 발톱에 직립보행을 하며 돌고래의 미끄덩한 머리와 등을 가졌다 외계인을 목격한 증언들은 왜 항상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외계 종족들은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들의 조합이어야 하는가 호모사피엔스는 자신들이 보고 듣고 학습한 것들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려내지 못한다 외계에 존재하는 에일리언은 이제껏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 우리 앞으로 다가와도 에일리언이란 생각조차 못하고 지나칠 수 있다
공간 복사
시간과 공간은 빈 백지로 차곡차곡 쌓여져 복사기에서 쉴 새 없이 출력되는 뜨거운 종이처럼 한 장씩 분화되어 나온다 그 각각의 종이 속 평행우주 안에서 우리는 복제되고 인쇄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문득 언젠가 살아본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 같고 길을 가다 왠지 여기에 한 번 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처음 보는데 꼭 전에 봤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들 때는 그 복사기에서 가끔씩 종이 걸림이 발생할 때다
그늘과 어둠과 슬픔은 같은 종족이다
그늘은 빛이 닿지 않은 어떤 슬픔에 그을린 흔적이다 어둠은 울음의 파장이 끝도 없이 길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가서 서 있으면 둘 다 서늘해지는 곳이다
Mars
우리들의 유전자 그 어느 지점쯤에도 저렇게 황량한 계절이 자리하고 있을까 붉은 흙바닥에 나뒹구는 돌들 그 위로 끊임없이 불어가는 질소와 이산화탄소의 바람들 한때 느리게 쿵쿵거리던 공룡의 발자국 소리 익룡의 날개에서 떨어지던 깃털과 체온들 모래사막으로 가라앉던 매머드의 길고 긴 울음소리 그 끝에 매달리던 소금기들 물이 사라진 계곡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종족들의 시선만 남아 있는 곳
돌연변이
나뭇가지가 갈라질 때마다 생명체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여러 갈림길 사이에서 망설이고 망설이지만 그들은 종종 더 나아갈 수 없는 가지의 끝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들은 지체 없이 시간의 방향을 바꿔 지나왔던 길을 무작정 되돌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가지로 갈라진 미로 같은 길에서 그들은 돌아 나오는 길을 놓쳐 버리고 만다 돌연변이는 진화의 계통도 밖에서 길을 잃고 서성거리는 종족들이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걸어갔던 길을 허겁지겁 다시 되돌아 와야 했던 미래에서 방금 도착한 종족들이다
planet
행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건 별빛만이 아니었다 새들을 본적이 없는데 행성의 바람 소리는 점점 더 새의 울음소리를 닮아갔다 생명의 발아는 멀었고 진화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바위는 짐승의 그림자를 그려두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성급한 누군가는 이미 진화의 계통도 그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을까 수천 개의 겨울과 수백 개의 상형문자와 기호들이 행성을 다녀갔다 추위와 밤은 외부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들어본 적조차 없는 계절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자 안의 우주
어떤 물질이건 한없이 쪼개고 끝없이 확대해 들어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텅 빈 암흑뿐인 공간 불빛을 문 전자들이 순서 없이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그 작고 드넓은 원자핵 주위 공간을 살펴보다보면 어둠 속에서 낯익은 행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구와 화성이 토성과 목성과 태양계와 은하계가 그 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망망대해의 캄캄한 우주공간으로 향하는 통로가 극소의 저 작은 세계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크고 작음의 상대적인 개념만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둘둘 감겨 있는 낯선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약 70만 년 전 최초의 살인사건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시간이 순서 없이 밀려가 퇴적해 쌓이던 여섯 번째 지층쯤이었다 두개골에 쌓인 시간을 붓으로 털어내자 캄캄한 동굴에는 다시 혹한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유골들은 하나같이 두개골 왼쪽 눈 윗부분에 뚫린 구멍을 내 보이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흰 장갑을 낀 검시관들은 유골이 동굴 벽에 이렇게 비스듬히 기대진 채로 누군가 위에서 아래로 수차례 돌로 내려찍었다고 앉고 서서 상황을 재현해 보이고 있었다 문자도 언어도 자유롭지 못한 시대 이제 막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만들어질 무렵 멸종과 진화와 빙하기의 세 갈래 갈림길에 서야 했던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 그들은 왜 동족을 살해하고 뇌수를 꺼내려 했었던 것일까 70만 년간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전말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구멍 뚫린 유골은 부스스 흙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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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시간 널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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