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밤

이하석

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 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여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연탄재들

  인제(麟蹄) 부근 산골 부대 쓰레기 하치장. 
  마분지 조각 쇳조각 껌종이 서류 같은 것들 
  불에 그슬려, 연탄재 더미 사이로 몸을 숨긴다. 
  하치장 부근의 오리나무도 불에 
  그슬려, 어깨가 처진 채로 가지 하나를 
  힘겹게 하늘로 밀어올린다. 
  민들레꽃이 황토 비탈에서 잠깐 피었다 진 후 
  병사들은 다시 주위의 풀들을 뽑아버렸다. 
  깊은 밤 먼 논의 개구리 울음 소리에 
  연탄이 하나 허물어져내린다, 
  뼈들은 바람에 실리어가고 
  마음은 흙에 묻히며.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 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길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못 2

  그들은 녹슨 몸 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들인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흑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김씨의 옆얼굴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 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 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팬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 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 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는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거야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밑,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 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텨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어떤 어두운 밝음이 
  어떤 미로가 나를 이끌 것인가

  나는 내다본다 
  속에서 어둠의 뇌성은 치고

  나가고 싶다 
  초록의 문을 열고 싶다 나는 
  도 나가고 싶잖은 마음이 인다 
  또는 잠시 나가 패랭이나 캐서 
  화분에 심어보고 싶다 
  이 위태로운 어질어질함

  누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만진다 
  …밖에서… 누가 
  내 방의 어두운 창유리를 닦는다

명금폭포

  저 폭포는 나의 안으로 쏟아져 폭발한다. 모든 밖이 나 의 안이다. 모든 안이, 나의 상처이다. 가파른 절벽의 무 지개로 걸리는 솟구치는 마음의 우레.

가야산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 가엔 얼레지꽃들이 고개 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 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 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대가천 2ㅡ은어낚시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의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 
  그 밖의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은어를 본다. 
  언어에 기대어서. 
  이건 물론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 
  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 
  그 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화암벌 1

  눈 내리고 달개비 뿌리의 멀리 가까이 땅 속으로 난 물 길은 내 마음 아래 그대로 흐르고, 그 흐르는 물에 봄빛 이 그리움으로 아롱져 있다. 지난 가을 달개비가 닫은 들 녘의, 모든 것들이 얽힌 뿔 뿌리 아래 내 그림자의 뿌리도 얽혀 있다.

측백나무 울타리

  버스에 부딪혀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쏟아져내리는 사람들.

  그러나, 다아, 
  살았다. 
  죽음의 냄새 같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측백나무 향기.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신성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려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이쪽 켠에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고.

  쥐가 내 마음의 틈서리를 넓히며 
  세월의 자국을 그려낸다. 
  그들의 통로는 어둠 속에 묻힌 케이블선보다 
  확실한 전언을 갖고 있다.

  그들은 내가 벽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려주고 
  내 체취를 이루는 음식과 욕망과 그리움들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나는 그들의 통로에 덫을 놓을 생각이 없다. 
  쥐는 어디서든 다니며 이곳과 저곳을 연결한다. 
  (언젠가 대구 중심가에서 대낮에 4차선 대로를 가로지 르는 쥐를 본 적이 있다. 그 털은 곤두서고 그 눈은 광채 로 번쩍였다. 그 때 나는 길 이쪽과 저쪽 건너편이 도시적 구획이 아닌 어떤 삶터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자기만의 구역이란 무의미하다. 
  그들은 삶과 자연의 소통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건 출몰한다. 
  그들이 싸놓은 오줌의 네트워크로 내가 사는 도시는 여 전히 연결되어 있고, 
  그러한 한 나의 미래는 아직도 낙관적이다. 

야적 3

  1 
  보이지 않을 만큼, 어떤 큰, 것이 
  네모진, 엄한,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부둣가에, 
  바다로 막은, 선착장에 
  나를 가리며, 이중삼중으로, 
  무표정하게,

  ……그것들은 쌓여 있다.
  질서정연하게 
  또는 제멋대로

  그것들은 아무데나 쌓여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2 
  쌓여 있는 것들이 가리는 것이 있다.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바다, 
  추억 속의 흰 갈매기, 어떤 사랑. 
  그러나 상상의 것들은 쌓여 있는 것들과 함께 
  트인 바다 앞에서 쉽게 사라져버린다.

  3 
  부두에는 배가 떠 있기도 하고 
  파도 위에, 없기도 한다. 
  컨테이너는 물론 늘, 거기, 쌓여 있는 게 아니다. 
  그 배들이 부려놓았거나, 그 배들에 실려가버린다.

  부두에는 배가 떠 있기도 하고 
  파도 위에, 없기도 한다. 
  부둣가의 꿈도 그러하다.

비진도

  도시의 창처럼, 남자의 눈은 
  맑으나 속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지하철 공사장 쇠무더기 곁, 
  여자가 싸온 김밥을 선 채 먹어치운 젊은 인부는 
  은사시나무 아래로 서둘러 여자를 이끈다. 
  나뭇잎처럼 떨며 여자의 입술이 열리고 
  한 순간 격렬해지는 남자의 어깨. 
  마치 남해 비진도 서로 맞닿은 두 섬이 
  험한 물결 속 햇빛의 천만 조각 위로 뒤척이며 
  서로 끌어당겨 기우뚱해지듯.

소금쟁이 독서

  바람에 소금쟁이가 읽는 수면이 자꾸 접혀서 
  소금쟁이들 뭘 읽는지도 모르는 채 허둥대네

  그 난독이 게워낸 파도가 물가에 밀려와 끊임없이 소곤대어 
  내 맨발만 간지럽네

누런 가방

  가방들을 두고 침묵의 마을이라 한 화가를 기억한다 
  그의 가방은 잘 열리지 않고 
  늘 구석에 놓여 있었겠지 
  주인의 마음처럼

  지퍼란 지퍼, 멜빵이란 멜빵, 끈들은 모두 가지런히 빠짐없이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여행중인 검은 가방들이 서울역 무궁화호 개찰구 가까운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인공 쇠가죽의 불빛 덮어쓴 위쪽은 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아래쪽은 불룩하니 캄캄하다 
  가방 주위 어딘가에 있을 주인의 주머니도 가방만큼 자주 열리지 않아 
  뭐든 타협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갈 데가 있고 
  집요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쁘게 일어설 때까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방들은 완강하게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킨다

  안에 든 게 뭐든 제 것이 아닌 
  가방은 아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 
  열어보려는 이도 없이 가방들은 버려진 채 떠도는 늙은이들의 어제처럼 
  위가 짓눌린 채 구겨져 있다

불안한 의자

  큰 합판 위에 네모난 작은 합판을 깔고 
  거친 합판 조각들을 그 위에 이리저리 걸친 다음 
  다시 더 큰 합판 조각들과 합판 조각들을 쌓고 
  작은 합판 조각들을 그 위에 걸치고 
  큰 합판 조각들을 쌓고……

  계속 높이 쌓여가지만 결국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내 고단한 오후를 그 위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쉴수도 있으련만 
  의자였던 합판들 테이블이었던 합판들 
  속이 든든한 상자였던 합판들 
  위에 신문지 깔고 앉으면 
  합판들끼리 추억만으로 가지고 볶고 싸우는지 온통 삐걱거려 
  땅에 발 닿지 않는 내 몸 전체가 울렁울렁거린다

  합판 무더기에 깔린 풀들이야 옆으로 삐져나와 꽃 핀다 
  그것들 겁나게 자라나 내 임시의자인 합판 무더기들을 뒤집어버릴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땅 위에 내동이쳐져서 
  아무데나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무 사잇길이 밝게 부르는 것 같다 
  흐르는 마음이 닦아서 편편해지는 게 길의 힘이어서 
  산비탈도 길로 내려서면 나른해진다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접인 집에서 나와 
  가출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기척에도 귀 기울이며 
  사람들은 제 설레임들을 몰래 그 길에 내어널어 말린다

  사람들이 오간 기억으로 길은 굽이친다 
  아침에 길 쓸며 제 갈길 닦은 이는 제 길의 은짬에서 낮에 죽고 
  누가 그를 길 없는 비탈로 밀어 올리는지 가파른 산길이 새로 생겨난다
  그 길은 추억들로 환해지다 닫히리라

  바람도 한동안은 그 길로 해서 산자들의 마을길을 기웃거리리라 
  아침에 또 누가 그런 바람이 부산하게 다녀간 길을 쓴다

편지의 꿈

  송전탑 아래서 에코나비고*의 유충을 줍는다. 예쁘다. 아파트 거실 텔레비전 옆에 두니 몇 번인가 허물을 벗은 다음 날개까지 난다. 어두운 구석에 알들을 슬어놓는다. 자주 날려 보내고 쓸어낸다. 그러나 이미 바퀴벌레보다 더 교묘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그 기계충들이 점령했음을 안다.

  편지를 꼭 우체국에 가서 부친다면, 이메일들을 저것들 이 먼저 점검하고 소리의 색깔까지 씹어대는 게 기분 나 쁘기 때문이리라. 자주 핸드폰 배터리를 뽑고 컴퓨터를 끄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끝내 버리니 못하니, 나도 그 기계충들에 사로잡힌 셈이다. 형형색색의 기계충들을 애완으로 기르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그런 내게 자주 연락 두절을 투덜댄다. 그 투덜대는 소리의 전파를 야금야금 파먹는 기계충들의 이빨들이 가지런하다.

환한 밤

  편의점에서 때우는 늦은 저녁. 
  컵라면 물 끓이며 이미 어제가 되어버린 석간 뒤적이면 
  세상의, 뉴스라는 일들은 내내 구겨지는 소릴 낸다. 
  빨리 끓는 물엔 라면발과 함께 잘게 썰어 말린 채소가 풀리고 매운 맛이 깊은 밤 속을 부침한다.

  남자와 여자가 밤의 매듭을 풀거나 엮는 
  구석은 밤새 소주처럼 환하다. 
  심야 환히 켠 편의점으로 인해 생각의 구석들이 밝아지는 걸까?

  온갖 상품들 덮고 있는 불빛처럼 
  옛 추억은 디자인이나 상표들처럼 잠시 들추어질 뿐인데 
  등 뒤로 어둡게 날 선 바깥 가진, 불빛에 희게 탄 이들은 
  편의점에서 도시의 밤을 나누고 사며 카드로 긁는다. 
  사람들마다, 혼자 좀 더 밝은 생각의 삼파장 형광 전구 갈아 끼우며.

몽유도원도

  땅이 없으니 하늘 쪽이라도 개간하는 겐가, 
  산동네에 세들면 옥상에 알루미늄 박스랑 플라스틱 바케츠랑 깡통들로부터 늘어놓는다. 
  빈 수프 깡통까지 밑구멍 뚫어 흙 담아놓으면 상치밭 된다.

  봄엔 복사꽃 두어 송이 갈색 페인트 깡통에서 피어올라 무릉도원이라 불리더니 
  높은 지대라 나팔 불기 좋은 곳 아니냔 듯 페트병에서 솟아난 부지런한 나팔꽃 덩굴 옥상 난간 감아올라 여름 알린다. 
  채소들 연일 뜯어내도 흙심 좋아 이내 새로 푸르게 솟아나고, 
  도꼬마리, 개망초, 속새 씨들 바람길 떠돌다 아무 깥통 이나 플라스틱 통들에 왁자지껄 뿌리 내려 수북하니 숲 이룬다.

  밖은 뜨거워도 옥상 풀숲엔 맹수 고양이족 서식하는 서늘한 어둠이 있어서
  대도시 사막 건너온 이들 숨어드는 오아시스라 불린다. 
  저 아랫동네 먼지세상에서 낙타보다 편리한 기계 부리는 이들이 꿈꾸는 것도 흙바람 뚫고 솟은 무릉도원 아니겠는가. 
  그러나 꽃들 구름처럼 피어나는 이 몽유의 높이를 저 아래 사막세계의 현자들은 못 찾겠지.

  끊임없이 자잘한 꽃 피워 넘보는 
  아슬아슬한 몽유길이여. 
  옥상 난간 벼랑에 나팔꽃 새순이 내는 위태로운 잔도가 꿈길이어서
   산동네 사람들 하늘 향해 떠들어대며 꽃 피는 아침이 늘 그 길로 오신다.

호박

  비탈로만 기어올라 돌담 위에 전신을 뉜 비루한 삶이 피우는 꽃들이 어찌 저리 큰가? 끝까지 일관되게 그 노란 꽃의 논리를 따라 뻗치던 여름. 그 여름이 이룬 역사의 무 늬와 힘줄이 호박의 겉과 속을 밝게 지펴놓는다. 할머니 는 그 거대한 열매의 꽉 찬 속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길을 안다.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의 똥으로 채운 그 위에 씨를 놓고 흙으로 덮는 것으로 자신의 꿈의 서사를 펼쳤으니, 저 까칠까칠한 호박 넝쿨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당신의 생 의 탯줄이 뻗어 나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익은 누런 금빛 사상을 툇마루에 덜렁 놓아둔 게 참 당당 하다.

깊이에 대하여

  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 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 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해 서”라고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일 수 있다. 인스턴트 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은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 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쉬이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인가?

상응

  못둑 위에서 너는 검은 염소처럼 가만히 뿔 세운 채 
  못둑 아래 서 있는 나와 내 집을 내려다본다. 
  못물보다 더 아래의, 고요한 깊이 가늠하듯이.

  그러면 나는 또 못물 바닥의 돌처럼 바람 기운에 어룽지며 
  그늘의 잎들 다 턴 채 빨간 등들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 한 그루를 
  환하게 못둑 위로 올려 보낸다.

우포늪 백일장

  햇빛 노랗게 피운 수생 식물의 꽃 아래는 
  축축한, 어두운 설화들의 서식처여서 
  온갖 생각들의 뿌리들이 얽혀 있다.

  꽃그늘 뜯어먹고 사는 우렁이는 
  가장 긴 설화의 주인공인 양 그 밑바닥 어기적거린다. 
  진흙 위에 마침표 없는 산문을 길게 적는다.

  물거울의 빛과 그늘로 얼룩진 채 
  나도 그 어룽대는 이야기 받아 적는 척 
  겨우 짧은 시 한 편을 써낸다.

고양이 筆法

  까만 고양이는 재 속 불씨처럼 피어선, 
  캄캄한 속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와 
  눈이 또렷해진다.

  내가 늘 경계하는 밝은 속에 숨어 있는 어둠이 
  그의 이동통로이다.

  화선지 같은 밝음 속으로 재빨리 내달려가면 
  먹물 잔뜩 머금은 붓질이 지나가는 것 같다. 
  고요히 웅크렸다가도 문득 
  휘익-
  발톱을 드러낸 채 지나가 버린 뒤,

  긁힌 마음의, 허공의 여백에 먹물이 튀어 있다.

청도 냇가에서 대 무늬진 돌을 주워 ‘동풍’이라 이름 짓고

  속속들이 두근대는 동부새에, 상기 성깔 남은 소소리바 람에, 짐짓 명랑한 듯 퍼덕이는 동풍에 휘는-꼿꼿하게 휘 는- 겨울, 대나무들. 누워서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마디 마디 곧게 설레는, 동부새에 소소리바람에 동풍에 눕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디마디 한 마디로 일어나는 대나무들 의 푸른 물음들. 봄으로 쓸리는, 서걱이는, 헛될 수 없는 말의 카랑카랑한 잎사귀들, 동부새를 소소리바람을 동풍 을 안으려 흰 겨울 비탈에 서는 이가 그렇게 온몸 흔들며 안깐힘하며 휘젓는 칼날의 춤. 마구, 또 기어이 일어나 제 온몸의 빗자루로 서서 성긴 적멸의 어둠을 쓴다.

젊은 시인

  백지 같지만, 아주 희진 않고 
  황촉규 마양 솟아 큰 꽃 환히 피울 듯 고개 들고 두리번 거리며 
  무엇에건 잘 슬피 물들고, 그래도 늘 깨끗하게 
  보인다, 본다.

  절망도 젊은, 약은 점쟁이 같으니라구. 
  그의 언어는 가슴에서 나오다가 어깨를 돌아 날이 서서
  우리 뒷덜미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 흩뜨린다. 
  어떤 말이든 무슨 강이건 막말로 맨몸으로 건너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다의 해산

  서해는 온갖 뒤집는 말로서도 뭐든 낳아놓는다. 
  끓는 속 밀어낸 파도로 제 가장자리 긁어대어 
  해변 노니는 이들 어머, 어머, 하며 뒷걸음질 치게하면서도,
  우리가 찍어 포개놓은 발자국들 순식간에 지워버리면서도.

  그렇게 제 가장자리를 내처 긁어대면서도 
  솥의 바다 가득 미역국처럼 끓어 넘쳐서 
  해안선을 언제나 멀리 둘러친다.

  그러니까 미역국처럼 끓는 바다는 
  애 낳는 새댁이 고함치며 퍼덕여서 끝내 거뜬히 몸 풀어내는것처럼 
  젖은 제 속 피워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내의 해산기에 맘 졸인 채 조심스럽게 바다 밀며, 어선 몰고 나온 사내는 
  빨리 돌아오라고 파도 끈 당기는 아내의 손가락 힘 느끼며 
  미역국 가득히 끓는 솥의 바다 속에서 퍼덕이는 무지개만 건져 올린다. 
  수평선 너머 구름이 김처럼 피어오르고, 
  마침내 파도의 지붕 위로 으앙! 아기 울음 실린다.

토기와 능금

  고려 초기 때의, 청자가 나오기 직전까지 구웠다는 토 기. 그 선이 청자를 빼닮았다. 검다. 검은 유약이 헐어있 다. 푸른색은 저 헐은 검은 속에서 나왔나보다. 그 아래 능금이 놓여 있다. 붉다. 검고 붉게, 둘은 서로 익어 있다. 능금은 방금 다 익었다. 능금은 늘 새것이다. 토기는 9백 년이 넘은 것으로 70만 원 쯤 호가한다고 골동 수집하는 시인이 말해주지만, 토기와 능금이 서로 잘 익었다고 해 서 그 거리가 함께 재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정물의 구도 속에서 능금을 빼내어 껍질 채 베어 먹는다. 능금 속이 노 랗게 희다. 방금 다 익은 것이다. 온 땅 덮을 푸름 머금은 검은 씨가 들어 있다. 검은 씨는 배부른 토기처럼 둥근 윤 곽선이 부풀어 있다.

장터목

  바람이 지우고 지워도 
  늘 새로 밝혀 서는

  먼 데, 높이 
  나앉은, 
  천심(天心) 나누는 장터

  가쁜 숨으로 우련하게 올라서면 
  낮게 엎드린 채 고개 드는 악착으로 
  울컥, 원추리 피어 있는

  구름 위로 뉘 부르는 한 소절 더 높은 
  바람목

  새는 초소 위 안테나 끝에 앉아서 울기를 좋아한다. 
  유연하게 내려앉아 흰 날개를 접으면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울음 뭉텡이 같다.

  바다 쪽으로 엎드린 초소

  내면을 감춘 나무 그늘 아래 매복한 채 
  철조망 너머 또 아는 새가 날아오는지 살핀다.

  수상한 병사다. 
  속눈썹이 예쁜 그는 새에게 제 밥을 내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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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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